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마트에서 J 선배와 우연히 마주쳤다.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차분한 목소리. 둘째를 낳은지 두달 쯤 됐다는데 이쁜 복어라는 옛 별명이 무색하게 핼쑥했다. 우리는 여전히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고 선배는 바뀐 연락처를 일러주었다. 동행했던 엄마는 좋은 그늘 아래서 자란 사람 같다, 고 평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영달이가 잠든 후 짤끔짤끔 울었다. 볕이 화창한 오후였는데 그늘진 블라인드로 추억이 드리워졌다. 언젠가 J 선배는 내게 조심스런 충고를 건넸고 나는 그것을 거부했다. 나중에 선배의 충고가 옳았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 나는 선배의 칼날 같은 미소에 마음을 베어버렸다. 그것은 힐난이나 책망의 제스처는 아니었다. 어른이 아이에게 지어보일 수 있는 종류의 미소였다. 만약 그것이 명백한 힐난이나 책망이었다면 지금껏 그 미소를 기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새 엄마가 된 나는 예나 지금이나 갈팡질팡 사느라 은혜 입은 사람들을 잊고 지낸다. 특정한 시기, 특별한 누군가로부터, 시의적절하게 입은 은혜는 두고두고 나를 괴롭혀댄다. 잊지 않는다 해도 마땅히 갚을 길 없는 마음의 빚이란 것이 있다. 원수 진 사이보다 더한 것. 엄마의 적확한 평처럼 선배는 좋은 그늘 아래서 자랐고 타인에게 좋은 그늘을 드리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청량한 그늘 아래서 인생의 한 마디를 키웠다.  

   수목원에 다녀온 후, 자연의 조화인지 영달이 아랫니 두개가 올라왔다. 앙증맞고 딴딴하고 대견해서 나는 또 바보처럼 웃었다. J 선배는 엄마가 된 나를 신기해했고 나 역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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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10-10-20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선배를 두셨네요.
멘토까지는 모르겠지만 인생을 살면서 정신적 도움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습니다.
아웅 영달이의 저 귀엽게 웃는 모습이라니.....
이가 나고 있으면 잇몸이 가려와 엄마손을 잡으면 깨물겠어요.
우리아이들이 깨무는 압력이 느껴져서 좋아요. ㅎㅎ

깐따삐야 2010-10-20 12:59   좋아요 0 | URL
네, 정말 그렇죠?
그리고 그때의 내가 아니고는 갚아지지도 않으니 말예요.
요즘은 뭐든지 잘 깨물고 야금야금 씹어대고 그렇답니다.^^

레와 2010-10-20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장해제 시키는 아이의 미소. :)

산책하기 좋은 계절이에요 깐따삐야님!

깐따삐야 2010-10-20 12:59   좋아요 0 | URL
그래서 전 날마다 바보에요. 헤에~
오후엔 볕이 좋아 이곳저곳 산책합니다. 레와님도 가을 산책 즐기셔요!

Alicia 2010-10-20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달이가 벌써 이렇게 많이 컸군요! 흐흣
아기들은 자고 일어나면 정말 쑥쑥 크는 것 같아요.
엄마들은 늘 아가 보면서 웃지요. 바보처럼 웃었다는 표현이 참 재밌어요^^
저도 엄마될 날 올까요- 서른 가까워지니까 가끔 상상해보긴 하는데요,
정말 자신없어요 아기키우는 거.ㅠㅠ

깐따삐야 2010-10-21 11:43   좋아요 0 | URL
아직 7개월이 안됐는데 벌써 9킬로그램이 됐어요. 영달이는 정말 매일매일 자라나요.
누굴 사랑할 때도 이만큼 웃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이만큼 바보가 된 적도 없구요.
저도 알리샤님과 똑같은 생각을 했었죠. 상상했었고 자신없었고 그러다 결혼과 출산, 이 모든 일이 운명처럼! 언젠가 이곳에서 알리샤님의 귀여운 아가를 볼 수 있는 날이 올거라 기대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