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하던 방학이건만 올해 여름방학은 1정 연수에 내주었다. 날마다 강의실에 앉아 여덟 시간씩 연수를 받으려니 바깥 날씨가 어떠한지 모를 정도다. 학교를 나설 때면 머리는 이미 과부하 상태. 숱한 과제와 발표에 치여 다들 빛을 잃은 듯 지내지만 교사 특유의 성실성의 발로일까. 불과 몇 시간 전에 교수가 툭 던져준 프로젝트도 용케 잘들 해낸다. 어떤 연수든 한 가지 이상은 건질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멤버들의 무서운 과제 수행 능력에 기함하는 중이다. 한 달 남짓의 연수 프로그램으로 급수와 호봉이 달라진다는 것이 멋쩍기는 하지만 좀 덜 멋쩍어지기 위해서라도 남은 기간, 열심히 해야겠다.

  남편의 생일. 둘 다 출근해야 하는 바쁜 아침이지만 소박하게나마 생일상을 차렸다. 미역국을 끓이고 엄마가 해주신 나물들을 올리고 저녁에는 재운 고기를 팬에 볶고... 가게에서 한참을 고르고 골라 케익과 샴페인도 샀다. 민망하지만 촛불을 켜고 노래도 불러줬다. 뚜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쑥스러운 게다. 일찍 독립한 남자이다 보니 그럴 만도. 뚜한 표정이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시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오자 뭐도 먹고 뭐도 먹고 자랑을 한다. 나는 이따금 나보다 연상인 그에게 웃어른이 그러시면 못 쓴다고 농담을 하지만 남자는 평생 아이 같다.

  길치에 기계치인 E가 얼마 전부터 운전을 시작했다. 방학 동안 대학원에 다녀야 하니 여러 가지 여건 상 더 미룰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예상대로 심각한 자아비판을 시작했다. 엊그제 피자를 우적거리며 말하기를, 나는 남들처럼 운전도 못하고, 남들처럼 연애도 못하고, 남들처럼 사근사근하지도 못하고... 왜 이렇게 못하는 게 많은 거야! 나도 그랬었다. 운전을 시작하면 별별 자학은 당연히 따라오는 수순이다. 오늘 만난 E는 아버지 차를 따라온 게 아니라 혼자 몰고 왔다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세미나에 치여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그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안색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주차의 곤란함에 대해서도 한참을 떠들었다. 그나저나 주유소에서 기름 넣는 것은 배웠나 모르겠네.

  연수 멤버 중에 대학 선후배, 동기들도 많다. 서른 즈음해서 다시 만난 우리는 서로 살아가는 얘기를 하며 의견 또한 분분하다. 매사 까칠했던 Y는 계속 이중고, 삼중고를 겪으며 영어교사로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거냐고 반문하고, J는 그래도 아직 젊은데 재밌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선배 언니들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내게 밥을 하지 말라는 뼈 있는 조언을 해주었다. Y의 푸념도 공감하는 사실이고, J의 말처럼 그래도 유의미한 즐거움을 찾으려고 애는 써봐야 하는 게 인생이고, 언니들의 조언처럼 좀 널널하게 살아볼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도 당장 코앞으로 닥친 시험과 프리젠테이션부터 준비해야 하는 게 나의 일상이다. 방학 없는 방학이라니. 아이들 말로, 완전 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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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5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26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27 2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30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9-07-25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글보고도 웃었는데 태그에 푸하하하~
역시 태그 패밀리다운 저력이~~~ㅋㅋㅋ

알콩달콩 신혼을 즐길 짬도 없이 만날 공부에 치여사는 깐따님
그래도 생일상도 차리고 촛불켜고 노래까지 불러줬으니 됐군요.^^

깐따삐야 2009-07-26 21:55   좋아요 0 | URL
다들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눈에 불을 켜고 열심히 하는 분위기라서 긴장의 연속이랍니다. 에궁.

남편도 보충수업으로 바쁜데 실은 연수 핑계로 요즘 좀 부려먹고 있는 중이에요. 당연한 건데도 먼저 저녁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으면 괜히 미안해지고. 이러지 말아야겠죠? ^^

개츠비 2009-07-26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학도 없이 정진하고 계시군요...깐따삐야님을 보며 저도 힘을 얻습니다. 끝없는 정진, 30대가 세상을 헤쳐나가는 비법같은게 아닐까해요. 오랜만의 글 반가웠습니다. ^^

깐따삐야 2009-07-26 22:01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여전히 사는 게 서투른 삼십대이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는 것 같아요. 님 말씀처럼 배우고, 돌아보고, 살면서 끝없이 정진하는 것 밖에는.^^

레와 2009-07-27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반갑잖아요, 깐따삐야님!! ^^


깐따삐야 2009-07-30 21:04   좋아요 0 | URL
방학이 방학이 아니니...ㅠㅠ 저도 반가워요, 레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