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글을 쓴다. 노트 한 귀퉁이에 하릴없이 끄적이는 것이었든, 이렇듯 알라딘에 와서 쓰는 것이었든 참으로 오랜만에 내 이야기를 쓴다.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니트를 입고 나섰는데 온종일 떨다 온 기분이다. 머리가 살짝 아프고 노곤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가을이다. 낮 동안 너무 더운 것 아니냐는 투정이 더 이상은 나오지 않는 진짜 가을.
아이들 고입 전형이 갑자기 앞당겨져 혼을 쏙 뺐고 나도 시험을 하나 치렀다.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러보니 아이들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래서 사람은 한 가지 위치에만 너무 오래 머물러 있어도 못 쓰나보다. 시험 기간 동안 너무 다그치지 말아야지, 시험 감독할 때는 좀더 여유 있는 표정을 지어줘야지, 만점은 언제나 힘든 것이라는 걸 이해해 줘야지, 등등의 생각을 했다. 지나친 솔직함, 너무 긴 진솔함은 변명의 카테고리 안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뚱맞은 생각도 했더랬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처럼 다시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간헐적인 나의 우울은 어디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언제나 반응은 극단적이다. 너무 많이 먹거나 너무 적게 먹거나, 너무 오래 자거나 너무 조금 자거나.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것을 짐작하면서도 결국 우울에 빠진다. 이것이 네가 즐기는 심리적 경향이므로 일부러 그런 상태에 빠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니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재차 던져봤지만 그렇게 잔인하게 널 대한다고 해서 안 우울해질듯 싶으냐는 냉소만 돌아왔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너 자신을 좀더 소중히 하라는 충고를 들었다. 예견할 수 있는 충고이면서도 귀를 통해 들어오는 순간엔 어쩔 수 없이 자존감을 찡하게 자극하는 말이다. 고작해야 스스로를 막 대하는 사람으로 비쳤다니. 내 우울은 형이상학적인 우울이니 고상하고 네 우울은 형이하학적인 우울이니 저급하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제는 그 사람은 내가 아니고, 내가 그 사람이 아니라는 그 이유가 도리어 오해의 벽 보다는 이해의 문으로 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난 너와 다르기 때문에 널 이해해. 써놓고 입으로 말해보니 아리송하지만, 느껴진다. 그 곡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