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개교기념일에는 학교에 가지 않는다. 나만 노는 날. 남편을 보챘다. 점심 때 나한테 초밥을 안 사줄 테냐고. 후환이 두려웠는지 선뜻 그러겠단다. 결국 시내로 나가 초밥을 먹고 연애시절마냥 피스타치오, 엄마는외계인 등을 섞어 아이스크림도 냠냠. 차창 밖의 옷차림들은 뒤죽박죽이었다. 나 역시 청바지에 얇은 분홍색 티셔츠를 입었으나 도톰한 점퍼로 무장한 상태. 쨍하니 맑은 햇볕 사이로 파고드는 찬바람. 봄이 오락가락 주춤거리며 오는 중이었다.

  할랑한 오후를 시기하는 그를 먼저 들여보내고 오랜만에 혼자 서점엘 갔다. 이 도시에는 마음에 드는 서점이 없다. 이 도시의 서점들을 다 가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진 그렇다. 대학 시절, 정문 근처에 ‘열린 지성’이라는 서점이 있었다. 주인아저씨가 지적이었고 서점은 깨끗했고 책도 고르게 많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졸업하기 전에 문을 닫았고 그 자리에는 편의점이 들어섰다. 원체 술집과 음식점이 즐비한 골목 가운데 열린 지성은 이물스러웠다. 난 그곳에서 앤서니 기든스와 카잔차키스를 샀다.

  그나마 시내에서 가장 큰 서점이라고는 하는데 이 서점은 당최 책의 배열에 일관성이 없다. 오직 직원들의 푸른 줄무늬 셔츠만 일관될 뿐. 오늘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멸』이 역사 관련 서적들과 나란히 꽂혀 있었다.『라쇼몽』을 살까, 하다가 그래도 봄인데『점섬뎐』이 나을 것 같았다. 며칠 전 그녀의 타계 소식을 들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나는 예전부터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의 책과 그림을 보며 김점선 같은 어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종종 생긴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지 싶다가도 그래도 나는 선생인데, 싶어서 가책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그러고도 망각의 존재인지라 또 상처를 주고, 받는다. 내가 여전히 어른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반드시 짚고 넘어야 할 것과 그냥 지나쳐도 좋을 것을 그때그때 현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한 소소한 성찰조차 허락하지 않는 분주한 일상에 한숨을 짓다가도 바쁨이 곧 핑계가 될까, 스스로를 긴장시킨다.

  어젯밤엔 눈까지 내렸는데 도청 앞에는 목련과 매화가 활짝 피어 있었다. 마치 뿔난 내 마음이 풀리기도 전, 얼굴에 함박웃음 지으며 다가오는 아이들 같았다. 그 꽃잎처럼 환하고 귀여운 웃음이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새봄을 부르는 것이겠지. 그들 앞에 항상 당당해야 하면서도 겸손해야 할 이유를 알 것 같다. 당신은 사랑을 많이는 아는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아. 그래서 스스로 그렇게 힘들어 하는가봐요. 어제 남편이 그런 말을 했다. 흠칫 놀라지만 말고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다. 나를 잘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는, 대체 언제 어디서 컨닝을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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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03-25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은 사랑을 많이는 아는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아. 그래서 스스로 그렇게 힘들어 하는가봐요. 어제 남편이 그런 말을 했다. 흠칫 놀라지만 말고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다"

자자 이제 역전당하신겁니다 깐따삐야님..^^

깐따삐야 2009-04-01 22:14   좋아요 0 | URL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군요. 흠흠.-_-

레와 2009-03-25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긴 목련이 다 떨어지고 벚꽃이 방울방울 피고 있답니다. ^^



깐따삐야 2009-04-01 22:15   좋아요 0 | URL
레와님이 계신 남쪽은 봄소식이 이르겠네요. 꽃구경 가고파요.^^

웽스북스 2009-03-26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허허거리는 고수와 함께 살고 계신 것 같아요 울 깐따님

깐따삐야 2009-04-01 22:15   좋아요 0 | URL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어요. 흠흠.2

2009-03-26 09: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01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