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처럼 귀여운 영화를 보려던 참이었다. 휴 그랜트와 드루 베리모어라니, 이보다 더 사랑스럽기도 어려운 조합이다. 알렉스(휴 그랜트 분)는 끊임없이 엉치뼈를 흔들어대고 소피(드루 베리모어 분)는 토실토실 앙증맞은 표정으로 가슴에 녹아든다. 영화는 모자람도 넘침도 없다. 다정한 사람끼리 나란히 앉아 음악에 맞춰 고개를 까닥이고, 같은 씬에서 동시에 웃을 수 있게끔 배려한, 베스트셀러의 요목을 제대로 숙지한 로맨틱 코메디였다. 영화를 보기 전에 곱창을 먹은 것은 잘한 일이었지만 약간 시장기가 있는 상태에서 영화를 본 다음, 딸기와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창밖의 봄비를 구경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80년대, 최고 전성기를 누리던 인기 듀오 '팝'의 멤버였던 알렉스는 이제는 주부들 사이에서나 기억되고 있는 한물 간 가수다. 각종 시시한 행사에 불려다니며 힘겹게 엉치뼈를 흔들어대곤 하지만 모든 것이 예전같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최고 인기 가수인 코라 콜만이 알렉스에게 듀엣을 제의해 온다. 하지만 알렉스에겐 주어진 짧은 기간 동안 직접 노래를 만들어야 한다는 임무가 맡겨지고 한창 고심을 하던 중, 화초에 물을 주러 왔던 소피에게서 놀라운 작사 능력을 발견한다. 알렉스의 말을 그대로 빌려오자면 노랫말을 떠올리는 소피는 그야말로 입만 열면 옥구슬. 사실 그녀는 작가 지망생이었지만 억울하게 모함을 당한 후로 꿈을 포기했었다. 알렉스와 소피는 낮밤을 함께 하며 'Way back into Love'라는 노래를 작사, 작곡하고 코라는 이 노래를 아주 마음에 들어한다. 하지만 자기 식으로 노래를 바꾸어 부르려 하는 코라를 소피는 인정하려 하지 않고, 이 과정에서 알렉스와 심하게 틀어지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예전에 김광한 씨가 진행하던 쇼비디오자키, 인가 하는 프로그램에서 Wham의 Last Christmas의 뮤직비디오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 때 나는 아마 초등학생이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시디나 MP파일이 흔하지 않을 때라서 당시에 내가 팝송을 접할 수 있는 매체는 심야 라디오 방송과 오빠가 듣던 오래된 테입들, 그리고 쇼비디오자키 정도였는데 Wham의 저 뮤직비디오를 보고 난 후로 곧바로 팬이 되었다. 과거에 뉴키즈온더블럭이 내한 공연을 하러 우리나라에 왔을 때 소녀들이 실신하여 실려가고, 한바탕 나라 안이 떠들썩했을 때도 있었지만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고 그저 웸의 노래가 나오면 야, 정도의 환호성과 함께 반가워하고 좋아했다. 그 무렵, 내가 녹음해서 선물했던 테입에는 상대의 취향이나 시기와 계절을 막론하고 언제나 웸의 래스트 크리스마스가 있었다. 영화 속 알렉스와 그룹 팝은 나로 하여금 창창하던 시절의 조지 마이클을 떠올리게 했다. 그 촌스러운 멜로디와 민망한 엉치뼈 댄스를 보며 어깨가 들썩이고 구두굽이 간지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아, 팝의 고전이란 역시! 혼자 감탄하기까지 했다.

  주름이 짜글짜글한 휴 그랜트도 늙긴 늙었더라마는 다행히 귀엽게 늙어가는 듯 했다. 그가 숀 코네리나 마이클 더글라스 만큼 늙으면 과연 어떤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여전히 궁금하지만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화초에 물 주러 온 귀여운 할머니를 홀려서 알콩달콩 재미나게 지낼 것 같긴 하다. 할머니였든, 아줌마였든, 아가씨였든 나이를 불문하고 여자라면 그를 내치지 못한다. 여자들은 누구나 그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사랑에 빠질 수밖에. 행운의 사나이, 부실한 엉치뼈마저도 사랑스러운. 드루 베리모어는 '웨딩싱어'에서 만큼 젊고 싱그럽진 않지만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로맨틱 코메디 여주인공의 전형을 보여주기에는 무리가 없다. 마르고 닳도록 빼고 또 뺀다는 요즘 헐리웃 풍조에 비하면 여전히 살짝 통통하다 싶은 체구이지만, I need inspiration~ Not just another negotiation~ 하는 그녀의 노랫말과 스키니함은 영 어울리지 않는다. 정곡을 찌르는 위트 넘치는 대사와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두 배우, 귀에 익은 듯한 아름다운 노래들이 즐거운 하모니를 이루며 사랑을 찾아가는 길(Way back into love)에 대해 이야기하는, 군더더기 없이 다정다감한 영화였다.

  알렉스와 소피는 서로를 위해 잃었던 꿈을 찾아준다. 과거의 영광에 매여있던 알렉스, 과거의 미련에 의지했던 소피. 그들은 과거로부터 벗어나 이제 함께 시작하자고 노래한다. 내가 언제나 나다워도 편안한 것, 싸우지 않고 우아하게 비껴가느니 서로 치고받고 하더라도 함께 갈 수 있음을 깨닫는 것. 사랑을 찾아가는 길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로맨틱 코메디가 사시사철 끊임없이 주입하곤 있지만 사실 별 효력은 없는, 사랑을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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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07-03-05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맞아!
예전엔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골라 테잎 선물도 굉장히 많이 했는데..
그게 어느덧 시디로 바뀌더니, 요즘엔 아예 시도도 안하고 있네요..^^;;


이번주 하루 시간내서 꼭 보러가야겠어요! 이 영화~

바람의 심술이 굉장한 오늘입니다.!
날려가지 않게 조심조심하셔요~

깐따삐야 2007-03-05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와님, 이 영화 추천합니다. 기분이 좋아지실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