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생들은 어쩜 그리 표가 날까. 거리에 쏟아져나온 아이들 중에서 신입생을 골라내라면 어렵지 않게 솎아낼 수 있겠어. 갓 빨아놓은 빨래라 해도 새 옷과는 엄연히 다른 것처럼.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나를 보며 저 여자는 신입생이구나, 짐작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얼굴이 붉어지는군. 비록 어두운 색이었지만 사람들은 내 구두가 새 것이라는 걸 보았을거야. 비도 왔는데 낡은 것을 신고 갈 걸 그랬어.

  갑자기 주어진 여유가 아직은 낯설어. 오래 전, 당신에게 비슷한 말을 했던 기억이 나. 당신이 해주었던 실용적인 조언들도. 다시 그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어.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누군가 도움말을 주지 않아도 스스로 토닥일 줄도 알게 되었다는 거. 불안한 거야 있지. 나는 소심증 환자라서 불안하지 않으면 더 불안해지곤 하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 불안의 정체마저도 알고 있다는 거. 당신이 재미없는 표정으로 상상했던 것처럼 나는 조금 어른이 되어버렸어.

  나에 대해 아쉬워했지만 나는 결국 교사가 되었어. 당신의 과대평가가 좋았지만 내 그릇의 크기는 내가 잘 아니까.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여러모로 부적격했어. 아마 공부를 핑계로 잠시 숨어있고 싶었는지도 몰라. 그런데 있지. 오늘 근처 중학교 운동장에서 입학식이 있었는데 까만 교복 속에서 꼬물거리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외경심 비슷한 감정이 생기더라. 간사함이 물씬 배어있는 그 불건전한 마음을 오래오래 혐오하긴 했지만. 아직은 아이들이 그립거나 하진 않아.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오직 나로서의 내가 그리웠을 뿐야.

  당신을 생각할 때도 있었어. 지금도 어쩌다 간혹. 미안하지만, 몹시 한가할 때만 그런 것 같긴 해. 놓친 풍선이 높이높이 떠오르다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고 생각해봐. 그립고 자시고 할 게 있는가. 꼼꼼한 당신은 놓친 게 아니라 놓았다고 정정하겠지. 하지만 의외로 둔감한 당신은 내가 팡,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걸 알아야만 해. 어디엔가 있다, 고 생각했고 그러는 편이 나았어. 그리움은 부재의 인정이니까.

  요즘 내가 기다리는 건 513번 버스와 세탁을 맡긴 옷, 알라딘에 주문한 책과 올리브유로 튀겼다는 치킨 정도. 오늘처럼 달이 뜨면 소원을 세 가지씩이나 빌고, 다시 싹싹 빌고나서 얼른 소원을 바꾸어 말하기도 했는데 그 연례행사를 사촌동생에게나 시켰어. 예전에 내가 소망하던 일들을 모두 이룬 것도 아닌데 무엇을 기다렸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 버스는 약간의 오차가 있을지언정 반드시 오고 내가 이용하는 세탁소는 저렴하면서도 정확해. 알라딘도 예전에 주문하지도 않은 초등학생용 문제집이 한 번 끼어 온 것 말고는 착오가 없었고, 치킨체인점은 서로 과다경쟁 속이라 늘상 신속배달이야. 나는 어느새 확연히 눈에 보이는 것만을 기다리게 되었나봐. 

  당신이 한 약속들을 잊는 사이, 나는 나 자신과의 약속들을 지키며 살아왔어. 항상 몇 퍼센트 쯤은 아쉽곤 했지만 그건 나의 결함이 아니라 인간적 결함일테니까. 누군가를 좋아한 적도 있어. 그러는 중에 당신이 해주었던 말을 반복하기도 하고 반박하기도 했지. 정답은 없었어. 가끔 절대치인 것처럼 말하던 당신을 떠올리며 코웃음을 치기도 했어. 긍정의 말을 얻기 위해 소년을 연기하던 능청스러움에 경악하기도 했고. 지금이라면 웃어제낄 타이밍에 묵묵히 슬퍼하고 있었다니. 나 자신이 안쓰럽다 못해 귀여웠지. 하지만 사랑이란 게 결국은 상대와 열라 놀아주는 일, 아니겠어.

  길에서 당신을 닮은 사람을 본 게 아니라 사실은 나를 닮은 사람을 보았어. 스무 살 무렵의 나. 그렇게 떠오른 게 당신이야. 그 아이는 하나도 예쁘지 않았어. 스무 살이란 나이만으로도 날아갈 듯 고와야 할텐데 말이지. 당신이 나를 예쁘다고 한 건 나를 홀리기 위해서였나봐. 정말로 중요한 건 마음으로 보아야 하는 거라는 둥의 말은 하지 말도록. 나 너무 많이 크지 않았어?

  좁힐 수 없는 거리 때문에 힘들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도 들어. 감정의 훼손 없이 기억 속에서 당신을 다시 불러낼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겠지. 당신은 좋은 인생 선배였고 선생님이었어. 비록 나의 신선한 아이디어들을 착취하고 고맙단 말을 남발한 사실을 보건데, 어쩌면 그 덕에 출세까지 했는지 모른다는 의심이 가시지는 않지만. 시작할 때부터 원래 염두해 두었던 분야가 있었는데 연이 닿을 지는 모르겠어. 사심없이 학업에 정진할 수 있도록 빌어줘. 컨셉은 정했어. 조용한 커피 같은 사람. 웃지 마.

  지금이라면 우리는 정말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겠지. 그래도 시간을 되돌린다면, 나는 당신을 만나지 않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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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3-04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ly me to the moon And let me play among the stars~~♬

깐따삐야 2007-03-04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들어도 들어도 물리지 않는, 좋은 노래죠.^^

부리 2007-03-05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며 살았다고 할 수 있는 분, 멋지시네요.

깐따삐야 2007-03-06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님, 저는 약속을 그닥 많이 하는 타입이 아니라서... 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