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늘 라디오를 들으셨어요. 그래? 나도 라디오를 들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더라. 그게 아니라, 할머니는 시간을 아실려고 라디오를 들으셨어요.

  기억에 남는 대사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대충 저랬을 것이다. 주말에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보았다. 박찬욱 감독의 의도는 알 것 같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하는 방식은 여전히 나를 불편하게 했다. 솔직히 이번에는 다소 유치하기까지 했다. 극적이고 만화적인 상황 설정과 빨강, 파랑, 하양의 선명한 이미지들. 그의 영화는 한 번 보고나면 잊을 수 없는 장면이나 대사들이 몇 가지 뇌리에 남는다. 배우들은 몰라보게 연기를 잘하고 이 감독 천재가 아닐까, 싶은 느낌이 문득 떠오르는 순간도 있다. 그렇지만 그의 영화를 이해했다고, 반드시 챙겨보아야만 직성이 풀린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냥 유명한 박찬욱이고 그의 영화는 매번 나를 긴장시키거나 불편하게 하고 광고를 보면 호기심이 생긴다. 쏘우 시리즈처럼, 보기 전에도 보고난 후에도 썩 느낌이 좋지는 않은데 왠지 한 번 보고싶기는 한 그런 정도.

  영화를 보면서 요양원 안의 환자들은 오히려 행복해 보였다. 그들은 트라우마를 그대로 실현하며 그들만의 천국 속에서 자유를 구가하고 있으니까. 아픈 사람들, 정말로 불행한 사람들은 의식을 하든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든 내상을 억누른 채 피곤하게 생활하고 있는 나를 비롯한 내 주변 다수의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김형경의 소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읽으며 정신분석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지만 실제로 정신분석을 받고 나서 내가 몰랐던 나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 그다지 반갑지 않다는 게 새로운 문제거리였다. 그래서? 그런 다음엔? 내가 소설가도 아닌데. 분석과 치료를 통해 내 시야와 시선에 변화가 찾아와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고 해서 내 스스로가 더 행복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그냥 나이고 싶은, 그런 질긴 욕구에서일지도 모르겠다. 무를 먹는 쥐면 어떻고 밥으로 충전하는 싸이보그면 어때. 그들의 상상력은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 다른 것은 나쁘지 않다. 유해한 것만이 나쁘다.

  예전부터 갑작스레 예민해지거나 충동적이 될 때는 내가 미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시달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 자체가 나는 완전히 미치지는 못했다, 는 증거이며 달리 생각하면 사람은 정도의 차이일 뿐 대개는 몇 퍼센트 정도 미쳐있는 게 맞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더욱이 남들이 고개를 내두를 정도로 뭔가에 사로잡혀 있거나 자신만의 세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사실은 얼마나 근사한가, 라는 시샘까지 느꼈다. 여러가지 변수에 의해 어떤 사람들은 예술을 하게 되기도 하고 어떤 운 나쁜 사람들은 범법자가 되기도 하지만 그들의 집념은 그 원천이 무엇이었든 참 놀라운 것이다. 스스로 행복하고 사회적으로 무해한 미치광이들이 많은 사회가 어쩌면 유토피아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인간적인 애정에서 나온 관심이 아니라 스스로와 저울질 해보기 위한 통속적 관심. 비판하고 내치고 가두기 위한 관심. 그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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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1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6-12-11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그냥 순전히 취향 탓일지도 몰라요.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말이죠. ^^

레와 2006-12-11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것은 나쁘지 않다. 유해한 것만이 나쁘다.]란 님의 말에 200% 공금합니다.!

아..
지금 현재까지 보고 싶은 영화가 6개인데..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요!
그중하나가 바로 이 영화..

하고 싶고, 읽고 싶고, 보고싶고, 듣고 싶고, 찍고 싶고..
요즘 저는 '싶고'에 중독되어 있답니다. 원츄홀릭..;;

지금 날씨는 쬐끔 포근해졌습니다.
건강한 한주 되세요! ^^*

마태우스 2006-12-11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이 엇갈리는 영화더군요. 정보를 미리 알고 영화를 봐야겠어요. 끝나고 이게 뭐야, 이러지 않도록요. 무해한 미치광이와 유토피아의 관계에 대해 동감합니다.

깐따삐야 2006-12-11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와님, 영화도 못 보시고... 요즘 왜 그렇게 바쁘신 거에요? 궁금. ^^

마태우스님, 이 영화 끝나고 뭐야, 끝난거야? 이런 웅성거림이 여기저기서 들렸더랬습니다. 결국 임수정과 정지훈이 찾아 헤맸던 존재의 목적은... 뭘까요.
 



  우동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의 하나다. 갖가지 혐오식품을 비롯해서 가리는 음식이 거의 없긴 하지만 요즘처럼 춥고 싸무룩한 계절이 오면 엄마에게 어서 신김치로 만두를 빚자고, 버섯을 넣고 우동을 끓여먹자고 졸라대곤 한다. 특히 오늘같은 날씨에 호로록 호로록 빨아들이는 통통한 우동 면발과 향긋하고 따끈한 우동 국물은 추위에 움츠린 심신을 함께 녹여주고 달래주는 행복의 묘약이다.

  엄마가 알려주신 우동 조리법 : 가쓰오부시로 육수를 만든 다음 진간장으로 색을 내고 파, 마늘, 버섯을 넣고 후추로 향을 낸다. 면은 삶아서 건져낸 후 찬물에 한 번 헹군 다음 끓여놓은 육수를 부어 상에 낸다. 이 때 썰어놓은 김과 계란 지단, 쑥갓을 고명으로 얹는다. 기호에 따라 어묵이나 새우튀김 등을 곁들여 먹으면 좋다.

  시장에 가면 우동 냄비를 사올 생각이다. 그릇에 욕심을 내 본 적이 없는데 일식집에 가면 볼 수 있는 고리가 달린 둥그런 우동 냄비가 무척 탐이 났다. 이 새카맣고 앙증맞는 냄비에 매끈매끈한 면을 담고 향긋한 욕수를 부어 김이 폴폴 올라오는 것을 지켜보면 가슴이 얼마나 포근해질까 싶었다. 위에 보이는 그릇도 옴폭 패인 모양이나 열을 간직하는 정도나 썩 괜찮은 편이어서 우동이나 만두국을 담아 먹기에 제격이지만 나는 여전히 검고 무거운 우동 냄비가 갖고 싶다.

  밖에는 눈이 오고 좋아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서 냄비 우동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가끔 상상한다. 우동은 어쩐지 나에겐 '매우 기분 좋음'과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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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12-05 0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좋아하는 사람과 먹으면 꼭 우동이 아니라도 멋질 겁니다^^ 참고로 전 포장마차의 우동, 그것도 3차쯤 끝내고 먹는 우동을 아주 좋아하죠

깐따삐야 2006-12-05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비좁은 포장마차에서 먹는 우동, 고속도로 휴게소의 우동, 저도 집밖의 그런 우동들도 좋아라 해요. ^^

BRINY 2006-12-05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탁 위에 직접 올려놓고 보글보글 끓여먹도록 조리 기구도 하나 사고프네요. 전골이나 샤브샤브할 때도 좋을 듯.

깐따삐야 2006-12-05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INY님, 아, 저 전골이랑 샤브샤브도 좋아하는데. 뜨거운 냄비 요리가 그리워지는 계절인가 봅니다. ^^

Mephistopheles 2006-12-05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아쉽지만 생우동이라도 끓여 먹어야 겠어요...^^

깐따삐야 2006-12-05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도 우동을 좋아하시는군요. 생우동도 맛있어요. 전 우동이라는 우동은 다 좋아한다지요!

레와 2006-12-05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흑..............
저 좀전에 미역국에 밥한그릇 뚝딱! 해치우고 왔는데,
그래도 우동이 땡깁니다.
휴게소우동이나 투다O 김치전골우동도 끝내주죠..
이슬이와 함께..
아... 땡긴다.....!!

감기 조심하세요~!!

깐따삐야 2006-12-05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와님, 아무래도 주량이 상당하실듯. 우동에 소주맛을 아는 분이라면 말예요. 호홋!
 

  가을에 보았던 시험에 합격했다. 오전에 확인을 했다. 이제 내년부터는 2년 동안 교원대로 파견을 나가 공부를 하게 된다. 아이들과는 잠시 떨어져 다시 대학생처럼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3년차.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주어져서 정말 기쁘다.

  개인의 발전 면에서나 금전 면에서나 혜택이 많은 기회였고 욕심이 났었다. 계절제 대학원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빡빡한 일정에 매이기 싫어서 한 번 저질러 본 것이었는데 운이 참 좋았다. 출퇴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아이들의 아우성에 시달리지 않고 마음껏 공부만 할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좋다.

  입학은 3월이다. 교단에서 잠시 비껴서서 나를 돌아보고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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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01 2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6-12-01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배우고 돌아와서 아이들 앞에 더욱 떳떳하게 서고 싶네요. ^^

kleinsusun 2006-12-01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띠삐야님, 축하해요!!!
글쿠....부러부러!^^

물만두 2006-12-01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깐따삐야 2006-12-01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leinsusun님, 고맙습니다. 님처럼 저도 부지런히 살고 싶네요. ^^

물만두님, 고맙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책도 많이 읽고 그래야겠어요. ^^

BRINY 2006-12-01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시험 무척 어렵다고 하던데요! 축하드립니다~ 정말 야간이나 계절제 대학원은 너무 힘들어요.

이잘코군 2006-12-01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축하드립니다. 저는 힘들어 죽겠슴다. 아휴.

페일레스 2006-12-01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더 훌륭한 교사가 돼서 돌아오세요. ^^

깐따삐야 2006-12-02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INY님, 좋은 기회인만큼 열심히 해야겠어요. 고맙습니다. ^^

아프락사스님, 고맙습니다. 님도 힘내세요!

페일레스님, 고맙습니다. 노력해 볼게요. ^^

Mephistopheles 2006-12-02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   깐따삐야님의 시험합격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나다. 축

 -알라딘 서재지기 일동-

입학실날 플랭카드 좀 걸어드려야 겠군요..^^


깐따삐야 2006-12-02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감사합니다. 민망하네요. ㅋㅋ;;;

마태우스 2006-12-02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는 태도, 존경스럽네요. 그 채찍으로 저도 몇대 갈겨 주심 좋겠.....
-저 절대 마조히스트 아니어요!-

개츠비 2006-12-02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항상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

깐따삐야 2006-12-02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채찍질까지는 아니었고... 고맙습니다. 알라딘에서 항상 웃음을 선사하고 계신 마태우스님도 큰 도움을 주신거에요. ^^

sretre7님, 최선을 다한다는 말에 상당히 찔렸습니다. 재충전하고 돌아올게요. ^^

레와 2006-12-09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요.. 알라딘 마을, 이곳에서 자주 뵐수 있는거죠?..

축하드립니다.!! ^^*

깐따삐야 2006-12-10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와님, 감사합니다. 시간적 여유가 많아진다고 게을러지면 안될텐데, 마음을 다잡아야죠! 일도 열심히 하시면서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자주 올리시는, 부지런한 분들이 알라딘에 많이 계셔서 저에겐 이 곳이 자극이 될 것 같아요. ^^

비연 2006-12-10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넘 축하해요^^ 이제야 확인했네요^^

깐따삐야 2006-12-11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감사합니다. ^^
 

  완벽하고 철저한 척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세상에 완벽하고 철저한 인간이란 없다. 그 사람 참 완벽해, 그 사람 참 철저해, 그건 거짓말이다. 적어도 살아 숨쉬는 인간에게 있어 순도 백퍼센트의 퍼펙트함이란 없다고 믿는다. 타고난 성품이든, 교육받은 자질이든, 콤플렉스로 인해 무기처럼 지니게 된 성향이든, 완벽한 척 할 뿐이지 실제로 완벽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회란 그렇다. 완벽한 척 하는 사람이 실수를 저지르면 다같이 실망하고 함께 비난한다. 반면에 평소 할랑하게 굴던 사람이 한 번쯤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면 새로운 면을 봤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씁쓸하지만 이게 현실이고 나 역시 그러한 현실 속에 편입한 미약하고 간사한 존재일 뿐이다.  

  같은 학교에 K 선생님이란 분이 있다. 과학을 전공했고 나와는 동학년을 맡고 있고 출퇴근길에 카풀도 한다. 사십대 초중반 정도로 아마 우리 이모뻘 쯤 되겠다. 근처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나서 올해 우리 학교로 오게 되었다. 첫인상은 날카롭고 이지적이었다. 눈매가 차가웠고 호리호리한 몸집에 걸음걸이는 가뿐했다. 이따금 듣게 되는 웃음소리는 시원했고 노래방에서는 양수경의 '사랑은 창밖의 빗물같아요' 같은 촉촉한 노래를 즐겨 불렀다. 동학년 담임들 중 가장 어린데다 엉뚱한 언사로 사람들을 웃겨대는 내게 꾸준히 호기심을 보이셨고 옆 학급 담임으로서 비교적 잘 대해주셨다. 2학기에 들어와 우리집이 이사를 온 뒤로는 함께 카풀도 하게 됐다. 그런데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낼 때에는 몰랐던 단점들이 하나, 둘 눈에 띄기 시작하면서 서로간에 미묘하게 까슬거리는 면들이 많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

  K 선생님은 좋은 것이 있으면 남에게까지 권해주려는 타입이고 나는 아무리 좋은 것이 목전에 있어도 남에게 권해주기는 커녕 내가 싫으면 그만인 타입이다. K 선생님이 진공청소기까지 동원해서 사물함 밑, 신발장 밑까지 샅샅이 청소한다면 나는 먼지가 나면 창문을 활짝 열어야지, 정도로만 생각한다. K 선생님이 등교시간 8시 30분과 종례시간 3시 40분을 칼같이 지키는 담임이라면 나는 사람이 가끔 늦잠 좀 잘 수도 있지, 청소 일찍 마친 사람은 좀더 일찍 가야 옳지, 그렇듯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K 선생님에게는 모든 게 대수롭고 나에겐 모든 게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게 트러블의 원인인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면 이런 대화들.

" 교문 앞에 플랭카드 넘 지저분하게 붙였더라. 학교 입장에서 대외적으로 내보이는 거에 그렇게 무신경하면 안되잖아? "

" 플랭카드요? 그 정도면 괜찮던데. 그거 선생님 말고 아무도 신경 안써요. "

" 김** 선생님은 왜 그렇게 밥을 빨리 먹어? 미각이 좀 둔한가봐. "

" 학교 급식에 뭐 그렇게 오래오래 음미할 만한 요리가 있다고 밥을 오래 먹나요. "

" 그 반 애들이 이번에 성적이 많이 떨어졌더라. 딴 소리나 해대고 공부를 통 안해. "

" 원서 다 쓰고 발표까지 났으니 그렇기도 하지요. 시험공부 안하고 정석이랑 성문영어 공부하나..."

  대강 이런 식이다. 써놓고 보니 참 어린 것이 한 마디도 그냥 넘어가는 게 없구나 싶다. 그런데 나는 K 선생님의 지나가는 말로 하는 조언들이 그렇게 거북스러울 수가 없다. 함께 근무하는 보조 아가씨 이름과 나이를 잊어서 세 번이나 되묻고 있는 사람이 누구에게 무슨 조언을 하겠다는 말인가. 나란 사람은 의외로 그렇듯 사소한 면에서 사람을 가르고 판단한다.

  며칠 전에는 K 선생님이 내게 찾아와서 우리반 B의 이름을 대며 B 때문에 K 선생님 반 아이가 피해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이 맞다면 나는 B에게 빤히 속은 것이고 그 결과 K 선생님 반 아이에게까지 피해를 준 게 되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아이 모두를 불러놓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B는 그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다, B와 관련이 있지 않냐는 K 선생님의 추궁에 못 이겨 K 선생님 반 아이가 B의 이름을 팔아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나는 담임선생님께 솔직히 말씀드리라고 했고 그 아이는 B와 나에게 무척 미안해 하면서 돌아갔다. 그런데 뜻밖에 결과가 좋지 않았다. B는 누명을 벗었지만 그 아이는 날마다 불려가 훈계를 듣고 있고 일주일에 책 한 권씩을 읽고 독후감을 써내야 하는, 숙련된 알라디너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닌, 요즘 남자 아이들 입장에선 이보다 더 괴로울 게 없을 듯한 벌을 받고 있다. 용기를 내어 거짓말을 한 사실을 털어놓은 아이는 용서받을 기회를 얻을거라고 생각했고 K 선생님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선생님은 내게 전화로 사과를 전하고 난 후부터 아이를 닦달하기 시작하더니 아이가 거짓말을 했다는 그 자체에만 괘씸해 했다. 아이가 친구를 팔아가면서까지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냉정하게 상황을 몰고 간 스스로에 대해서는 왜 반성하지 않을까. 그렇듯 완벽하고 꼼꼼한 척 하시는 분이 간혹 아이들을 상대로 오기를 부리는 걸 보면 하품이 나온다. 아무튼 B를 위해서든, 그 아이를 위해서든, 그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자기 아이만 쏘옥 빼서 구해내고 남의 아이는 시궁창에 빠뜨려버린 사악한 엄마가 된 것 같아 영 찜찜하다.

  그런데 더 우스운 건 그 일 이후로 K 선생님이 아침, 저녁으로 이야기하는 대부분의 내용이 우리반 아이들의 불손하면서도 불건전한 언행들이란 것이었다. 나는 아이들과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고 내 눈에 비친 우리반 아이들은 다소 자유분방하긴 해도 크게 거슬리는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입시가 예년에 비해 일찍 끝나서 전체적으로 학습 분위기가 안 잡히고 부산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학년 전체가 그런 것이지 유독 우리반만 그런 것도 아니다. 특히 B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담임으로서 매우 거슬린다. B는 얼마 전 엄마가 돌아가셨고 아빠는 눈이 잘 안 보이신다. 부모님이 이혼을 하시긴 했어도 사랑은 많이 주셨다는 것을 B를 보면 알 수 있다. 다소 충동적일 때가 있고 외로움도 많이 타지만 염치와 의리를 알고 자존심도 강하다. 어쩌면 날때부터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사랑을 듬뿍 받아오다가 갑자기 그 줄이 끊어졌기에 더 심하게 허전함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B가 다른 평범한 아이들처럼 시간을 잘 지키고, 열심히 공부하고, 선생님께 공손하길 바란다면 무리가 아닐까. 꼬박꼬박 학교에 나오고 태권도장에 다니면서 스트레스 풀고 그래도 만만한 게 담임이라고 발랄하게 어리광이라도 부려주는 게 내 편에서는 참 다행이지 싶다. 물론 이렇듯 뭐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점 때문에 K 선생님과 부딪치는 거겠지만.

  오늘 퇴근길에 교무부장님으로부터 튀지 말라, 는 침착한 조언을 들었고 그 조언은 감사히 새겼다. 두발 문제로 시작된 학생부장 선생님과의 갈등에서부터 K 선생님과의 마찰까지 내게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흐름에 맞춰갈 필요도 있는 법이고, 사람 사이에 속내를 빤히 드러내봤자 감정의 골만 깊어진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있던 중이다. 하지만 내가 당신들의 자존심을 추켜세워주지 않고 고분고분하지 않는다고 해서 제대로 된 확인절차도 없이 뭔가를 덮어씌우려고 한다든지 나이 어린 초짜 교사의 뒷담화나 해대는 지저분한 일은 자제해주면 좋겠다. 학교의 주인은 목소리 크고 성질 있는 교사가 아니라 평범한 학생들일텐데 호응해주고 굽실대지 않으면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 것마냥 뿌르륵거리는 모습들이 보기에 영 불편하다. 모난 돌은 정 맞고 깨지면 그만이지만 혼자서 완벽하게 동그란 척 하는 돌은 정말이지 재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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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8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6-11-29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학교는 모든 집단들 중 가장 극심한 쓰레기통 모형이라니깐요. 으이구. 힘내자구요. ^^

Mephistopheles 2006-11-29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둥글게 둥굴게~ 짝!
둥글게 둥글게~ 짝!
아 전 왜이렇게 "꼰대"라는 단어가 자꾸 생각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깐따삐야 2006-11-29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결국에는 누워서 침 뱉는 격이지만 학교란 곳이 좀 답답한 건 사실이에요. 어느 집단이든 남/녀, 노/소가 조화롭게 공존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지요. 그래도 학교는 비교적 평등한 집단이라고는 하는데 워낙에 말로 벌어먹고 사는 직업군이라 그런지 사소한 일로도 늘상 말들이 많고, 의견이 분분하고, 그렇답니다. 저야 투정만 많았지 왠만하면 묻어가고 마는 초보교사지만요. ㅡㅡ;

마태우스 2006-12-02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로 다른 걸 존중하고 간섭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자기 가는 길로 가야 한다고 우기는 인간이 곁에 있음 겁나 피곤하죠. 깐따삐야님의 미모를 시기해서 그런 건 아닌지 하는 유치한 생각까지 들어요. 어여 다른 학교로 전근가기를.. 그리고, 튀는 게 뭔지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그 학교 인간들이 다들 숙지했음 좋겠구, 튀는 게 왜 나쁜지에 대해서도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줌 좋겠습니다.

깐따삐야 2006-12-02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공감해요. 정말. 사람이 자기 주제파악만 제대로 하고 살아도 주변이 이렇게 시끄럽진 않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친절한 금자씨의 "너나 잘하세요."란 말이 콕콕 와닿곤 합니다.
 



   주말에 시내의 한 식당에서 외사촌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열한살배기 깜찍발랄한 동생 옆에 있으니 늙고 초췌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반면에 서로 정신연령은 비슷한 편이어서 어줍은 어른과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신선하고도 유익할 때가 많다. 우리는 영화 '플러쉬'를 보고나서 싸가지 없이 밀치고 들어오는 꼬마에게 마구마구 눈을 흘겨준 다음, 리마리오 롤과 어린이세트를 시켜서 맛있게 먹었다. 나는 그녀가 옆에 있어 더욱 용감해졌고 그녀는 내가 있어 하루 종일 심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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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6-11-27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우십니다! 옆에 앉은 외사촌동생은 열한 살치고는 야무지게 보입니다. ^^

blowup 2006-11-27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 사진보다 갸름해지셨는데요. 헤~.

마태우스 2006-11-28 0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깐따삐야님 원래 알았지만, 미녀시네요!!!!!!!

마태우스 2006-11-28 0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모르게 추천을....^^

깐따삐야 2006-11-28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일레스님, 네. 야무진 것 맞아요. 엄마가 항상 쟤 반만 닮아라... 하시니까요.

namu님, 얼굴만 좀 그래요. ㅋ

마태우스님, 님도 최근 사진 올려주세요. ^^

Mephistopheles 2006-11-28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털썩...알라딘은 미남..미녀들만 서재를 꾸리는 곳인가...흑흑...
아무래도 전 신비주의로 밀고 가야 겠습니다......
(그런데 리마리오 롤은 뭐죠.?)

깐따삐야 2006-11-28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미녀는 무슨~ 그나저나 언제 얼굴 공개하실 거에욤?? 주니어를 보면 상당히 미남이실 것 같은데. (리마리오 롤은 아보카도와 새우튀김을 가운데에 넣고 슬라이스햄으로 돌돌 말아놓은 아삭바삭+고소느끼한 롤의 한 종류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