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새 결혼한 지 2년이 됐다. 아직 3년이 된 것도 아니고 30년이 된 것도 아닌데 남편은 참으로 심상하게 뭐 받고 싶은 거 없냐고 물었다. 나 또한 아무렇지도 않게, 실제로도 너무 감흥이 없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우리 영달이한테나 잘하라고 했다. 기념을 할 일이어야 기념을 하지.
영달이에게 진한 가을향기를 느끼게 해줄까 싶어 근처 수목원에 갔고 작년 봄, 둘만 왔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2인 자전거를 빌렸다가 박자가 안 맞아 허벅지 근육이 놀라고 말았는데 그는 나의 운동 부족을, 나는 그의 리더십 부족을 지적질하다가는 결국 낡고 무거운 자전거 탓을 하며 멋진 연출 포기. 각자 자전거를 빌려 타고 봄기운을 만끽했다. 마주앉아 김밥을 먹는데 아기 입에 마실 것을 대주는 건너편의 부부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그때 일년 후의 풍경을 상상했고 그대로 되었다.
엄마는 결혼기념일인데 둘이 저녁이라도 먹지 그러느냐고 하셨고 나는 됐다, 이제 영달이 없는 풍경은 상상할 수 없다, 고 대단히 헌신적인 엄마이기라도 한 것처럼 잘라 말했다. 실은 그냥 좀 귀찮고, 딱히 나가서 먹고 싶은 것도 없고, 돈도 아깝고, 입고 나갈 옷도 마땅치 않고, 모처럼 나가서도 영달이 얘기에 영달이 생각만 하다가 돌아올 게 뻔하고, 무엇보다도 기념을 할 일이어야 기념을 하지.
엄마는 재미없다, 너무하다고 말씀하시면서 푹 고아낸 토종닭을 뚝배기에 옮겨 담으셨다. 두툼한 닭다리 하나가 뚝배기를 그득 채우다 못해 밖으로 삐져 나왔고 송이버섯 때문인지 폴폴 끓는 냄새가 향기로웠다. 나는 무뚝뚝하게 전화를 걸어 저녁시간 되면 저녁 먹으러 친정집으로 오라 일렀고 그는 빈번히 있던 일이니, 알았다고 대답했다. 고3 아이들이 저녁을 먹으러 학교 식당으로, 근처 분식집 등으로 뿔뿔이 흩어진 사이, 남편은 사분사분 걸어 친정집으로 왔다. 이 아파트 단지와 그가 근무하는 학교는 고작 담을 하나 사이에 두고 있다. 그러니 자율학습 감독하다가 공연히 쉬고 싶으면 아기 보러 간다고 쪼루루 걸어오는 게다.
남편이 닭다리를 뜯고 밥을 말고 국물을 마시고 하는 사이, 세 사람 중 아무도 결혼기념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아빠가 정신없이 배를 채울 때 영달이도 닭국물에 찰밥을 말아 오물오물 먹었다. 남편은 들어설 때보다 한결 훤해진 얼굴로 영달이를 안아주곤 자율학습 시간에 맞춰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엄마는 얼마나 배고팠으면, 안쓰러워하셨고 나는 진짜 맛있게 먹네, 원래 월요일 시간표가 가장 빡빡하대, 민숭민숭 대꾸했다.
다음 날, 남편은 신발을 사준다고 했다. 손을 심하게 탄데다 바깥 바람 맛에 취해버린 영달이가 그 흔한 유모차도 안 타고 아기띠도 안 하고 온동네를 바둥바둥 휘젓고 다니니 힘든 건 내 몸이고 닳는 건 내 신발이다. 이참에 폭신하고 편한 걸 하나 사볼까, 따라갔는데 폭신하고 편해 보이는 신발은 많아도 내꺼다 싶은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기능이 우선이라지만 마음에 안 드는 신발은 사봤자 신어지지 않기에 구매욕이 현저히 떨어질 찰나 즈음, 남편이 구두와 운동화 중간 쯤으로 보이는 검정색 단화를 골랐다. 예쁘지도 않은 주제에 가격만 엄청 세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밑창도 눌러보고 요모조모 살피더니 아주 딱이라며 계산을 해버렸다. 나는 조그만 목소리로 투덜거리면서도 한편으론 그래, 아무려면 어때, 발만 안 아프면 그만이지, 마음을 접기로 했다. 그래도 너무 비싸단 생각은 끝내 가시질 않았다.
결국 편하긴 하겠지만 안 예쁘다, 똑같이 생긴 싼 신발이 길거리에 널려있다, 값을 못하는 신발이다, 신었을 때 애기엄마답지 않아 보인다, 등 친정엄마의 동의에 힘입어 환불 받기로 결심. 휴지통을 뒤져 기저귀 사이로 보이는 영수증을 찾아서 환불을 받았다. 그리고 그 돈으로 포근하고 낙낙한 영달이 내복을 샀다. 남편한테는 막상 신어보니 별로더라, 내가 입는 옷들과 당최 안 어울리더라, 이야기했고 그는 그냥 편하게 신으라고 사준건데 하여간 참... 말끝을 흐리며 알겠다고 했다. 오늘 오후에 영달이를 안고 동네 신발가게를 지나치는데 괜찮은 신발이 보였다. 굽이 낮아 편해보이면서도 귀여운 구두였는데 조만간 사러가야겠다.
결혼 2주년. 남편은 마누라가 아니라 장모님이 해주신 토종닭을 먹었고 영달이는 엄마 신발을 환불받은 돈으로 귀여운 내복을 사입었다. 나는 남편으로부터 눈부시거나 눈물겨운 편지는 커녕, 식상한 문자 한통을 받았는데 물론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그냥 속으로 그래, 그러마, 별 수 있냐, 했더랬다. 엄마 말처럼 좀 너무한 기념일이었지만 장기하 오빠 말맞따나 별일 없이 산다면 그걸로 된 거다. 그냥 오늘처럼.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