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을 하면 동기들끼리 시간을 맞춰 얼굴을 보곤 했었는데 누군가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연애를 하고, 먼 도시로 학교를 옮기고, 그러다보니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하루 종일 자리를 옮겨가며 논다던가, 밤늦게 술을 한잔 한다던가, 하는 일이 드물어지면서 서너 명 쯤 단출하게 모이는 풍경이 더 잦아졌다. 그래도 말로 벌어먹고 사는 직업인지라 서너 명이 모여도 군부대 하나 지나가는 것만큼 천정이 흔들흔들, 방구들이 들썩들썩 한다.
어제는 보충수업을 끝낸 K와 유럽에 다녀온 S가 놀러 왔었다. 임신한 친구가 입에 거미줄 칠까봐 걱정됐는지 오후 내내 쉴 새 없이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번에는 남편도 연수를 가고 김밥을 쌀 여력이 못 되어서 엄마가 빚어주신 만두로 만둣국을 끓였다. 마침 비가 온 뒤라 그런지 참 맛있게도 먹었다. 원래 결혼하면 누가 차려준 밥상이 가장 맛있는 법이다.
K는 친한 동기들 중에서 가장 먼저 결혼을 했다. 나는 K의 남편한테 끝내주는 곱창을 얻어먹고는 무한지지를 보냈었지만 그녀가 청첩장을 주었을 때 아주 잠깐, 울적한 기분이 들었었다. 이것저것 잘 챙겨주던 언니가 나를 떼어놓고 시집가는 느낌. K는 그 같은 성품답게 성실한 아내, 수더분한 며느리, 씩씩한 엄마로 잘 살고 있다. 느지막이 종손을 안아보는 기쁨이 컸는지 도우미 할머니가 있는데도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드는 시부모님들 때문에 처음에는 스트레스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고. 출산 후에 부지런히 관리를 잘했는지 피부나 몸매도 거의 그대로였다. 다만 건강에 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별 것 아니겠지만 나 같으면 이 사람 저 사람 들볶으며 난리법석을 피우고 있을 텐데 워낙에 느긋한 성격이라 그런지 정밀검사 받아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웃으며 한다. 그런 의젓함이 놀라우면서도 안타까웠다.
S는 동갑내기 남자와 연애 중이다. 낌새는 있었지만 긴가민가했었는데 전화 받는 폼을 보니 연애 기류가 짜릿짜릿. 남자는 S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헌신을 다하고 있었고 S는 엄마가 반대하면 안 만나, 원칙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다. 본인은 극구 부인하지만 국내 최고학부를 나온 데다 자상하기까지 한 오빠와 형부가 있다 보니 웬만한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S의 자신감이나 신중함은 거북스러운 그 무엇이 아니라 그녀의 순진한 귀여움과 잘 맞물려 기분 좋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때가 많다. 나는 내가 말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말 많은 남자는 질색인데 얘는 말이 없는데도 재밌어서 좋아. 이 대목에서 딱이구나, 싶었다. 동갑이니까 친구처럼 편하게 만나보면 되겠다고 했는데, 모르겠다. 남자 성품을 보아하니 깨나 진득해서 어쩌면 올 가을 쯤 좋은 소식이 들릴지도.
K는 그밖에도 담임 학급에 한부모 가정이 삼분의 일이나 된다며 생활지도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본인이 엄마가 되고 나서 그 아이들이 보이는 특이행동을 더욱 눈여겨보게 되었을 것이다. 나도 임신 소식을 듣고 학교에 나갔을 때는 아이들 눈 두 개, 손가락 다섯 개까지 모두 소중하고 다르게 보였는데 어느 엄마가 그렇지 않으랴마는 팍팍한 세상에서 가정을 지키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은가 보다. 당연하게 여겨지던 모성이나 부성이 언젠가부터 시대착오적인 고루한 심성처럼 인식되면서 부모들이 각자 ‘나’를 주장하게 된 사이, 아이들이 내팽개쳐진 경우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아무리 훌륭한 양육자라고 하더라도, 부모의 자리를 완벽히 대체하기는 힘들다. 어른들 말씀대로 요즘은 가족 구성원이 있을 자리에 온전히 다 있는 것도 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연애를 아무리 오래 해도 막상 그 남자가 남편이 되고 가족이 되면 다른 느낌 같은 게 있어. 임신 기간 동안 정말 좋았다는 말에는 공감할 수 없었지만 이 대목은 알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아침에 나갔던 남편이 오후에 삐비비빅, 자기 마음대로 비밀번호를 누르며 불쑥 들어온다던가, 하루 종일 집안 여기저기 나와 같은 공간을 쓴다던가, 하는 일이 낯설 때가 많다. 이렇게 평생 같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내가 이런 것도 예상을 못하고 결혼하다니, 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질 때도 있다. K는 객지생활에 물려 있었고 결혼과 동시에 새로운 가족이 생기고 자리를 잡은 경우이지만 나는 타향이긴 해도 부모님이 곁에 계셨기에 오히려 결혼 전이 생활면에서는 더 편리한 점이 많았더랬다. 하지만 뭔가 나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결혼이란 걸 했고 만나고 싶을 때만 만나던 연인이 남편이 되고 보니 어디서 내 인생 속으로 뚝, 떨어진 것 같은 이 남자와 어느새 남매나 오누이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알고 보면 생판 남남이지만 함께 걷는 동지애로 뭉친 사이. ‘나’를 위해 ‘너’를 돌볼 수밖에 없는 기묘한 관계. 이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영상은 대형 스크린의 로맨틱 무비라기보다는 8미리의 홈 무비에 더 가깝다.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다고 툴툴거리는 K와 나를, 미혼인 S는 부러워도 했다가, 도리도리 했다가, 마구 헷갈려 하다가 돌아갔다. 결혼 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도우미 할머니를 집에 보내드려야 하는 K와 퇴근할 남편이 있는 나 때문에 이번 만남이 너무 짧고 아쉬운 듯해서 조만간 누구도 부르고, 누구도 불러서 다함께 보자고 기약했다. 몸이고 마음이고 부디 아프지 말아야 할 텐데. K가 얼른 회복하고 S도 연애 전선 이상 없기를. 날씨도 꿀꿀했는데 친구들 덕분에 좋은 에너지를 많이 얻었다. 매사 칭얼대는 일 없이 듬직한 K, 사랑스러운 언어와 밝은 기운으로 주변에 빛을 주는 S, 벌써 함께 한 세월이 십년이 넘었지만 변함없는 그 다정함이 새삼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