날씨가 풀린 주말 오후, 친구들이 다녀갔다. 밖에서 만나기에는 무거운 내 몸이 민폐인지라 집으로 오라고 했다. 김밥도 싸고 찐빵도 찌고. 자취하는 친구가 오기에 뭘 시켜먹기도 그래서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목하 열애 중인 H는 어째 더 앙상해진 것 같았고 귀차니즘을 달고 사는 E는 차를 뽑은 후 세차는 한 번도 안했으면서 앞머리를 내리고 매니큐어도 하고 나름 더 어려졌다.

  H는 첫사랑과 연애하는 요즘이 꿈만 같다고 했다. 판도라의 아바타처럼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 나는 먼저 시집 간 언니가 노파심을 부리듯 몇 가지 우려를 드러내면서도 사랑에 빠진 H의 눈빛을 보니 입을 다물게 되었다. 과거를 확인하는 그 남자는 교활했지만 H는 이미 판단력을 잃은 상태였다. 그래, 나중에 잘 살면 되니까. 나로서는 모든 것을 천천히 생각하기를, 몸이 안 좋아진 것 같단 이야기에 짬을 내서 병원에 꼭 가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H는 가족과 떨어져 오랫동안 자취를 해왔고 그만큼 혼자 사는 일에 지쳤거나 물려버린 것 같았다. 결혼하면 아이도 셋이나 낳을 거란다. H는 본래 성품도 그렇지만 오랜 외로움 때문에라도 웬만큼 괜찮은 시집을 만나면 정말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착한 며느리가 될 것 같다.

  E는 요즘 아버지로부터 하숙생이라고 불린다고. 집안에서 마주치면 야, 하숙생! 그러신단다. 제 방에 틀어박혀 책 보다, 인터넷 서핑하다, 잠시잠깐 방 밖으로 얼굴을 비추니 그럴 만도. 엄마는 아예 나가라고 하신단다. 하지만 독립할 자신도, 결혼할 생각도 없단다. 독립을 하기에는 기회비용이 많이 들고 결혼은 필요성을 못 느끼고. 그렇게 확고한데도 우리 나이가 그런 건지 무언의 압박 같은 것을 피할 수는 없다고. E는 그런 애매와 불안 사이의 무료함을 쇼핑으로 달래고 있었다. 너희는 백만 원이 생기면 뭘 할 거니? 여행을 갈까, 가방을 살까. 대학원 교수님이 삶의 넓이를 알고 싶으면 ‘삼국지’를 읽고, 삶의 깊이를 알고 싶으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어보라고 했다면서 내게서는 정이현의 책을 빌려갔다. ‘추노’ 재방송을 보면서는 입을 못 다물었다. 짐승남들의 초콜릿 복근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나, 이제부터 저 드라마 봐야겠다, 한다. 얘는 남들 모두 뱀파이어 에드워드에 꽂힐 때 혼자 늑대인간에 꽂혀서 난리다. 으이구, 지지배.

  친구들은 내가 결혼한 후로 이구동성으로 너무 비관적이 됐다고 한다. 씩씩하긴 해도 별로 낙천적인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더 비관적이 되었다니, 그저 약간 더 현실적이 된 것 뿐인데 아가씨들 눈에는 좀 각박해 보였는가 보다. 나는 결혼했지만 굳이 결혼하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을 여전히 하고 있고 남편이나 결혼생활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해주곤 하는데 결혼한 지 일 년 남짓 된 새댁치고는 너무 건조했나 보다. 그냥 너희들 상상만큼 장밋빛이 아니라는 말인데 자꾸 결혼하라고 부추기지는 못할망정 은근히 혼자 살 것을 종용이라도 하고 있단 말인가. 나야 친구들이 유부녀가 되면 공감대와 이야깃거리가 늘어나니 좋지만 나 안 심심하자고 일생일대의 큰 변화를 마구잡이로 부추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더욱이 매사 적응이 빠른 H라면 모를까, E는 결혼하면 나만큼이나 엄청 툭닥거리며 살 것 같아 쉽사리 권할 수도 없다.

  유럽에 갔다는 S와 육아에 바쁜 K는 오지 못했는데 다 같이 모인데도 좀 묘한 관계망에 얽혀 있기는 하다. 대학 시절 내내 동아리다 뭐다 외도를 많이 했던 나는 그래서인지 오히려 두루두루 친한 편인데 좁은 과 내에서 나 모르는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는가 보다. 예전엔 소문만 듣고 같이 흥분한 적도 있었지만 그새 세월이 많이 흘렀고 그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일을 겪다 보니 지난 시절의 동동거림이 생경할 지경이다. 내 삶은 그때만큼 뜨겁고 흥미진진하지 않지만 그 동안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조금이라도 더 깊어지거나 넓어졌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내 근본마저 두루뭉술해질 것 같지는 않지만 이제는 각 세우며 나 자신을 내던지는 일에 자신이 없어졌다. 점점 그렇게 되어버렸다.

  E는 미안했는지 다음에는 몸도 무거운데 그냥 시켜먹자고 말한다. 그래도 핑계 김에 오랜만에 남편과 김밥을 말면서 즐거웠다. 그는 친구들이 올 시간에 맞춰 도시락까지 예쁘게 싸서 자취하는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 친정엄마한테도 갖다 드렸더니 사위한테 손수 싼 김밥을 다 얻어먹는다고, 나중에 소풍 도시락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며 감탄하신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인 것이 결혼이라지만 그런 몇몇 순간들 때문에 살게 되는 것 같다. 비관적인 유부녀도 그래서 종종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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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7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8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8 1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9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0-01-17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밥에 우엉조림을 넣으면 감칠맛 납니다. 냉중에 한번 시도해보시길...^^

깐따삐야 2010-01-18 11:5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지난번엔 당근을 안 넣고 우엉조림을 넣었어요. 이번에는 오이도 들어가고 해서 뺐죠.^^

조선인 2010-01-18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우엉조림 한 표. 그나저나 정말 정갈해보고 얌전한 말음새입니다. 부러운데요?

깐따삐야 2010-01-18 11:53   좋아요 0 | URL
남자라서 그런지 꽉꽉 잘 말더라구요. 무려 스무 줄을 쌌는데도 안 징징거리고. 참말로 무던한 남자이긴 해요.

무스탕 2010-01-18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위가 싼 김밥 드시는 장모님은 정말 기분 좋으셨을거에요 ^^

울 동네 김밥집도 김밥에 우엉조림을 넣어요 :)

깐따삐야 2010-01-18 11:56   좋아요 0 | URL
제가 집에서 싼 엄마표 김밥을 정말 좋아라 하는데 남편이 비슷하게 흉내를 낼 줄 알아서 다행이죠. 엄마한테 늘 얻어다먹기만 하는데 가끔씩 싸다 드려야겠어요.^^

레와 2010-01-18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뻐요! ^^

깐따삐야 2010-01-19 09:27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