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처럼 귀여운 영화를 보려던 참이었다. 휴 그랜트와 드루 베리모어라니, 이보다 더 사랑스럽기도 어려운 조합이다. 알렉스(휴 그랜트 분)는 끊임없이 엉치뼈를 흔들어대고 소피(드루 베리모어 분)는 토실토실 앙증맞은 표정으로 가슴에 녹아든다. 영화는 모자람도 넘침도 없다. 다정한 사람끼리 나란히 앉아 음악에 맞춰 고개를 까닥이고, 같은 씬에서 동시에 웃을 수 있게끔 배려한, 베스트셀러의 요목을 제대로 숙지한 로맨틱 코메디였다. 영화를 보기 전에 곱창을 먹은 것은 잘한 일이었지만 약간 시장기가 있는 상태에서 영화를 본 다음, 딸기와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창밖의 봄비를 구경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80년대, 최고 전성기를 누리던 인기 듀오 '팝'의 멤버였던 알렉스는 이제는 주부들 사이에서나 기억되고 있는 한물 간 가수다. 각종 시시한 행사에 불려다니며 힘겹게 엉치뼈를 흔들어대곤 하지만 모든 것이 예전같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최고 인기 가수인 코라 콜만이 알렉스에게 듀엣을 제의해 온다. 하지만 알렉스에겐 주어진 짧은 기간 동안 직접 노래를 만들어야 한다는 임무가 맡겨지고 한창 고심을 하던 중, 화초에 물을 주러 왔던 소피에게서 놀라운 작사 능력을 발견한다. 알렉스의 말을 그대로 빌려오자면 노랫말을 떠올리는 소피는 그야말로 입만 열면 옥구슬. 사실 그녀는 작가 지망생이었지만 억울하게 모함을 당한 후로 꿈을 포기했었다. 알렉스와 소피는 낮밤을 함께 하며 'Way back into Love'라는 노래를 작사, 작곡하고 코라는 이 노래를 아주 마음에 들어한다. 하지만 자기 식으로 노래를 바꾸어 부르려 하는 코라를 소피는 인정하려 하지 않고, 이 과정에서 알렉스와 심하게 틀어지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예전에 김광한 씨가 진행하던 쇼비디오자키, 인가 하는 프로그램에서 Wham의 Last Christmas의 뮤직비디오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 때 나는 아마 초등학생이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시디나 MP파일이 흔하지 않을 때라서 당시에 내가 팝송을 접할 수 있는 매체는 심야 라디오 방송과 오빠가 듣던 오래된 테입들, 그리고 쇼비디오자키 정도였는데 Wham의 저 뮤직비디오를 보고 난 후로 곧바로 팬이 되었다. 과거에 뉴키즈온더블럭이 내한 공연을 하러 우리나라에 왔을 때 소녀들이 실신하여 실려가고, 한바탕 나라 안이 떠들썩했을 때도 있었지만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고 그저 웸의 노래가 나오면 야, 정도의 환호성과 함께 반가워하고 좋아했다. 그 무렵, 내가 녹음해서 선물했던 테입에는 상대의 취향이나 시기와 계절을 막론하고 언제나 웸의 래스트 크리스마스가 있었다. 영화 속 알렉스와 그룹 팝은 나로 하여금 창창하던 시절의 조지 마이클을 떠올리게 했다. 그 촌스러운 멜로디와 민망한 엉치뼈 댄스를 보며 어깨가 들썩이고 구두굽이 간지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아, 팝의 고전이란 역시! 혼자 감탄하기까지 했다.

  주름이 짜글짜글한 휴 그랜트도 늙긴 늙었더라마는 다행히 귀엽게 늙어가는 듯 했다. 그가 숀 코네리나 마이클 더글라스 만큼 늙으면 과연 어떤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여전히 궁금하지만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화초에 물 주러 온 귀여운 할머니를 홀려서 알콩달콩 재미나게 지낼 것 같긴 하다. 할머니였든, 아줌마였든, 아가씨였든 나이를 불문하고 여자라면 그를 내치지 못한다. 여자들은 누구나 그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사랑에 빠질 수밖에. 행운의 사나이, 부실한 엉치뼈마저도 사랑스러운. 드루 베리모어는 '웨딩싱어'에서 만큼 젊고 싱그럽진 않지만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로맨틱 코메디 여주인공의 전형을 보여주기에는 무리가 없다. 마르고 닳도록 빼고 또 뺀다는 요즘 헐리웃 풍조에 비하면 여전히 살짝 통통하다 싶은 체구이지만, I need inspiration~ Not just another negotiation~ 하는 그녀의 노랫말과 스키니함은 영 어울리지 않는다. 정곡을 찌르는 위트 넘치는 대사와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두 배우, 귀에 익은 듯한 아름다운 노래들이 즐거운 하모니를 이루며 사랑을 찾아가는 길(Way back into love)에 대해 이야기하는, 군더더기 없이 다정다감한 영화였다.

  알렉스와 소피는 서로를 위해 잃었던 꿈을 찾아준다. 과거의 영광에 매여있던 알렉스, 과거의 미련에 의지했던 소피. 그들은 과거로부터 벗어나 이제 함께 시작하자고 노래한다. 내가 언제나 나다워도 편안한 것, 싸우지 않고 우아하게 비껴가느니 서로 치고받고 하더라도 함께 갈 수 있음을 깨닫는 것. 사랑을 찾아가는 길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로맨틱 코메디가 사시사철 끊임없이 주입하곤 있지만 사실 별 효력은 없는, 사랑을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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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07-03-05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맞아!
예전엔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골라 테잎 선물도 굉장히 많이 했는데..
그게 어느덧 시디로 바뀌더니, 요즘엔 아예 시도도 안하고 있네요..^^;;


이번주 하루 시간내서 꼭 보러가야겠어요! 이 영화~

바람의 심술이 굉장한 오늘입니다.!
날려가지 않게 조심조심하셔요~

깐따삐야 2007-03-05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와님, 이 영화 추천합니다. 기분이 좋아지실 거에요.
 

  신입생들은 어쩜 그리 표가 날까. 거리에 쏟아져나온 아이들 중에서 신입생을 골라내라면 어렵지 않게 솎아낼 수 있겠어. 갓 빨아놓은 빨래라 해도 새 옷과는 엄연히 다른 것처럼.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나를 보며 저 여자는 신입생이구나, 짐작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얼굴이 붉어지는군. 비록 어두운 색이었지만 사람들은 내 구두가 새 것이라는 걸 보았을거야. 비도 왔는데 낡은 것을 신고 갈 걸 그랬어.

  갑자기 주어진 여유가 아직은 낯설어. 오래 전, 당신에게 비슷한 말을 했던 기억이 나. 당신이 해주었던 실용적인 조언들도. 다시 그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어.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누군가 도움말을 주지 않아도 스스로 토닥일 줄도 알게 되었다는 거. 불안한 거야 있지. 나는 소심증 환자라서 불안하지 않으면 더 불안해지곤 하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 불안의 정체마저도 알고 있다는 거. 당신이 재미없는 표정으로 상상했던 것처럼 나는 조금 어른이 되어버렸어.

  나에 대해 아쉬워했지만 나는 결국 교사가 되었어. 당신의 과대평가가 좋았지만 내 그릇의 크기는 내가 잘 아니까.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여러모로 부적격했어. 아마 공부를 핑계로 잠시 숨어있고 싶었는지도 몰라. 그런데 있지. 오늘 근처 중학교 운동장에서 입학식이 있었는데 까만 교복 속에서 꼬물거리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외경심 비슷한 감정이 생기더라. 간사함이 물씬 배어있는 그 불건전한 마음을 오래오래 혐오하긴 했지만. 아직은 아이들이 그립거나 하진 않아.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오직 나로서의 내가 그리웠을 뿐야.

  당신을 생각할 때도 있었어. 지금도 어쩌다 간혹. 미안하지만, 몹시 한가할 때만 그런 것 같긴 해. 놓친 풍선이 높이높이 떠오르다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고 생각해봐. 그립고 자시고 할 게 있는가. 꼼꼼한 당신은 놓친 게 아니라 놓았다고 정정하겠지. 하지만 의외로 둔감한 당신은 내가 팡,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걸 알아야만 해. 어디엔가 있다, 고 생각했고 그러는 편이 나았어. 그리움은 부재의 인정이니까.

  요즘 내가 기다리는 건 513번 버스와 세탁을 맡긴 옷, 알라딘에 주문한 책과 올리브유로 튀겼다는 치킨 정도. 오늘처럼 달이 뜨면 소원을 세 가지씩이나 빌고, 다시 싹싹 빌고나서 얼른 소원을 바꾸어 말하기도 했는데 그 연례행사를 사촌동생에게나 시켰어. 예전에 내가 소망하던 일들을 모두 이룬 것도 아닌데 무엇을 기다렸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 버스는 약간의 오차가 있을지언정 반드시 오고 내가 이용하는 세탁소는 저렴하면서도 정확해. 알라딘도 예전에 주문하지도 않은 초등학생용 문제집이 한 번 끼어 온 것 말고는 착오가 없었고, 치킨체인점은 서로 과다경쟁 속이라 늘상 신속배달이야. 나는 어느새 확연히 눈에 보이는 것만을 기다리게 되었나봐. 

  당신이 한 약속들을 잊는 사이, 나는 나 자신과의 약속들을 지키며 살아왔어. 항상 몇 퍼센트 쯤은 아쉽곤 했지만 그건 나의 결함이 아니라 인간적 결함일테니까. 누군가를 좋아한 적도 있어. 그러는 중에 당신이 해주었던 말을 반복하기도 하고 반박하기도 했지. 정답은 없었어. 가끔 절대치인 것처럼 말하던 당신을 떠올리며 코웃음을 치기도 했어. 긍정의 말을 얻기 위해 소년을 연기하던 능청스러움에 경악하기도 했고. 지금이라면 웃어제낄 타이밍에 묵묵히 슬퍼하고 있었다니. 나 자신이 안쓰럽다 못해 귀여웠지. 하지만 사랑이란 게 결국은 상대와 열라 놀아주는 일, 아니겠어.

  길에서 당신을 닮은 사람을 본 게 아니라 사실은 나를 닮은 사람을 보았어. 스무 살 무렵의 나. 그렇게 떠오른 게 당신이야. 그 아이는 하나도 예쁘지 않았어. 스무 살이란 나이만으로도 날아갈 듯 고와야 할텐데 말이지. 당신이 나를 예쁘다고 한 건 나를 홀리기 위해서였나봐. 정말로 중요한 건 마음으로 보아야 하는 거라는 둥의 말은 하지 말도록. 나 너무 많이 크지 않았어?

  좁힐 수 없는 거리 때문에 힘들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도 들어. 감정의 훼손 없이 기억 속에서 당신을 다시 불러낼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겠지. 당신은 좋은 인생 선배였고 선생님이었어. 비록 나의 신선한 아이디어들을 착취하고 고맙단 말을 남발한 사실을 보건데, 어쩌면 그 덕에 출세까지 했는지 모른다는 의심이 가시지는 않지만. 시작할 때부터 원래 염두해 두었던 분야가 있었는데 연이 닿을 지는 모르겠어. 사심없이 학업에 정진할 수 있도록 빌어줘. 컨셉은 정했어. 조용한 커피 같은 사람. 웃지 마.

  지금이라면 우리는 정말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겠지. 그래도 시간을 되돌린다면, 나는 당신을 만나지 않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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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3-04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ly me to the moon And let me play among the stars~~♬

깐따삐야 2007-03-04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들어도 들어도 물리지 않는, 좋은 노래죠.^^

부리 2007-03-05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며 살았다고 할 수 있는 분, 멋지시네요.

깐따삐야 2007-03-06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님, 저는 약속을 그닥 많이 하는 타입이 아니라서... 쿨럭~
 



   내가 어서 스무 살이 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대학에 가면 수학을 안 배워도 되기 때문이었다. 소심한 탓에 늘상 수학책을 붙들고는 있었지만 내게 있어 수학책이란 그저 하나의 물체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교과목에 비해 확연히 처지는 점수 때문에 늘 고민스러웠고 주변 사람들 대다수가 나의 수학 성적에 대해 함께 염려해 주기도 했다. 아예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른 과목에 더 몰두하는 건 어떨까, 진지하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게 말처럼 포기가 안 된다는 것이 또 문제였다. 오로지 욕심 때문이었다.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그럭저럭 잘 나와주던 다른 교과목에 더 집중해봤자 그다지 전체적인 점수 상승이 있을리 없으니, 역시나 부족한 수학에 좀더 매진해야 한다는 결론이 떨어졌다. 결국 나는 굉장히 열심히 수학 공부를 하는 것 같긴 한데, 모의고사만 보면 늘상 반타작 언저리를 웃도는 참으로 안쓰럽기 그지없는 학생이었다. 종종 수학 선생님들을 까닭도 없이 미워하고 수학 교과서 귀퉁이에 상스런 욕을 써놓았던 것은 모두 수학에 대한 원한 때문이었다. 영어가 효자였다면 수학은 발목 잡는 귀신 같았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라니. 사랑할 게 그렇게도 없었더냐, 싶었지만 너무나도 따듯하고 서정적인 영화라서 보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십 년 전에 이 영화가 나왔더라면 내 인생이 조금 바뀌었을까. 수리에 약한 천성이야 쉽게 변할 리 없으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수학 교과서 귀퉁이에 끄적였던 욕 만큼은 슬쩍 지웠을지도 모르겠다. 왜 그 때 그 시절 수학 선생님들은 첫 시간마다 수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다, 라며 잘난 척만 하셨을까. 루트 선생님처럼 수학과의 엄청난 인연을 풀어놓진 못하더라도 오일러의 공식 정도만 차분차분 읊어주셨다면 3.14 원주율과 허수 i와 네피어 수, e가 無로 합일되는 아름다운 조화 속에서 수학의 신비한 매력을 발견했을 수도 있었을텐데. 서툰 목수가 연장 탓하고 공부 못하는 학생이 선생 욕한다지만,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한 루트 선생님의 수업은 내 일생 가장 재미있는 수학 수업이었다.

  사고로 인해 1시간 20분의 기억력 밖에 갖지 못한 박사(테아로 아키라 분)는 그러한 특수한 상황과 독특한 성품 때문에 무려 9명의 가정부를 갈아치운 상태다. 새 가정부로 일하게 된 싱글맘, 쿄코(후카츠 에리 분)는 박사의 사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아까 말했던 거잖아요, 라는 말을 금칙어로 정한다. 쿄코의 신발사이즈를 묻는 것으로부터 반복되는 일상은 우애수, 완전수 등 다양한 수의 성질을 발견하고 깨달아 가는 흥미로운 수학 수업과도 같다. 엄마 없이 저녁 시간을 보내야 하는 쿄코의 아들을 걱정한 박사는 쿄코의 아들이 방과 후에 자신의 집에 오게 하도록 하고, 아이에게 모든 수를 감싸 안아주는 '루트'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박사와 루트는 야구와 숫자를 매개로 친밀한 우정을 나누게 되지만 한때 박사가 앓아 눕는 사건을 계기로 세 사람은 헤어질 위기에 놓이기도 한다. 그러나 정교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수식처럼 맺어진 인연은 이후로도 따스하게 지속되고 루트는 수학 교사가 되어 수업 첫 시간,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소개한다.


박사가 사랑한 오일러의 공식 : 모순되는 것들이 통일이 되면 zero가 된다.

  박사에게 루트는 매일 새롭게 만나는 아이다. 박사는 납작한 루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현명한 마음이 가득 차 있을 것 같군, 이라고 말한다. 아마 날마다 이런 말을 듣고 자라는 아이는 저절로 현명해지지 않고는 못 배길런지도 모르겠다. 루트가 머리를 다친 날, 쿄코는 야구 코치에게 왜 아이를 박사님한테 맡겼냐고 화를 내고 박사의 우울한 표정을 눈치챈 루트는, 엄마가 씌워주려는 모자를 내팽개친다. 어느새 현명한 마음으로 가득 찬 아이는 엄마가 하는 말이 옳지 않음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현명한 마음이란, 의리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쿄코는 그녀가 항상 신고 다니는 하얀 운동화처럼 깨끗하고 상큼하다. 오물조물 바지런히 음식을 만들고 향긋한 냉이를 코끝에 갖다대며 활짝 웃음 짓는 그녀는 천성이 고운 여자, 의 모습을 발랄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박사처럼 수리에 능하지는 못하지만 순수한 직감 만큼은 더 뛰어날지도 모른다. 본능적으로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아채고 그것을 시의적절하게 배려할 줄 안다. 루트에게 박사님한테는 절대로 전에 말했던 거잖아요, 라는 말을 해선 안된다고 이르는 쿄코는 착하고 사려깊다. 어쩌면 그동안의 가정부들은 그거 아까 말했던 거잖아요, 라고 신경질을 부리다 스스로 좌절했는지도 모를 일. 매일 매일 현관에서 신발 사이즈를 묻고 답하며 시작되는 똑같은 일상에 대해 그녀는 한 번도 인상을 찌푸리거나 하지 않는다. 쿄코는 이상적인 여자다.

  박사에게 그냥 지나쳐도 좋을 숫자란 없다. 그는 쿄코의 신발 사이즈에서, 그녀의 생일날짜에서, 야구선수의 등번호에서, 루트의 열한번째 생일에서, 자신이 차고 있는 손목시계의 넘버에서, 갖가지 의미들을 찾아내고 새로운 의미들을 부여하기도 한다. 수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이해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그는 수학과 사랑에 빠진 천재였다. 1시간 20분의 기억력밖에 갖지 못한 건 신이 그에게 내려준 소박한 축복인지도. 일상의 자잘한 내용물들을 모두 기억하고 그것들에 반응하며 살아간다면, 그가 수와 대화하고 사랑을 나누는 기쁨이 다소 줄어들었을지도 모르니까.

  특별한 소재를 다룬 특별한 영화였다. 멀어진 지금, 이제는 좋고 싫고 할 것도 없지만 수학에 대한 나의 오랜 반감을 반감시켜주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영화의 힘은 막강하다. 루트의 든든한 포용력과 소수의 유일무이한 아름다움에 대해 미리 좀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내내 가시질 않았다. 수학을 싫어하거나 기피하는 아이들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박사의 말처럼 밤하늘의 별의 아름다움이나 들판에 피어난 꽃과 같이,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아는 직감과 감성보다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한 가지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수식의 아름다움을 어찌 지나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내가 수와 친해지지 못했던 것은 천성이 아니라, 잘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기인한 두려움 때문이었는지도. 쿄코와 루트처럼 사심 없이 다가섰다면 나는 수학과 우애와 의리를 돈독히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블레이크의 시로 끝을 맺는다. 

  한 알의 모래 속에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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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07-03-02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맙소사! 영화도 있군요!!
전, 책으로 읽었어요.
마음이.. 가슴이 .. 어찌나 따뜻해지던지..
감동의 바다에 풍덩 빠져버린 느낌이였어요!!

이 책을 읽고, 버스번호도 예사롭지 않았다는...^^


깐따삐야 2007-03-02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와님, 아.. 책도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엊그제 마지막으로 학교에 갔다. 부장 선생님이 김치찜을 준비해 오신다길래 나도 계란말이와 더덕구이 같은 밑반찬을 좀 해가지고 가서 출근하신 선생님들과 나눠 먹었다. 보조 아가씨는 밥을 해오랬더니 아예 압력밥솥을 들고 와서 한바탕 소풍 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금방 해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밥이라 맛있기도 했고 선생님, 따듯한 밥을 드셔야지요...하는 말에 마음까지 훈훈해졌다. 그 마음씀이 고마워서 모처럼 과식을 했다. 식구처럼 지내던 사람들과 이제 헤어져야 하지만 교직이라는 것은 사람들끼리 돌고 돌게 마련인지라 이별이 아주 슬프거나 하지는 않다.

  2월, 6월, 11월은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시기다. 완전 비호감까지는 아니지만 이 시기가 엄습해 오면 나는 간혹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모하곤 한다. 2월은 강박의 달이다. 뭔가를 정리해야 할 것 같은 한 편, 뭔가를 준비해야 할 것 같은 강박에서 쉽사리 벗어나질 못한다. 6월은 짜증의 달이다. 더위가 스멀스멀 밀려오면서 금방이라도 발화를 할 듯한 짙푸른 녹음과 여름 초엽의 알싸한 향기가 곧 나를 질식시킬 것만 같다. 11월은 불안의 달이다. 거리는 연갈색과 무채색으로 뒤덮이고, 그 스산함은 함부로 내 옷깃을 파고들며 심신을 춥춥하게 만든다. 아무에게나 손을 내밀고 어깨를 빌려달라 하게 될까봐 모든 문을 꼭꼭 걸어잠근 채, 건샌로지스의 November rain이나 들으며 온종일 나를 감금시킨다. 내곁에 누가 있느냐, 있지 않느냐, 하는 물리적 상황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나는 늘상 저런 모양새로 지겨운 계절을 버티었다.

  요즘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를 읽고 있다. 다른 책을 훑어보러 갔다가 충동구매를 했다. 유명한 책이니 만큼 익히 들어온 제목이었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언젠간 읽게 되리라 막연히 생각했지만 저런 식으로 무턱대고 사들일 줄은 몰랐다. 이게 다 지금이 2월이기 때문이다. 3월 1일에만 갔어도 훨씬 계획성 있는 구매를 했을텐데. 책의 내용마저 부실했다면 2월과 완전 등질 뻔 했지만 다행히 큼큼거리는 호기심을 갖고 즐겁게 읽고 있다. 콜린 윌슨은 이 책을 스물넷에 써서 하룻밤 사이 유명해졌다는데 그 나이답잖은 방대한 독서량과 지식 수준에 한 번 놀라고, 그 모든 사상과 인물들을 아웃사이더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통합해내는 통찰력에 두 번 놀라고 있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적확한 단어가 과연 이것 뿐이랴, 하고 의구심을 자아내는 아리송한 번역인데 역자는 소심하거나 혹은 친절하게도, 어려운 부분은 한 번 더 읽어보면 명확해질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노파심에 풋, 하고 웃음이 나면서도 이해되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정규교육 제대로 받은 작가들의 체계적인 글에 비하면 이처럼 한 구절, 한 구절이 쓴 사람만 알거나, 혹은 쓰면서도 설명하긴 어렵지만... 이라고 머리를 긁적였을 법한, 번뜩이는 아포리즘 천지인 글을 번역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매끈한 독서가 되고 있진 못하지만 이 책의 가치를 못 알아볼 만큼은 아니다.

  아웃사이더, 라기에 생각났는데 극과 극은 통한다고, 너무 강한 부정은 곧 긍정이랬나. 내가 아는 아웃사이더들은 대개 평범한 생활인이 되었다. 아니면 그들은 애초에 아웃사이더가 아니었는지도 모르지. 대학 동기 J는 오로지 드럼을 배우고 싶어 교회에 다닌 케이스였다. 강의 빼먹고 드럼을 치러 가는 일이야 다반사였고 칸막이가 있는 어학실 구석 자리에 앉아서 양손에 볼펜을 들고 투닥거리는 풍경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다들 외국어나 컴퓨터 과목을 교양으로 선택할 때 그와 나는 수강생이 채 열 명도 안되는 철학 강의를 들으러 인문대로 건너가곤 했는데 '이지 라이더'라는 영화를 보던 어느 날엔,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여자친구를 강의실로 데려와 우리를 경악시킨 적도 있었다. 강의가 슬슬 지겨워지는 오후에는 언제나 그렇듯, 자아도취에 빠진 교수님에게 J가 빨리 딴지를 걸어서 이 지루한 수업 시간을 흥미진진하게 이끌어 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우리는 그를 군대에 보내면서도 다들 불안해 했지만 J는 능글맞고 얄짤없는 군바리가 되어 군생활을 너무나 잘 즐겨주는 바람에 다들 약간씩 실망했다. 졸업을 한 후로는 그를 잊고 지냈는데 얼마전 K가 텝스시험장에서 그를 봤다며 소식을 전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고 열심히 시험을 준비 중이라고. 시험장에 양복을 입고 온 그는 삼십대처럼 보였단다. 왠지 배신당한 듯한 기분이 잠시 스쳤지만 그의 궤도가 현실로 돌아왔음에 안도했다.

  동아리 선배 M은 순수한 괴짜였다. 겉과 속이 자로 잰 듯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된 H와 그 선배가 싸우던 장면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다른 선배와 이야기를 하느라 신경 쓰지 않던 사이, 소주병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선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몇 마디 거친 욕이 들렸고 H는 발악발악 대들며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다. 옹 대접을 받았던 몇몇 나이 많은 선배들이 서둘러 싸움을 말렸고 아쉽게도 나는 기숙사 점오시간 때문에 마무리 씬을 못 보고 돌아와야 했다. 물론 그 후에도 그들은 아주 잘 지냈다. 아니, 외관상으로만 보기엔 전보다 더 잘 지냈다. 아무튼 M 선배는 그처럼 못 말리는 다혈질이었다. 직선적으로 말했고 노골적으로 행동했다. 낄낄거리며 담배를 피워 물 때는 영락없는 폐인인데 그가 쓴 글은 아름답고 솔직했다. 선배는 졸업 후 고향의 군청 공무원이 되었고 얼마 전 결혼을 했다. 신혼인데 매일 야근이라며 툴툴거리더니 자기 동생을 소개시켜주겠다며 한 번 생각해 보란다. 손사래를 치며 선배 같은 시아주버니는 사양하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감정의 촉수가 옛날 같지는 않지만 뭔가를 받아들이거나 해석하는 이해력 만큼은 옛날보다 나아졌는지 모른다. 더 이상 신선하지도 않지만 더 이상 막무가내도 아니다. 2월이 그냥 싫어, 라고 말해버리면 모든 것이 암막으로 가리워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내가 왜 2월을 싫어하냐면, 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나 자신에게 자연스럽게 생각할 시간을 주게 된다. 변명을 위한 망설임이 아니다. 내치지 않고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계절이든. 2월 때문이다, 라고 하기에 사실 나는 내 강박과 짜증과 불안의 원천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달력을 한 장 찢거나 넘겼고 오늘 하늘은 그야말로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다. 들쭉날쭉한 감정의 파고와는 상관 없이 2월은 소리소문 없이 가고 있고 수선을 맡긴 봄옷들을 찾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겨울을 나면서 3kg이 빠졌다. 올 겨울 나기가 유난히 힘들었다고 고백해야 할까. 하지만 내일부터는 다시 내 궤도를 찾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웃사이더가 예술가일 수는 있지만, 예술가가 반드시 아웃사이더인 것은 아니다, 라는 콜린 윌슨의 말은 옳다. 정기적으로 영어시험장을 찾는 양복 차림의 삼십대. 그들도 한 때는 아웃사이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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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다예요 2007-02-28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3월이 코앞이에요. 여행을 좀 다녀왔는데 갔다 오니 그 뿐, 또 그 자리네요. 오히려 여행이 헛헛해질 만큼. 저는 3월이면 뭔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요. 그래서 지금은 하지 않으면서도 3월에 해야할 일을 2월에 미리 차곡차곡 정리하기도 해요. 3월 1일이 되면 짠, 하고 일을 시작할 것 처럼요.

깐따삐야 2007-02-28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다예요님, 달력의 숫자들에 연연하지 않을 만큼 열심히 사는 방법은 없을까요? 열심히 살다보면 달력의 숫자들에 연연하지 않게 되는 걸까요? 계획하고 구상했던대로 짠, 하고 시작해서 짠, 하고 마무리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2007-02-28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7-02-28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하핫, 그쵸. 한 가족이 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니 말예요.^^

마늘빵 2007-02-28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기억에서 제 동기와 선배와 제 모습들을 찾게 되는군요.

BRINY 2007-02-28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시는군요! 지난 가을 모 경시대회때 학생 데리고 찾았던 교원대 모습이 새롭습니다.

깐따삐야 2007-03-01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음.. 님도 분명 괴짜 기질이 있으세요. 좀더 어릴 때는 더하셨죠? ^^

BRINY님, 그동안 오랫동안 공부를 놔서, 학생 노릇을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님도 힘차게 새학기 출발하시길!
 



  아름다운 비욘세 말고도 볼 것이 많은 영화였다. '사운드 오브 뮤직' 정도에 견줄 만한 스케일은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갖출 것을 제대로 갖췄다 싶을 만큼 웰메이드 뮤지컬 영화였다. 무엇보다 두 시간 남짓의 러닝타임 동안 절절하고도 감미로운 흑인 음악을 실컷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평소에 리듬 앤 블루스나 재즈 등의 음악을 즐겨 듣는 편은 아니었지만 내 취향과는 별도로, 음악과 체육 분야에서 두드러지는 검은 피부의 활약상은 역시나 놀라운 것이다. 대개 그냥 말할 수 있는 것도 노래로 말하면 쿡, 하고 웃음이 삐져 나올 때가 있는데 드림걸즈의 주인공들이 대사를 노래로 대신할 때, 관객들은 아무도 웃지 않았다. 나는 사실 영화를 보는 동안 누가 웃으면 어떡하나, 속으로 쓸데없는 걱정까지 했더랬다. 상대방이 무슨 일인가로 흥분하거나 실망해서 진지한 대사를 읊고 있는데 그 면전에다 대고 워우워우워, 한다는 건 자칫하다간 비극적인 상황도 희극적으로 보이게 만들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짓을 벌이다가 본의 아니게 망신당한 적도 있고. 하지만 드림걸즈의 출연진들은 죄다 사람이 노래인지, 노래가 사람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심신 전체가 하나의 거대하고 매력적인 소리통이 되어 가슴을 파고들고 머리를 관통했다. 감정의 오버라고 해도 좋다. 나는 그녀들의 노래를 듣던 도중에 잠깐 울 뻔 했다.

  그들만의 음반을 내기 위해 뭉친 트리오, 디나(비욘세 놀즈 분), 에피(제니퍼 허드슨 분), 로렐(에니카 노니 로즈 분)은 어느 오디션 현장에서 쇼 비즈니스계의 매니저 커티스(제이미 폭스 분)로부터 가수 제임스 얼리(에디 머피 분)의 코러스로 활동해 줄 것을 제안받는다. 처음엔 다른 가수의 코러스나 하고 있는 건 말도 안 된다는 에피의 반대로 무산될 조짐이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세 사람은 믿고 따라온다면 머잖아 음반을 내주겠다는 커티스의 약속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후 그녀들은 제임스 얼리의 공연을 따라다니며 쇼 무대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쌓게 되고, 커티스는 리드보컬 자리를 에피에서 디나로 바꿈으로서 드림걸즈의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려 한다. 음악적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에피는 크게 반발하게 되고, 연인이었던 커티스의 애정마저 디나에게로 쏠리자 팀을 탈퇴하고 만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점점 더 화려한 상품으로 변모되어 가던 디나는 매니저인 커티스와 결혼함으로서 음악을 위한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즈니스성 댄스 가수로 색깔을 굳혀가게 된다. 성공에 눈이 먼 커티스는 재기를 위해 준비했던 에피의 노래마저 가로채기하고 이에 반발한 에피와, 점점 자신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에 환멸을 느끼던 디나는 서로 화해의 계기를 맞게 된다. 조종당하는 인형이 아니라 당당하게 자신의 색깔을 찾기로 결정한 그녀들은 드림걸즈의 마지막 공연에서 화려하게 재회한다.

  머라이어 캐리를 무척 좋아하던 아이가 전에 '글리터'란 영화 시디를 주었고, 가수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가 대개 그렇듯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정말로 몹시 실망하며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무대에서의 카리스마는 간데온데없이 영화 속의 그녀는 딱 김빠진 사이다 같았다. 김빠진 사이다는 밍밍하긴 해도 미약하게나마 단맛이라도 남으니, 그 흔한 비유조차 아까울 지경이었다. 한 가지 발견이라면, 그녀의 상대역이었던 '맥스 비슬리'라는 배우였는데 머라이어 캐리의 아둔한 연기력 때문에 멋진 남자배우 하나 애먹였다, 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가수로서의 그녀는 많은 이들이 인정하듯 한 시절을 풍미했던 휘트니 휴스턴, 타고난 음폭으로 자유자재로 노래를 부르는 셀린 디옹과 더불어 팝계의 3대 디바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가수로서 무대를 꽉 채우던 그녀는 영화 속 어느 장면에서도 나는 머라이어 캐리다, 라고 말하지 못했다. 드림걸즈에는 비욘세가 나온다길래 나는 사실 비슷한 지레짐작을 했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고싶었던 건 에디 머피를 보면서 실컷 웃고 싶었고,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에 구미가 당겼고, 스토리와 메시지가 있는 영화보다는 그런 건 다소 뻔해도 좋으니 편히 앉아서 화려한 쇼와 흥겨운 노래를 감상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쉽게 가자, 였다. 대충 예고편과 홍보기사만 훑어도 감이 왔다. 드림걸즈가 지닌 상업성과 음악성, 그 점에 이끌렸다.

  변덕스런 흥 이면에 감춰진 무기력한 절망을 연기했던 에디 머피나, 온몸을 울리는 듯한 파워풀하고 개성 넘치는 가창력을 선보였던 제니퍼 허드슨,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자연과 본성 그대로의 검은 피부인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고혹적인 이집트 여인처럼 아름다운 용모를 갖춘 비욘세와, 궁리가 많은 눈빛을 한 채 영리하고 계산적인 매니저 역할을 선보인 제이미 폭스는 오히려 제조된 케릭터처럼 평범했다. 고의적인 구도이자 설정일테지만, 나는 에디 머피나 제니퍼 허드슨을 보기 위해 영화관에 온 것 같았다. 비욘세는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예쁘고, 영화의 흐름이 진행될수록 입이 쩍 벌어질 만큼 점점 더 아름다워진다. 연기도 글리터의 머라이어 캐리에 비하면 훨씬 더 진정성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56%에 머물러 있다. 아마도 가장 많이 팔리는 맛. 그래도 길들여졌기에 가장 먹을만하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실제로 제니퍼 허드슨의 절창이 이어질 때조차, 예쁜 비욘세는 언제 나오나, 하고 잠깐씩 생각하기도 했다. 바비인형 같은 백인 여가수들이 갖지 못한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고 말할 틈조차 주지 않고 그녀는 참 예뻤다. 대사를 노래로 전달하는 장면에서 혼자 웃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느슨한 마음으로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픈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본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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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오리 2007-02-27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변에서 영화를 본 사람들이 뭔가 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귀가 솔깃하는데, 이 영화도 그런 것 같아요.
근데 왜 56%를 보니 드림카카오가 먼저 생각이 날까요? ^^

마태우스 2007-02-27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욘세의 미모에는 동의하는데요...전 이 영화가 내내 혼란스러웠어요 뭐가 선이고 악인지가 헷갈렸고, 또 주인공이 일정하지가 않아서 집중이 잘 안됐어요 다만... 음악은 좋았고, 싸우는 것도 노래로 하는 게 신선하더이다.

깐따삐야 2007-02-27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적파시오나리아님, 반갑습니다. 드림카카오 맛을 연상하며 쓴 것 맞아요. ^^

마태우스님, 아무래도 유명 가수를 전면에 내세우는 영화들은 대개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노래 나올 때만 좋다는 거. ㅋㅋ

Mephistopheles 2007-02-27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철수씨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에서 이 영화의 실존그룹 "슈프림스"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하더군요..결국 리더자리를 빼았긴 후 그룹 해체 후 에피는 페렴으로 새상을 떠났다고 하더군요. 프로듀서와 메니저 격인 커티스는 상당히 잔인한 면모를 지닌 냉정한 사람이였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세계적인 뮤지션으로써의 인정을 받진 못하지만 슈프림스도 비틀즈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넘버 원 싱글 힛트는 비틀즈보다 많다고 하네요..^^

레와 2007-02-27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보고싶은 영화가 속속 개봉하고 있다는 반가운 뉴스가 또 하나!

행복한 날들입니다.^^*

깐따삐야 2007-02-27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흑인 뮤지션에 대한 천대라든가, 쇼비즈니스계의 어두운 면을 엿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했어요. 역시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냉정했겠죠.

레와님, 레와님은 참 밝은 성품이신 것 같아요. 즐거운 봄 맞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