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마지막으로 학교에 갔다. 부장 선생님이 김치찜을 준비해 오신다길래 나도 계란말이와 더덕구이 같은 밑반찬을 좀 해가지고 가서 출근하신 선생님들과 나눠 먹었다. 보조 아가씨는 밥을 해오랬더니 아예 압력밥솥을 들고 와서 한바탕 소풍 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금방 해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밥이라 맛있기도 했고 선생님, 따듯한 밥을 드셔야지요...하는 말에 마음까지 훈훈해졌다. 그 마음씀이 고마워서 모처럼 과식을 했다. 식구처럼 지내던 사람들과 이제 헤어져야 하지만 교직이라는 것은 사람들끼리 돌고 돌게 마련인지라 이별이 아주 슬프거나 하지는 않다.

  2월, 6월, 11월은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시기다. 완전 비호감까지는 아니지만 이 시기가 엄습해 오면 나는 간혹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모하곤 한다. 2월은 강박의 달이다. 뭔가를 정리해야 할 것 같은 한 편, 뭔가를 준비해야 할 것 같은 강박에서 쉽사리 벗어나질 못한다. 6월은 짜증의 달이다. 더위가 스멀스멀 밀려오면서 금방이라도 발화를 할 듯한 짙푸른 녹음과 여름 초엽의 알싸한 향기가 곧 나를 질식시킬 것만 같다. 11월은 불안의 달이다. 거리는 연갈색과 무채색으로 뒤덮이고, 그 스산함은 함부로 내 옷깃을 파고들며 심신을 춥춥하게 만든다. 아무에게나 손을 내밀고 어깨를 빌려달라 하게 될까봐 모든 문을 꼭꼭 걸어잠근 채, 건샌로지스의 November rain이나 들으며 온종일 나를 감금시킨다. 내곁에 누가 있느냐, 있지 않느냐, 하는 물리적 상황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나는 늘상 저런 모양새로 지겨운 계절을 버티었다.

  요즘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를 읽고 있다. 다른 책을 훑어보러 갔다가 충동구매를 했다. 유명한 책이니 만큼 익히 들어온 제목이었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언젠간 읽게 되리라 막연히 생각했지만 저런 식으로 무턱대고 사들일 줄은 몰랐다. 이게 다 지금이 2월이기 때문이다. 3월 1일에만 갔어도 훨씬 계획성 있는 구매를 했을텐데. 책의 내용마저 부실했다면 2월과 완전 등질 뻔 했지만 다행히 큼큼거리는 호기심을 갖고 즐겁게 읽고 있다. 콜린 윌슨은 이 책을 스물넷에 써서 하룻밤 사이 유명해졌다는데 그 나이답잖은 방대한 독서량과 지식 수준에 한 번 놀라고, 그 모든 사상과 인물들을 아웃사이더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통합해내는 통찰력에 두 번 놀라고 있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적확한 단어가 과연 이것 뿐이랴, 하고 의구심을 자아내는 아리송한 번역인데 역자는 소심하거나 혹은 친절하게도, 어려운 부분은 한 번 더 읽어보면 명확해질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노파심에 풋, 하고 웃음이 나면서도 이해되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정규교육 제대로 받은 작가들의 체계적인 글에 비하면 이처럼 한 구절, 한 구절이 쓴 사람만 알거나, 혹은 쓰면서도 설명하긴 어렵지만... 이라고 머리를 긁적였을 법한, 번뜩이는 아포리즘 천지인 글을 번역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매끈한 독서가 되고 있진 못하지만 이 책의 가치를 못 알아볼 만큼은 아니다.

  아웃사이더, 라기에 생각났는데 극과 극은 통한다고, 너무 강한 부정은 곧 긍정이랬나. 내가 아는 아웃사이더들은 대개 평범한 생활인이 되었다. 아니면 그들은 애초에 아웃사이더가 아니었는지도 모르지. 대학 동기 J는 오로지 드럼을 배우고 싶어 교회에 다닌 케이스였다. 강의 빼먹고 드럼을 치러 가는 일이야 다반사였고 칸막이가 있는 어학실 구석 자리에 앉아서 양손에 볼펜을 들고 투닥거리는 풍경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다들 외국어나 컴퓨터 과목을 교양으로 선택할 때 그와 나는 수강생이 채 열 명도 안되는 철학 강의를 들으러 인문대로 건너가곤 했는데 '이지 라이더'라는 영화를 보던 어느 날엔,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여자친구를 강의실로 데려와 우리를 경악시킨 적도 있었다. 강의가 슬슬 지겨워지는 오후에는 언제나 그렇듯, 자아도취에 빠진 교수님에게 J가 빨리 딴지를 걸어서 이 지루한 수업 시간을 흥미진진하게 이끌어 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우리는 그를 군대에 보내면서도 다들 불안해 했지만 J는 능글맞고 얄짤없는 군바리가 되어 군생활을 너무나 잘 즐겨주는 바람에 다들 약간씩 실망했다. 졸업을 한 후로는 그를 잊고 지냈는데 얼마전 K가 텝스시험장에서 그를 봤다며 소식을 전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고 열심히 시험을 준비 중이라고. 시험장에 양복을 입고 온 그는 삼십대처럼 보였단다. 왠지 배신당한 듯한 기분이 잠시 스쳤지만 그의 궤도가 현실로 돌아왔음에 안도했다.

  동아리 선배 M은 순수한 괴짜였다. 겉과 속이 자로 잰 듯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된 H와 그 선배가 싸우던 장면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다른 선배와 이야기를 하느라 신경 쓰지 않던 사이, 소주병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선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몇 마디 거친 욕이 들렸고 H는 발악발악 대들며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다. 옹 대접을 받았던 몇몇 나이 많은 선배들이 서둘러 싸움을 말렸고 아쉽게도 나는 기숙사 점오시간 때문에 마무리 씬을 못 보고 돌아와야 했다. 물론 그 후에도 그들은 아주 잘 지냈다. 아니, 외관상으로만 보기엔 전보다 더 잘 지냈다. 아무튼 M 선배는 그처럼 못 말리는 다혈질이었다. 직선적으로 말했고 노골적으로 행동했다. 낄낄거리며 담배를 피워 물 때는 영락없는 폐인인데 그가 쓴 글은 아름답고 솔직했다. 선배는 졸업 후 고향의 군청 공무원이 되었고 얼마 전 결혼을 했다. 신혼인데 매일 야근이라며 툴툴거리더니 자기 동생을 소개시켜주겠다며 한 번 생각해 보란다. 손사래를 치며 선배 같은 시아주버니는 사양하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감정의 촉수가 옛날 같지는 않지만 뭔가를 받아들이거나 해석하는 이해력 만큼은 옛날보다 나아졌는지 모른다. 더 이상 신선하지도 않지만 더 이상 막무가내도 아니다. 2월이 그냥 싫어, 라고 말해버리면 모든 것이 암막으로 가리워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내가 왜 2월을 싫어하냐면, 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나 자신에게 자연스럽게 생각할 시간을 주게 된다. 변명을 위한 망설임이 아니다. 내치지 않고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계절이든. 2월 때문이다, 라고 하기에 사실 나는 내 강박과 짜증과 불안의 원천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달력을 한 장 찢거나 넘겼고 오늘 하늘은 그야말로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다. 들쭉날쭉한 감정의 파고와는 상관 없이 2월은 소리소문 없이 가고 있고 수선을 맡긴 봄옷들을 찾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겨울을 나면서 3kg이 빠졌다. 올 겨울 나기가 유난히 힘들었다고 고백해야 할까. 하지만 내일부터는 다시 내 궤도를 찾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웃사이더가 예술가일 수는 있지만, 예술가가 반드시 아웃사이더인 것은 아니다, 라는 콜린 윌슨의 말은 옳다. 정기적으로 영어시험장을 찾는 양복 차림의 삼십대. 그들도 한 때는 아웃사이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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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다예요 2007-02-28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3월이 코앞이에요. 여행을 좀 다녀왔는데 갔다 오니 그 뿐, 또 그 자리네요. 오히려 여행이 헛헛해질 만큼. 저는 3월이면 뭔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요. 그래서 지금은 하지 않으면서도 3월에 해야할 일을 2월에 미리 차곡차곡 정리하기도 해요. 3월 1일이 되면 짠, 하고 일을 시작할 것 처럼요.

깐따삐야 2007-02-28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다예요님, 달력의 숫자들에 연연하지 않을 만큼 열심히 사는 방법은 없을까요? 열심히 살다보면 달력의 숫자들에 연연하지 않게 되는 걸까요? 계획하고 구상했던대로 짠, 하고 시작해서 짠, 하고 마무리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2007-02-28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따삐야 2007-02-28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하핫, 그쵸. 한 가족이 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니 말예요.^^

마늘빵 2007-02-28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기억에서 제 동기와 선배와 제 모습들을 찾게 되는군요.

BRINY 2007-02-28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시는군요! 지난 가을 모 경시대회때 학생 데리고 찾았던 교원대 모습이 새롭습니다.

깐따삐야 2007-03-01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음.. 님도 분명 괴짜 기질이 있으세요. 좀더 어릴 때는 더하셨죠? ^^

BRINY님, 그동안 오랫동안 공부를 놔서, 학생 노릇을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님도 힘차게 새학기 출발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