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서 스무 살이 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대학에 가면 수학을 안 배워도 되기 때문이었다. 소심한 탓에 늘상 수학책을 붙들고는 있었지만 내게 있어 수학책이란 그저 하나의 물체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교과목에 비해 확연히 처지는 점수 때문에 늘 고민스러웠고 주변 사람들 대다수가 나의 수학 성적에 대해 함께 염려해 주기도 했다. 아예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른 과목에 더 몰두하는 건 어떨까, 진지하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게 말처럼 포기가 안 된다는 것이 또 문제였다. 오로지 욕심 때문이었다.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그럭저럭 잘 나와주던 다른 교과목에 더 집중해봤자 그다지 전체적인 점수 상승이 있을리 없으니, 역시나 부족한 수학에 좀더 매진해야 한다는 결론이 떨어졌다. 결국 나는 굉장히 열심히 수학 공부를 하는 것 같긴 한데, 모의고사만 보면 늘상 반타작 언저리를 웃도는 참으로 안쓰럽기 그지없는 학생이었다. 종종 수학 선생님들을 까닭도 없이 미워하고 수학 교과서 귀퉁이에 상스런 욕을 써놓았던 것은 모두 수학에 대한 원한 때문이었다. 영어가 효자였다면 수학은 발목 잡는 귀신 같았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라니. 사랑할 게 그렇게도 없었더냐, 싶었지만 너무나도 따듯하고 서정적인 영화라서 보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십 년 전에 이 영화가 나왔더라면 내 인생이 조금 바뀌었을까. 수리에 약한 천성이야 쉽게 변할 리 없으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수학 교과서 귀퉁이에 끄적였던 욕 만큼은 슬쩍 지웠을지도 모르겠다. 왜 그 때 그 시절 수학 선생님들은 첫 시간마다 수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다, 라며 잘난 척만 하셨을까. 루트 선생님처럼 수학과의 엄청난 인연을 풀어놓진 못하더라도 오일러의 공식 정도만 차분차분 읊어주셨다면 3.14 원주율과 허수 i와 네피어 수, e가 無로 합일되는 아름다운 조화 속에서 수학의 신비한 매력을 발견했을 수도 있었을텐데. 서툰 목수가 연장 탓하고 공부 못하는 학생이 선생 욕한다지만,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한 루트 선생님의 수업은 내 일생 가장 재미있는 수학 수업이었다.

  사고로 인해 1시간 20분의 기억력 밖에 갖지 못한 박사(테아로 아키라 분)는 그러한 특수한 상황과 독특한 성품 때문에 무려 9명의 가정부를 갈아치운 상태다. 새 가정부로 일하게 된 싱글맘, 쿄코(후카츠 에리 분)는 박사의 사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아까 말했던 거잖아요, 라는 말을 금칙어로 정한다. 쿄코의 신발사이즈를 묻는 것으로부터 반복되는 일상은 우애수, 완전수 등 다양한 수의 성질을 발견하고 깨달아 가는 흥미로운 수학 수업과도 같다. 엄마 없이 저녁 시간을 보내야 하는 쿄코의 아들을 걱정한 박사는 쿄코의 아들이 방과 후에 자신의 집에 오게 하도록 하고, 아이에게 모든 수를 감싸 안아주는 '루트'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박사와 루트는 야구와 숫자를 매개로 친밀한 우정을 나누게 되지만 한때 박사가 앓아 눕는 사건을 계기로 세 사람은 헤어질 위기에 놓이기도 한다. 그러나 정교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수식처럼 맺어진 인연은 이후로도 따스하게 지속되고 루트는 수학 교사가 되어 수업 첫 시간,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소개한다.


박사가 사랑한 오일러의 공식 : 모순되는 것들이 통일이 되면 zero가 된다.

  박사에게 루트는 매일 새롭게 만나는 아이다. 박사는 납작한 루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현명한 마음이 가득 차 있을 것 같군, 이라고 말한다. 아마 날마다 이런 말을 듣고 자라는 아이는 저절로 현명해지지 않고는 못 배길런지도 모르겠다. 루트가 머리를 다친 날, 쿄코는 야구 코치에게 왜 아이를 박사님한테 맡겼냐고 화를 내고 박사의 우울한 표정을 눈치챈 루트는, 엄마가 씌워주려는 모자를 내팽개친다. 어느새 현명한 마음으로 가득 찬 아이는 엄마가 하는 말이 옳지 않음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현명한 마음이란, 의리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쿄코는 그녀가 항상 신고 다니는 하얀 운동화처럼 깨끗하고 상큼하다. 오물조물 바지런히 음식을 만들고 향긋한 냉이를 코끝에 갖다대며 활짝 웃음 짓는 그녀는 천성이 고운 여자, 의 모습을 발랄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박사처럼 수리에 능하지는 못하지만 순수한 직감 만큼은 더 뛰어날지도 모른다. 본능적으로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아채고 그것을 시의적절하게 배려할 줄 안다. 루트에게 박사님한테는 절대로 전에 말했던 거잖아요, 라는 말을 해선 안된다고 이르는 쿄코는 착하고 사려깊다. 어쩌면 그동안의 가정부들은 그거 아까 말했던 거잖아요, 라고 신경질을 부리다 스스로 좌절했는지도 모를 일. 매일 매일 현관에서 신발 사이즈를 묻고 답하며 시작되는 똑같은 일상에 대해 그녀는 한 번도 인상을 찌푸리거나 하지 않는다. 쿄코는 이상적인 여자다.

  박사에게 그냥 지나쳐도 좋을 숫자란 없다. 그는 쿄코의 신발 사이즈에서, 그녀의 생일날짜에서, 야구선수의 등번호에서, 루트의 열한번째 생일에서, 자신이 차고 있는 손목시계의 넘버에서, 갖가지 의미들을 찾아내고 새로운 의미들을 부여하기도 한다. 수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이해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그는 수학과 사랑에 빠진 천재였다. 1시간 20분의 기억력밖에 갖지 못한 건 신이 그에게 내려준 소박한 축복인지도. 일상의 자잘한 내용물들을 모두 기억하고 그것들에 반응하며 살아간다면, 그가 수와 대화하고 사랑을 나누는 기쁨이 다소 줄어들었을지도 모르니까.

  특별한 소재를 다룬 특별한 영화였다. 멀어진 지금, 이제는 좋고 싫고 할 것도 없지만 수학에 대한 나의 오랜 반감을 반감시켜주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영화의 힘은 막강하다. 루트의 든든한 포용력과 소수의 유일무이한 아름다움에 대해 미리 좀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내내 가시질 않았다. 수학을 싫어하거나 기피하는 아이들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박사의 말처럼 밤하늘의 별의 아름다움이나 들판에 피어난 꽃과 같이,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아는 직감과 감성보다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한 가지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수식의 아름다움을 어찌 지나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내가 수와 친해지지 못했던 것은 천성이 아니라, 잘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기인한 두려움 때문이었는지도. 쿄코와 루트처럼 사심 없이 다가섰다면 나는 수학과 우애와 의리를 돈독히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블레이크의 시로 끝을 맺는다. 

  한 알의 모래 속에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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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07-03-02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맙소사! 영화도 있군요!!
전, 책으로 읽었어요.
마음이.. 가슴이 .. 어찌나 따뜻해지던지..
감동의 바다에 풍덩 빠져버린 느낌이였어요!!

이 책을 읽고, 버스번호도 예사롭지 않았다는...^^


깐따삐야 2007-03-02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와님, 아.. 책도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