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7년 터울로 사춘기를 겪는 것 같다."
엄마가 하신 말씀이다. 찬찬히 되돌아보니 과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 싶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볼수록 엄마니까 과연 저런 통찰이 나오는구나 싶을만치 소름끼치는 지적이었다. 미운 일곱 살이라는 말처럼 일곱 살 무렵의 나는 항상 엄마가 곁에 있어야만 마음을 놓는, 엄마 탐이 심한 땡깡쟁이였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제 성에 안 차는 것이 있으면 손톱으로 동네 오빠들을 할퀴어놓고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서 또래 친구의 면상을 가격하기도 하는, '우리 아이 이만큼 달라졌어요' 같은 프로그램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그런 못되고 심란스런 꼬마였다고. 엄마는 사는 게 바빠서 그만큼 나에게 일관되고 따듯하게 신경을 써주지 못해 내가 그랬던 모양이라고 당신 탓을 하시지만 전혀 다른 성향으로 조용히 성장해 온 오빠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열네 살 적에는 대개 사춘기라 말하는 사춘기를 겪었다. 아침에 눈 뜨면 학교에 가기 싫었고 학교에 가면 수업 시간 내내 다른 생각만 하다가 돌아오곤 했다. 어떤 선생님은 걸걸한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어떤 선생님은 옷깃에서 묻어나는 담배 냄새가 싫었고, 어떤 선생님은 온몸에서 풍겨나는 열패감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친구들이 죄다 바보같았고 내가 사는 동네가 너무 비좁게 느껴졌다. 그리고는 종종 이러한 상념에 빠지는 스스로가 미워져서 아무 죄도 없는 부모님에게 신경질을 부려대곤 했다. 그 때는 인터넷도 없어서 책과의 소통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책 없이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책이 있어야만 행복한 사람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그 때는 하지 못했다. 책은 곧 일용할 양식이었고 오직 밥만 먹는 친구들을 경멸했다. 어쩌면 마음 속으로는 아무런 잡념도, 계산도 없이 터져나오는 그네들의 호쾌한 웃음소리를 부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친밀의 대상이기 보다는 동경의 대상이고 싶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오만함이 정신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그렇듯 예민하고 까탈스런 자식을 대함에 있어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적절히 파악할 줄 아셨던 엄마의 지혜로움이 일견 오만방자해 보이지만 사실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던 내면의 중심을 잡아주었던 것 같다.
대학생이 된 후 스물한 살이 되던 해는 삶에서 맞은 첫번째 권태기였다. 무조건 잠적하고 싶고 은둔하고 싶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성심성의껏, 그런 말들이 가장 무의미하게 들렸다. 몸무게가 급속도로 늘었다. 점심 때마다 고열량의 음식을 사먹었고 커피나 비스켓을 입에 달고 살았다. 누가 조금이라도 염려 섞인 말을 하면 네까짓게 내 우울의 정체를 알기나 하겠느냐는 냉소로 되받아치곤 했다. 부모님의 동의만을 구한 다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돌연 휴학을 했다. 당시에 가장 가깝게 지냈던 친구가 그 일로 조금 힘들어했다. 지금의 나라면 절대로 그런 이기적인 일은 저지르지 않을... 결국 저지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뭔가에 사로잡히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외곬수적인 성정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벙 뜨게 만드는 순간이 적잖이 있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휴학을 하고 나서 자전거도 타고, 여행도 가고, 책도 읽고, 사람도 사귀고, 여러가지 일을 했다. 나를 잘 아는 가족들은 언젠가는 내가 제 자리로 돌아오리라는 믿음으로 나를 기다리고 또 기다려주었다. 놀다, 방황하다, 쉬다 보낸 일 년이었다. 더는 그러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았을 때 갑자기 공부가 하고 싶어졌고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턱선이 갸름해졌고 눈빛은 깊어졌고 머리는 많이 자라 있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성심성의껏 살아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결국 원점이었지만 필름도 없이 이 세상에 딱 한 장 남아버린 사진처럼 아련하고도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제 내년이면 스물여덟이 된다. 마의 스물여덟. 어쩌면 내 인생의 세번째 사춘기이자 두번째 권태기의 조짐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주위 선생님들도 원래 3년 차에 권태기 비슷한 것을 겪었다고들 하신다. 그래서 대개 이 즈음해서 결혼을 하든가, 공부를 더 하든가, 학교를 옮기든가, 변화를 주려고 하는가 보다. 어른이 되어 겪는 사춘기는 확실히 전과는 다르다. 부모님에게 마냥 투정을 부리는 것이 미안해졌고 직장은 대학처럼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곳도 아니다. 밤새 이런저런 망상에 시달리다가도 아침이면 제 시간에 일어나 부지런히 씻고 밥을 몇 술이라도 뜨고 아이들 앞에서 기운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물론 꼭 그러지 않아도 되지만, 그러지 않으면 감정이 다시 제 리듬을 찾았을 때 미안해지고 부끄러워지고, 결국 더 힘들어지고 만다. 어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고입면접을 끝내고 집에 일찍 돌아간 오후, 2층 전체가 고요하고 쓸쓸했다. 그런데 그 느낌은 평화가 아니라 무료였다. 그 느낌에 나도 내 스스로가 놀랐다. 아이들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물론 아무것도 아닐 수야 없겠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그 동안 북적대고 재잘대는 아이들의 생기 속에 길들여져 있었구나 싶었다. 오늘 다시 그 악동들을 하루 종일 마주하려니 어제의 그 감상 젖은 생각이 싹 가셔 버려서 속으로 웃음이 나긴 했지만. 혼자 있다보면 같이 있고 싶고 같이 있다보면 혼자 있고 싶어지고 그런 게 사람인가 보다. 갈팡질팡, 이란 말은 어떻게 보면 참 정감 있고 예쁜 말이다.
겨울이 시작되었고 달력은 두 장 남았다. 올해도 거의 다 갔고 내년에 내게 어떤 변화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변화를 바라면서도 그 변화가 내 인생의 향방을 너무 빨리 결정지우는 대사건이 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래보기도 한다. 부디 천천히, 무리하지 않은 채 나의 이십대가 지나가기를. 그리고 앞으로 겪을 사춘기는 스스로의 몫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잘난척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주변 사람들에게 한 고비를 넘길 때마다 그만큼 마음의 빚을 졌다. 특히 가족들에게, 가까운 친구들에게. 내 우울의 정체를 아는 사람들은 책 속에 있었지만 내 우울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은 바로 내 곁에 있었다. 숨결과 체온을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내 손을 만져주고 따끈따끈한 밥을 지어주고 나를 기다려줬다. 어쩌면 내가 교사가 된 것은 그 빚을 갚으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매일매일 한 다발의 꽃 대신 한 다발의 사춘기 아이들과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기쁨도 슬픔도. 하지만 사춘기는 사절기처럼 반복된다. 그리고 그 때마다 성숙의 마디가 하나씩 늘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우울해질 것이지만 절망하진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