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하던 방학이건만 올해 여름방학은 1정 연수에 내주었다. 날마다 강의실에 앉아 여덟 시간씩 연수를 받으려니 바깥 날씨가 어떠한지 모를 정도다. 학교를 나설 때면 머리는 이미 과부하 상태. 숱한 과제와 발표에 치여 다들 빛을 잃은 듯 지내지만 교사 특유의 성실성의 발로일까. 불과 몇 시간 전에 교수가 툭 던져준 프로젝트도 용케 잘들 해낸다. 어떤 연수든 한 가지 이상은 건질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멤버들의 무서운 과제 수행 능력에 기함하는 중이다. 한 달 남짓의 연수 프로그램으로 급수와 호봉이 달라진다는 것이 멋쩍기는 하지만 좀 덜 멋쩍어지기 위해서라도 남은 기간, 열심히 해야겠다.

  남편의 생일. 둘 다 출근해야 하는 바쁜 아침이지만 소박하게나마 생일상을 차렸다. 미역국을 끓이고 엄마가 해주신 나물들을 올리고 저녁에는 재운 고기를 팬에 볶고... 가게에서 한참을 고르고 골라 케익과 샴페인도 샀다. 민망하지만 촛불을 켜고 노래도 불러줬다. 뚜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쑥스러운 게다. 일찍 독립한 남자이다 보니 그럴 만도. 뚜한 표정이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시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오자 뭐도 먹고 뭐도 먹고 자랑을 한다. 나는 이따금 나보다 연상인 그에게 웃어른이 그러시면 못 쓴다고 농담을 하지만 남자는 평생 아이 같다.

  길치에 기계치인 E가 얼마 전부터 운전을 시작했다. 방학 동안 대학원에 다녀야 하니 여러 가지 여건 상 더 미룰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예상대로 심각한 자아비판을 시작했다. 엊그제 피자를 우적거리며 말하기를, 나는 남들처럼 운전도 못하고, 남들처럼 연애도 못하고, 남들처럼 사근사근하지도 못하고... 왜 이렇게 못하는 게 많은 거야! 나도 그랬었다. 운전을 시작하면 별별 자학은 당연히 따라오는 수순이다. 오늘 만난 E는 아버지 차를 따라온 게 아니라 혼자 몰고 왔다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세미나에 치여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그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안색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주차의 곤란함에 대해서도 한참을 떠들었다. 그나저나 주유소에서 기름 넣는 것은 배웠나 모르겠네.

  연수 멤버 중에 대학 선후배, 동기들도 많다. 서른 즈음해서 다시 만난 우리는 서로 살아가는 얘기를 하며 의견 또한 분분하다. 매사 까칠했던 Y는 계속 이중고, 삼중고를 겪으며 영어교사로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거냐고 반문하고, J는 그래도 아직 젊은데 재밌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선배 언니들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내게 밥을 하지 말라는 뼈 있는 조언을 해주었다. Y의 푸념도 공감하는 사실이고, J의 말처럼 그래도 유의미한 즐거움을 찾으려고 애는 써봐야 하는 게 인생이고, 언니들의 조언처럼 좀 널널하게 살아볼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도 당장 코앞으로 닥친 시험과 프리젠테이션부터 준비해야 하는 게 나의 일상이다. 방학 없는 방학이라니. 아이들 말로, 완전 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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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5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26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27 2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30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9-07-25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글보고도 웃었는데 태그에 푸하하하~
역시 태그 패밀리다운 저력이~~~ㅋㅋㅋ

알콩달콩 신혼을 즐길 짬도 없이 만날 공부에 치여사는 깐따님
그래도 생일상도 차리고 촛불켜고 노래까지 불러줬으니 됐군요.^^

깐따삐야 2009-07-26 21:55   좋아요 0 | URL
다들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눈에 불을 켜고 열심히 하는 분위기라서 긴장의 연속이랍니다. 에궁.

남편도 보충수업으로 바쁜데 실은 연수 핑계로 요즘 좀 부려먹고 있는 중이에요. 당연한 건데도 먼저 저녁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으면 괜히 미안해지고. 이러지 말아야겠죠? ^^

개츠비 2009-07-26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학도 없이 정진하고 계시군요...깐따삐야님을 보며 저도 힘을 얻습니다. 끝없는 정진, 30대가 세상을 헤쳐나가는 비법같은게 아닐까해요. 오랜만의 글 반가웠습니다. ^^

깐따삐야 2009-07-26 22:01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여전히 사는 게 서투른 삼십대이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는 것 같아요. 님 말씀처럼 배우고, 돌아보고, 살면서 끝없이 정진하는 것 밖에는.^^

레와 2009-07-27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반갑잖아요, 깐따삐야님!! ^^


깐따삐야 2009-07-30 21:04   좋아요 0 | URL
방학이 방학이 아니니...ㅠㅠ 저도 반가워요, 레와님! ^^
 


#
  영화 마더. 원빈의 팬인 엄마와 함께 봤다. 엄마는 애절한 모성에 관한 영화가 아니고 단순한 범죄물도 아니라며 무척 색다르다고 좋아하셨다. 박쥐는 상을 받았다는데 자식의 일이라면 murder도 서슴지 않는 이곳의 질긴 모성을 서방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흥미로웠던 것은 낯선 두 사람이 서로 상처의 정곡을 찔러 비극에 이르는 모티브였다. 바보 같은 사랑은 많이 보았지만 이런 바보 같은 살인은 처음이다. 나는 왜 마더를 보면서 밀양이 떠올랐을까. 터미네이터도 재미있었고 요즘 영화를 많이 보았는데 보고 나면 뭔가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간다. 기억력을 탓해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일상이 내게 겨를을 주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일상을 탓해보기도 하지만 기억력이 나빠진 것도 사실이다. 며칠 전 점심시간에는 축구선수 기성룡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숟가락으로 머리를 마구 쥐어박고 싶었다. 결국 그의 해사한 얼굴만 어른거리다가는 포기. 퇴근 길 운전 도중에 아! 하고 생각났다. 
 


#
  학교가 따듯하고 인간적인 곳이라면 참 좋을 텐데 요즘은 너나없이 너무 이기적이라 절로 한숨이 나올 때가 있다. 나 역시 특별히 이타적인 사람은 못되지만 적어도 낯 두꺼운 짓은 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는데 이곳도 다른 집단처럼 반반인 것 같다. 엄마는 교사인 딸에게 대놓고 “진짜 똑똑한 사람은 교사 못한다.”고 뼈 있는 지적을 하시곤 하는데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지적이다. 아이들은 인간적으로 부족하기 마련인데 교사들 또한 인간적으로 어딘가 모자란 사람들이지 싶다. 그래서 수준 맞는 사람들끼리 같이 놀라고 학교를 세웠는가 보다. 자학이 아니라 현실이다. 나이는 세월 지나면 저절로 먹는 것인데 그 당연한 세월의 힘을 빌려 아이들 위에, 또는 동료 위에 군림하려 들지 말아야겠단 생각을 한다. 정당성이 결여된 권위란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폭력이자 횡포다. 
 


#
  뭐든지 좋게 좋게 넘어가려는 남자와 시시비비에 목매다시피하는 여자가 한집에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내지르는 언어들은 창공에서 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때가 많고 그는 그 날생선 같은 언어들을 갸웃거리며 받아들이곤 한다. 나는 “우리가 만약 한 직장에서 근무했다면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라고 말하고 그는 “아니지. 당신이 나한테 홀딱 빠져서 정신을 못 차렸겠지.” 느물거리며 응수한다. 이러한 농담 뒤켠으로 실은 서로를 서로에게 비춰보곤 한다. 부부는 서로를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자기 자신부터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문제에 있어 내가 때때로 억지를 부린다면 그는 이따금 잘 생각나지 않는 척 한다. 논리가 아닌 막무가내 억지였다, 잘 생각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시 떠올리기 싫은 실수였다, 요렇게 자기 자신을 깔끔하게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인지 정말 미혼일 때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부부가 된 이상, 그 상상도 못했던 유치한 행태를 꾸준히 반복하며 살겠지. 영원히. 
 


#
  요즘 하고 있는 다짐.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의무를 방기하면서 수십 가지의 이유로 치장을 하는 족속은 되지 말자는 것. 안이한 구성원들 때문에 나머지 사람들이 고생이 많다. 우아하게 포즈만 취하시는 분들 덕분에 발을 동동 구를 때도 있다. 故 노무현은 부지런하고 인간적인 어른이었다.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린 것은 그런 어른이 드물고 귀하기 때문이었다. 서른이 기점일까. 예전에는 젊은 사람들이 눈에 많이 들어왔는데 요즘은 푸릇한 젊음들이 뭉뚱그려 보이고 외려 나이 든 사람들이 눈에 더 많이 들어온다. 그리고는 저렇게 나이 들었으면 좋겠다, 계속 저리 살면 늙어서 참 한심해지겠구나, 이런 생각들을 한다. 내 머리와 가슴에 훌륭한 역할 모델로 자리 잡은 분들, 그런 분들을 거울삼아 내 삶을 다듬어가야겠다고, 기왕 사는 거 잘 살아야겠다고, 천하지 않게 나이 먹어야겠다고, 조금은 부담스럽게 스스로를 긴장시킨다. 굵어지는 허리 사이즈도 염려스럽지만 순간순간 깜짝 놀랄만큼 점점 굳은살이 붙어가는 나의 의식이 문제, 문제적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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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6-08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어머니도 원빈팬이신데 같이 보러갈 생각을 못했네요.. (어머니는 제 남자친구들을 한번도 마음에 들어해 본 적이 없으신데, 이유가 두꺼비류라서 입니다 ㅎㅎ) 저는 점점 아주머니들하고 수다 떠는게 좋아지고 있어요.. 이거 안좋은 증조인가요?

깐따삐야 2009-06-09 21:59   좋아요 0 | URL
저희 엄마는 예전 어느 드라마에서인가, 원빈이 아줌마! 하던 장면에 화악 꽂히셨다죠.^^ 저 역시 교무실 아주머니들과의 네버엔딩수다를 즐기는 중입니다. 대한민국 아줌마들은 모르는 것도 없고 못하는 것도 없어요. 안 좋은 징조라니요! ㅋㅋ

순오기 2009-06-09 0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오랜만에 들렀지요, 깐따님~~ 부부로 사는 건 때론 유치함의 연속이지요?
이젠 연민으로 사는 내겐 신혼일기로 읽혀요.^^

깐따삐야 2009-06-09 22:02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순오기님. 제가 넘 뜸했죠~
저는 아직도 멀고도 멀었나 봐요. 순오기님 경지에 이르려면.^^

순오기 2009-07-25 17:04   좋아요 0 | URL
하하~ 순오기의 경지에 이르러면 이혼하겠다고 몇 번을 길길이 뛰어야 하고~ 별로 좋은 것도 아니니까 제 경지엔 도달하지 마시라요~ ㅋㅋ

2009-06-09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09 2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1 0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와 2009-06-09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멍해지는 정신, 뉴스만 보면 또릿해집니다.
두눈 똑띠 뜨고, 단디 살아야지요. ㅎㅎ

보고싶었어요, 깐따삐야님! ^^*

깐따삐야 2009-06-09 22:07   좋아요 0 | URL
똑띠 뜨고 단디 살아야...ㅋㅋ 힘들지만 그래야겠죠. 레와님도 힘내세요.^^

2009-06-09 2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0 2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09-06-10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 없으니 이제 알라딘도 뜸한 웬디 ㅋㅋㅋㅋ 와락. 반가워요. 흑.

깐따삐야 2009-06-10 20:41   좋아요 0 | URL
아우, 정말 그런 거에요? 웬디양님은 알라딘에 뜸해도 다른 곳에서 뭔가 재밌는 일을 하고 있을 것만 같아요.^^

개츠비 2009-06-10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일상을 살짝 엿보고 갑니다. 깐따삐야님의 소소한 일상에 동감과 응원의 구호를 외쳐보고 싶네요. ^^

깐따삐야 2009-06-10 20:42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나이를 먹을수록 사는 게 쉬워질 줄 알았던 게 결국 오해였나 봅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승주나무 2009-06-20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없음

안녕하세요. 승주나무입니다.
알라딘 서재지기와 네티즌들이 함께 시국선언 의견광고를 하려고 합니다.
알라디너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참여의사를 댓글로 밝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강요는 아닙니다^^;;

즐찾 서재들을 다니면서 댓글을 남기고 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남기는 스팸성 댓글이지만 어여삐 봐주세요~~~

http://blog.aladdin.co.kr/booknamu/2916466

 

  삶에 은유가 결핍될수록 내 삶이 점점 천박해진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은 배만 고픈 것이 아니다. 때로 정신이 고프고 내면이 헛헛해오는 순간이 있다. 슬픔도 가득 차오르면 그 자체로 풍요롭다.

  나는 나로서 여기 이렇게 있지만 그 ‘나’는 내가 원하는 나도 아니고, 전적으로 나다운 ‘나’도 아니며, 그렇다고 ‘나’는 내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대체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 라고 쓸 무렵 비보를 들었다. TV 속에서 통곡하는 사람들은 마치 제 설움에 우는 것처럼 보였다. 텐프로의 아귀들을 제외하곤 크든 작든, 너나 할 것 없이 힘든 시기 아니던가. 가까운 곳이라면 한번 가보고 싶었다.

  어제는 근방의 도시에서 친구의 결혼식이 있었고 오랜만에 고향 친구들과 재회했다. 우리는 드디어 짝을 만난 K가 그간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가를 떠올리며 그녀를 대견해했다. K는 어릴 때부터 거의 가장 노릇을 해왔다. 그녀는 고통에 묵묵하고, 작은 기쁨에 볼우물을 패이며 활짝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그래도 좋을 테니, 그녀의 든든한 반쪽에게 기대고 살았으면 좋겠다.

  말할 줄 모르면 입을 다무는 편이 낫다. 점점 진심보다 변죽만 좋은 인간들이 뻔뻔하게 배불리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 같아 화가 난다. 오늘 Look on the bright side라고 칠판에 쓰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가린다고 가려지는 것이 아니다. 

  요즘은 내가 나를 경계한다. 나와, 내 자리와, 내 직업과, 나의 나이듦에 대하여. 내가 경멸하는 사람들, 나는 그리되지 말아야지, 나는 나이 먹을수록 저리되지는 말아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다 그만한 까닭이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지난날, 꽤나 견고했던 내 안의 성찰적 자아를 상실하는 것 같다. 나 스스로에게 경종을 울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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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9-05-25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깐따삐야 2009-06-08 22:01   좋아요 0 | URL
네!

박교수님방 2009-05-28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랜만이에요. 가끔 와서 새글 있나 확인하고 했는데,, 내가 나를 경계할 것 웬지 와닿네요
어쩌면 이제 옆으로 좀 더 넓어질 수 있는 나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비슷한 나이에 직접 연락도 안하는 머나먼 알라딘 친구이지만,, 그래도 이곳에 오는 게 좋습니다!

깐따삐야 2009-06-08 22:05   좋아요 0 | URL
아, 선생님? 잘 지내셨죠? ^^
몸매만 넓어지지 말고 마음도 넓어져야 할텐데 말이죠. 그게 참 어렵네요. 이곳에서라도 가끔씩 뵈어요!
 

  아삭아삭 알싸하게 씹히는 새싹의 풍미가 그만이었다. 콩나물국과 새싹비빔밥. 남편과 나는 뚝딱 한 그릇을 비웠다. 딸은 예쁜 도둑이라지. 바리바리 빈 통을 싸들고 친정에 온 나를 보시고 위층 아주머니 말씀. 왜 아니겠는가. 계절이 오고 가는 소리를 엄마가 해주시는 먹거리 속에서 혀끝으로 듣는다.
  

  오후 수업 땐 살짝 덥기까지 했다. 창밖 운동장에서 반팔 차림으로 슛을 쏘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그들의 바람과 나의 바람, 그들의 빈틈과 나의 빈틈을 비교할라치면 지나가는 세월의 마디가 다를 뿐. 별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갖은 폼을 다 잡아야 한다니. 얼굴에 먹구름을 드리우는 연습을 일부러 해야 하는 이상한 직업병.  


  돌려먹는 쿠키. 휴대폰에서 울리는 상쾌한 컬러링. 매일매일 바꿔보는 노트북 배경화면. 누군가의 생뚱맞은 농담. 책장 위에서 아기자기 피어나는 봄꽃들. 교무실인지 교실인지 분간 못하는 장난꾸러기들의 도발. 반복되는 하루를 채우는 사물, 소리, 빛깔들. 나이를 먹고 있을 뿐인데 점점 어려지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마치 지금의 내가 십대 그 시절, 이십대 초반의 그 시절보다 더 답답하고 모자란 사람처럼 생각되곤 하는 것이다. 청춘을 허투루 보낸 것도 아닌데 완벽에 대한 향수는 어째 미래가 아닌 과거에 있을까.  


  봄을 놓칠까. 며칠 전에는 근처 수목원에 다녀왔다. 알록달록 도시락 가방을 든 가족들과  카메라를 둘러맨 젊은 연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내가 지나온 시간, 그리고 내가 가야 할 시간. 꽃이 꽃 자체로 군더더기 없이 아름다운 것처럼 나도 내내 그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련미보다는 자연미. 어떤 면에서는, 매우 시대착오적인 사람이고 싶다.    

 
  영어를 힘들어하는 아이들도 노래를 들려주면 얼굴에 반짝, 불이 들어온다. 그때의 나도 그랬다. 그리운 서정시대. 시를 쓰라고 하면 Love is money, Love is capability, Love is appearance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아이들. 고학년일수록 더 그렇다. 그래도 Love is heaven, sometimes hell. 사랑을 알고 있는 아이들. 언젠간 그 알고 있는 사랑을 겪어야 할 아이들. 그 달콤쌉싸름한 한 줄에 마음은 찌릿하여라.   

 


이름은 모르겠다, 수목원 온실 안에 피어있던 꽃. 초록과 분홍의 조화는 언뜻 촌스러운듯, 완벽하다.  


자전거 도로 옆, 길섶에 피어난 민들레. 나는 민들레가 참 좋다.


수목원에서 돌아오는 길. 자전거를 타고 씽씽- 두 번 넘어졌고, 넘어지는 것조차 재밌었던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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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9-04-18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심히도 ^-^

저 며칠전에 회사 사람들이랑 노래방에 갔는데요
정말 저 노래를 부르고 싶어 죽을 것만 같았어요- 으으.
그런데 부르지 못하고,
결국은 혼자 집앞 횡단보도에서
아무도 없는 틈을 타 가만 가만 부르곤 했지요.

깐따삐야 2009-04-21 08:16   좋아요 0 | URL
횡단보도에서 가만 가만 봄날은 간다, 를 부르는 검은 눈동자의 키 큰 아가씨.^^
뮤비 같네요.

turnleft 2009-04-18 0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위의 보라색 꽃, 꽃잎과 문양이 소용돌이에요. 신기해라~

깐따삐야 2009-04-21 08:16   좋아요 0 | URL
앗, 그러고보니 그러네요. 신기해라~!

레와 2009-04-20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촉촉하게 봄비 내립니다. ^^*

깐따삐야 2009-04-21 08:17   좋아요 0 | URL
여기는 칙칙하게 봄비 내립니다.^^;
 

  예나 지금이나 개교기념일에는 학교에 가지 않는다. 나만 노는 날. 남편을 보챘다. 점심 때 나한테 초밥을 안 사줄 테냐고. 후환이 두려웠는지 선뜻 그러겠단다. 결국 시내로 나가 초밥을 먹고 연애시절마냥 피스타치오, 엄마는외계인 등을 섞어 아이스크림도 냠냠. 차창 밖의 옷차림들은 뒤죽박죽이었다. 나 역시 청바지에 얇은 분홍색 티셔츠를 입었으나 도톰한 점퍼로 무장한 상태. 쨍하니 맑은 햇볕 사이로 파고드는 찬바람. 봄이 오락가락 주춤거리며 오는 중이었다.

  할랑한 오후를 시기하는 그를 먼저 들여보내고 오랜만에 혼자 서점엘 갔다. 이 도시에는 마음에 드는 서점이 없다. 이 도시의 서점들을 다 가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진 그렇다. 대학 시절, 정문 근처에 ‘열린 지성’이라는 서점이 있었다. 주인아저씨가 지적이었고 서점은 깨끗했고 책도 고르게 많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졸업하기 전에 문을 닫았고 그 자리에는 편의점이 들어섰다. 원체 술집과 음식점이 즐비한 골목 가운데 열린 지성은 이물스러웠다. 난 그곳에서 앤서니 기든스와 카잔차키스를 샀다.

  그나마 시내에서 가장 큰 서점이라고는 하는데 이 서점은 당최 책의 배열에 일관성이 없다. 오직 직원들의 푸른 줄무늬 셔츠만 일관될 뿐. 오늘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멸』이 역사 관련 서적들과 나란히 꽂혀 있었다.『라쇼몽』을 살까, 하다가 그래도 봄인데『점섬뎐』이 나을 것 같았다. 며칠 전 그녀의 타계 소식을 들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나는 예전부터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의 책과 그림을 보며 김점선 같은 어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종종 생긴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지 싶다가도 그래도 나는 선생인데, 싶어서 가책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그러고도 망각의 존재인지라 또 상처를 주고, 받는다. 내가 여전히 어른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반드시 짚고 넘어야 할 것과 그냥 지나쳐도 좋을 것을 그때그때 현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한 소소한 성찰조차 허락하지 않는 분주한 일상에 한숨을 짓다가도 바쁨이 곧 핑계가 될까, 스스로를 긴장시킨다.

  어젯밤엔 눈까지 내렸는데 도청 앞에는 목련과 매화가 활짝 피어 있었다. 마치 뿔난 내 마음이 풀리기도 전, 얼굴에 함박웃음 지으며 다가오는 아이들 같았다. 그 꽃잎처럼 환하고 귀여운 웃음이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새봄을 부르는 것이겠지. 그들 앞에 항상 당당해야 하면서도 겸손해야 할 이유를 알 것 같다. 당신은 사랑을 많이는 아는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아. 그래서 스스로 그렇게 힘들어 하는가봐요. 어제 남편이 그런 말을 했다. 흠칫 놀라지만 말고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다. 나를 잘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는, 대체 언제 어디서 컨닝을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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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03-25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은 사랑을 많이는 아는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아. 그래서 스스로 그렇게 힘들어 하는가봐요. 어제 남편이 그런 말을 했다. 흠칫 놀라지만 말고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다"

자자 이제 역전당하신겁니다 깐따삐야님..^^

깐따삐야 2009-04-01 22:14   좋아요 0 | URL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군요. 흠흠.-_-

레와 2009-03-25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긴 목련이 다 떨어지고 벚꽃이 방울방울 피고 있답니다. ^^



깐따삐야 2009-04-01 22:15   좋아요 0 | URL
레와님이 계신 남쪽은 봄소식이 이르겠네요. 꽃구경 가고파요.^^

웽스북스 2009-03-26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허허거리는 고수와 함께 살고 계신 것 같아요 울 깐따님

깐따삐야 2009-04-01 22:15   좋아요 0 | URL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어요. 흠흠.2

2009-03-26 09: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01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