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에 나온 김경진을 보고 나, 쟤 좋다고 말했더니 남편 왈, 당신은 어딘가 좀 모자란 사람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요. 내가 거침없이 대꾸하길, 그러니까 당신 같은 남자랑 결혼했지. 남편은 능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만은 단 하나의 예외라고 뻔뻔스레 응대했다. 내가 비록 손톱에 때 끼었을 것 같은 연예인 1위를 좋아한다지만 이런 나를 옹호하진 않더라도 존중은 해달라. 결혼 2주년을 앞두고 우리가 나눈 허접한 대화다.    

  시시한 에피소드지만 살다보면 이처럼 옹호와 존중 사이를 오락가락 할 때가 있다. 남편을 향한 내 입장이 대개 그러한데 그로부터 발설되는 50.8% 가량의 의견에 대해 나는 전적으로 옹호하기도, 그렇다고 무조건 반대하기도 뭐할 때가 많다. 그럴 땐 그냥 애매하게 존중하고 만다. 개그맨 김경진에 대한 인상 뿐만 아니라 쪄먹었을 때와 구워먹었을 때 고향만두의 차이점까지 사소한 예는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보다 굵직한 문제에 관해서는 온몸으로 화내기를 열연하며 맞서기도 하는데 그런 일이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질 만큼 가치관의 갭이 컸다면 연애시절 이미 쫑났으리라.  

  비단 부부 사이 뿐만 아니라 다른 타인을 바라보는 태도에서도 그럴 때가 있다. 좀더 어릴 적엔 공연히 흥분하여 엑스맨의 로건처럼 삼지창 세워가며 호오를 피력했는데 이제는 대개의 불편한 사안에 있어 옹호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존중한다, 는 입장에 서는 편이다. 엄살과 고통, 위선과 진실을 한눈에 식별할 수 있을 만큼 혜안을 갖진 못했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섣불리 돌을 던질 정도로 경망을 떨지는 않게 되었다.  

  어떤 경험과 그 경험이 주는 가르침은 바로 오분 전 일처럼 선명하게 각인되는데 특히 상처를 주었거나 상처 입은 경험이 그렇다.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친구로 남은 한 녀석이 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머리카락으로 늘 한쪽 눈을 가리고 다녔고 나는 그것을 겉멋으로 치부했다. 그 이후, 녀석이 입밖에 내는 말들을 과장 섞인 엄살로 깎아내리기 일쑤였다. 어느 날, 그를 향해 묻어두었던 한 마디를 던졌고 그 찰나의 순간, 녀석은 상처에 데어 새카맣게 타버린 듯한 얼굴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정말로 그렇다면 너 어쩔건데. 나를 한가운데 둔 채 숨막히는 정적이 감돌았고 머릿속은 진공 상태. 때는 이미 늦었다.                      

  심야식당에 찾아드는 외롭고 착한 손님들처럼 녀석도 그랬다. 외롭고 착하기에 몹쓸 나를 친구로 받아주었겠지. 대학원에 다니던 무렵, 평일 오후에 녀석이 갑자기 나를 보러 내려왔다. 추어탕에 깍두기를 순식간에 비우고는 알록달록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며 그만큼 오래 봐놓고도 한번도 털어놓지 않았던 긴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그의 부모의 삶도, 그 부모를 바라보는 녀석의 시선도, 당시 녀석의 생활도, 완전히 옹호하거나 지지할 수 없었지만 그를 존중할 수 있었고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가 아니므로. 늘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있던 한쪽 눈은 하얀 안대로 덮여 있었고 그의 쾌유를 빌며 잔소리 몇 마디를 보탰다. 결혼 후, 얼마 안 되어 녀석이 럭셔리한 벽걸이 시계를 결혼선물로 보내왔다. 식장까지 들고 왔었는데 전해주지 못했다고. 녀석은 모르겠지만 걸어두면 오분 전 그 일이 두고두고 상기될까봐 고스란히 보관 중이다.     

  깨끗한 인물 하나 구해오기가 그렇게 힘들더냐, 탄식이 절로 나오던 청문회장처럼 세상엔 추궁당하고 비판받아야 마땅한 경우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일들이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여론에 의해 난도질 당하는 꼴을 종종 보게 된다. 나 또한 아무 생각 없이, 때로는 깊이 생각한 척, 대담한 확신을 갖고 왈가왈부한 적이 많지만 돌아오는 건 후회 뿐. 아무 것도 없다. 간혹 내가 비판했던 사람과 똑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어 그제서야 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혹여 내가 그 비판에 대해 응당 벌을 받고 있나, 뜨끔했던 적도 있다. 세상에는 사람의 머릿수 만큼 다양한 삶과 죽음과 사랑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그만큼 숱한 목소리들로 웅성거린다. 나 역시 이렇듯 입을 놀리고 있지만 불가해하고 아이러니한 인간사, 옹호할 수는 없을지라도 확실한 비판보다는 애매한 존중이 더 나을 때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누구를 비판하고 싶어질 때는 말이지." 하고 아버지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네가 누리고 있는 만큼 그렇게 유리한 처지에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위대한 개츠비>는 이 문장만으로도 진정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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