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선수도 있잖아. 특출하지는 않은데 꾸준한 선수들. 어느 경기에서든 몇 퍼센트 이상 자기 역할 성실히 해내는 선수들. 난 그런 선수가 되고 싶어요. 어느 날은 골대를 잡아먹을 듯이 현란하게 뛰고 다른 어느 날은 모니터 속으로 돌을 던지고 싶을 만큼 형편없고... 나는 그렇게 기복이 심한, 믿을 수 없는 선수 같아요.”

  남편의 깊어진 눈동자와 마주하는 날이 있다. 내가 동굴로 숨어드는 날. 아침을 잘 차려먹고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서 그러다 문득, “나 밖에 좀 나갔다 올게요.” 남편은 어디를 가냐고 했고 나는 친정에를 간다고 했다. 가는 도중에 서점에 들러 최승자의 새로 나온 시집을 샀고 무슨 변덕인지 초콜릿이 가득 묻은 아이스크림도 샀다. 다 도착했을 즈음, 공중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엄마 목소리. 엄마가 베란다에 나와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엄마, 내가 오는 걸 어떻게 알았어?” “응, 빨래 널다가 본거야.”

  그 날 하루 종일 엄마와 수다를 떨고 고기도 구워먹고 잔치국수도 끓여먹고 엄마가 대추와 마른고추를 채 썰어 너는 모습도 지켜보며, 그렇게 빈둥빈둥, 시간을 보냈다. 오후에 남편한테서 전화가 왔고 나는 좀 더 이따가 데리러 오면 좋겠다고 했다. “실은 아침에 전화 왔었어.” “뭐라고?” 남편은 내가 친정에 간다고, 무척 우울해 하는데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고, 장모님이 잘 좀 보살펴 달라고 했단다.

  얼마 후, 나를 데리러 온 남편의 얼굴이 아침보다 한 뼘은 더 핼쑥해진 것 같았다. 엄마는 내게 그만 좀 징징거리라고 했고 나는 순순히 남편을 따라 나섰다. 집에 가는 동안 그는 별 말이 없었고 나는 집에 도착해 엄마가 해주신 음식들을 풀어놓으며 저녁부터 차렸다. “얼굴이 왜 그래요? 갑자기 눈이 더 처진 것 같애.” “아까 낮잠을 자서 그런가.” 그는 묵묵히, 맛있게 밥 한 그릇을 비웠다. 나도 없는데 이것저것 반찬을 꺼내놓고 제대로 점심을 차려 먹었을 리 만무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눈빛은 밥을 먹는 동안에도 여전했다.

  다음 날, 연수원에서 시험을 마치고 온 그가 모처럼 저녁을 밖에 나가서 먹자고 했다. “그래요. 시험 끝났다고 술도 못 사주는데 간만에 외식할까.” 장소는 파마산 돈까스로 유명한 모교 중문의 레스토랑. 주차할 곳을 궁리하다가 여름에 연수 받을 때 들고 다니던 가방을 뒤져보니 옳거니, 주차권이 한 장 나온다.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단과대 뒤편에 차를 세워놓고 보송보송한 후배들을 지나치며 조금 걸었다. 학부 시절의 몇 가지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신축된 강의동, 못 보던 술집들을 힐끔거리며.

  그는 돈까스를, 나는 스파게티를 시켰다. 샐러드 바가 생기면서 본 메뉴가 시원찮아졌고 리모델링을 했다는데 스파게티 전문점인 쏘렌토와 거의 다를 바가 없더라는. 그나저나 하루가 지났는데도 남편의 깊고 처진 눈은 그대로였고 나는 그의 눈초리가 올라갔으면 하는 바람에서 별 것도 아닌 이야기에 박장대소를 하며 오버를 했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 둘을 엮어준 장본인인 J의 근황을 이야기하며 그가 정말 잘되기를 바랐다.

  밖으로 나오니 저녁 바람이 꽤 찼다. 주차장까지 걸어가던 길, 잘 안 벌어지는 입을 옹송거리며 위의 운동선수 이야기를 했다. 남편은 진심인지, 위로인지,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도 자신처럼 사시사철 잔잔한 것보다는 나처럼 다채로운 감정을 가진 엄마가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 “글쎄, 엄마는 모름지기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나도 나를 어쩌지 못할 때가 있으니.” “당신은 아직 젊어서 그런 거예요.” 그는 금세 나이 들어 버린 노인처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래 전부터 꾸준한 사람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사람들이 행여 나를 그런 사람으로 착각하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자괴감 때문에 부끄러운 적도 많았다. 나는 미련할 정도로 고집스러운 사람이기는 해도 매사 한결같은 꾸준한 사람은 못 된다. 고집은 그저 그 사람만의 성미에 불과하지만 꾸준함은 다르다. 인내와 약속, 책임 등 많은 것들이 뒤따르는 고급한 미덕이다. 그저 고집스러울 뿐인 나는 주변의 꾸준한 사람들의 덕을 보며 산다. 그들은 고집과 변덕으로 시시때때로 생떼를 부리는 나를 큰 산과 같은 묵직한 꾸준함으로 받아준다. 아무리 잘난 척을 해봤자 그들의 수고로움 앞에서는 나는 그저 아직 어리거나 젊은, 어떤 상황에서는 결국 자기 하나밖에 볼 줄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일 뿐이다.

  학창시절에는 공부하는 테크닉을 익히고, 사회에 나와서는 능력 있는 교사가 되기 위해 새로운 테크닉을 궁리하고, 결혼해서는 갖가지 살림 테크닉을 배우고... 언뜻 보면 상당히 부지런히 살아온 것 같지만 그러한 자잘한 테크닉을 넘어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는 여전히 미숙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문득 스쳐 지나는 잔상에 몰입한다든지, 감정의 결을 건드리는 사소한 자극에 휘둘린다든지, 과거나 미래의 시간에 스스로를 두고 온다든지, 그럴 때마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주변 사람을 미궁에 빠뜨리는 안하무인의 습성. 그런 나를 마주하는 날이면 스스로가 가증스럽다.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좀 전까지 꾸준함을 가장한 채 연극이라도 했던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엄마 말씀처럼 잠깐인 듯싶다가도 멀미날 듯 긴 것이 삶이다. 별로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꾸준함 밖에는 삶과 대적할 뾰족한 도리가 없는 것 같다. 반짝이는 매력들에 눈과 마음을 뺏기느라 그 묵묵한 미덕을 닦는 데에 너무 소홀했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남편과 나는 우리 주변의 한결같은 이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누구를 비판하고 싶어질 때는 말이지," 하고 아버지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네가 누리고 있는 만큼 그렇게 유리한 처지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위대한 개츠비』中 그처럼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나를 향해 한결 같은 마음을 보여주곤 했다. 나는 다른 그 어떤 테크닉보다도 그 인정과 여유를 배워야 한다. 위대해지기 위해서라기보다 조금 덜 미안해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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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1-28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군요.(닥쵸!)=3=3=3=3

깐따삐야 2010-01-29 10:10   좋아요 0 | URL
앗, 그런가요? 꾸준히 약올리기의 달인.ㅋㅋ ^^

Mephistopheles 2010-01-29 10:22   좋아요 0 | URL
그것도 정말 힘든 일입니다..으쓱!=3=3=3=3

레와 2010-01-28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

깐따삐야 2010-01-29 10:10   좋아요 0 | URL
^^

2010-02-02 1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03 15: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방학을 하면 동기들끼리 시간을 맞춰 얼굴을 보곤 했었는데 누군가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연애를 하고, 먼 도시로 학교를 옮기고, 그러다보니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하루 종일 자리를 옮겨가며 논다던가, 밤늦게 술을 한잔 한다던가, 하는 일이 드물어지면서 서너 명 쯤 단출하게 모이는 풍경이 더 잦아졌다. 그래도 말로 벌어먹고 사는 직업인지라 서너 명이 모여도 군부대 하나 지나가는 것만큼 천정이 흔들흔들, 방구들이 들썩들썩 한다.

  어제는 보충수업을 끝낸 K와 유럽에 다녀온 S가 놀러 왔었다. 임신한 친구가 입에 거미줄 칠까봐 걱정됐는지 오후 내내 쉴 새 없이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번에는 남편도 연수를 가고 김밥을 쌀 여력이 못 되어서 엄마가 빚어주신 만두로 만둣국을 끓였다. 마침 비가 온 뒤라 그런지 참 맛있게도 먹었다. 원래 결혼하면 누가 차려준 밥상이 가장 맛있는 법이다.

  K는 친한 동기들 중에서 가장 먼저 결혼을 했다. 나는 K의 남편한테 끝내주는 곱창을 얻어먹고는 무한지지를 보냈었지만 그녀가 청첩장을 주었을 때 아주 잠깐, 울적한 기분이 들었었다. 이것저것 잘 챙겨주던 언니가 나를 떼어놓고 시집가는 느낌. K는 그 같은 성품답게 성실한 아내, 수더분한 며느리, 씩씩한 엄마로 잘 살고 있다. 느지막이 종손을 안아보는 기쁨이 컸는지 도우미 할머니가 있는데도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드는 시부모님들 때문에 처음에는 스트레스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고. 출산 후에 부지런히 관리를 잘했는지 피부나 몸매도 거의 그대로였다. 다만 건강에 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별 것 아니겠지만 나 같으면 이 사람 저 사람 들볶으며 난리법석을 피우고 있을 텐데 워낙에 느긋한 성격이라 그런지 정밀검사 받아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웃으며 한다. 그런 의젓함이 놀라우면서도 안타까웠다.

  S는 동갑내기 남자와 연애 중이다. 낌새는 있었지만 긴가민가했었는데 전화 받는 폼을 보니 연애 기류가 짜릿짜릿. 남자는 S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헌신을 다하고 있었고 S는 엄마가 반대하면 안 만나, 원칙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다. 본인은 극구 부인하지만 국내 최고학부를 나온 데다 자상하기까지 한 오빠와 형부가 있다 보니 웬만한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S의 자신감이나 신중함은 거북스러운 그 무엇이 아니라 그녀의 순진한 귀여움과 잘 맞물려 기분 좋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때가 많다. 나는 내가 말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말 많은 남자는 질색인데 얘는 말이 없는데도 재밌어서 좋아. 이 대목에서 딱이구나, 싶었다. 동갑이니까 친구처럼 편하게 만나보면 되겠다고 했는데, 모르겠다. 남자 성품을 보아하니 깨나 진득해서 어쩌면 올 가을 쯤 좋은 소식이 들릴지도.

  K는 그밖에도 담임 학급에 한부모 가정이 삼분의 일이나 된다며 생활지도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본인이 엄마가 되고 나서 그 아이들이 보이는 특이행동을 더욱 눈여겨보게 되었을 것이다. 나도 임신 소식을 듣고 학교에 나갔을 때는 아이들 눈 두 개, 손가락 다섯 개까지 모두 소중하고 다르게 보였는데 어느 엄마가 그렇지 않으랴마는 팍팍한 세상에서 가정을 지키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은가 보다. 당연하게 여겨지던 모성이나 부성이 언젠가부터 시대착오적인 고루한 심성처럼 인식되면서 부모들이 각자 ‘나’를 주장하게 된 사이, 아이들이 내팽개쳐진 경우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아무리 훌륭한 양육자라고 하더라도, 부모의 자리를 완벽히 대체하기는 힘들다. 어른들 말씀대로 요즘은 가족 구성원이 있을 자리에 온전히 다 있는 것도 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연애를 아무리 오래 해도 막상 그 남자가 남편이 되고 가족이 되면 다른 느낌 같은 게 있어. 임신 기간 동안 정말 좋았다는 말에는 공감할 수 없었지만 이 대목은 알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아침에 나갔던 남편이 오후에 삐비비빅, 자기 마음대로 비밀번호를 누르며 불쑥 들어온다던가, 하루 종일 집안 여기저기 나와 같은 공간을 쓴다던가, 하는 일이 낯설 때가 많다. 이렇게 평생 같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내가 이런 것도 예상을 못하고 결혼하다니, 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질 때도 있다. K는 객지생활에 물려 있었고 결혼과 동시에 새로운 가족이 생기고 자리를 잡은 경우이지만 나는 타향이긴 해도 부모님이 곁에 계셨기에 오히려 결혼 전이 생활면에서는 더 편리한 점이 많았더랬다. 하지만 뭔가 나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결혼이란 걸 했고 만나고 싶을 때만 만나던 연인이 남편이 되고 보니 어디서 내 인생 속으로 뚝, 떨어진 것 같은 이 남자와 어느새 남매나 오누이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알고 보면 생판 남남이지만 함께 걷는 동지애로 뭉친 사이. ‘나’를 위해 ‘너’를 돌볼 수밖에 없는 기묘한 관계. 이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영상은 대형 스크린의 로맨틱 무비라기보다는 8미리의 홈 무비에 더 가깝다.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다고 툴툴거리는 K와 나를, 미혼인 S는 부러워도 했다가, 도리도리 했다가, 마구 헷갈려 하다가 돌아갔다. 결혼 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도우미 할머니를 집에 보내드려야 하는 K와 퇴근할 남편이 있는 나 때문에 이번 만남이 너무 짧고 아쉬운 듯해서 조만간 누구도 부르고, 누구도 불러서 다함께 보자고 기약했다. 몸이고 마음이고 부디 아프지 말아야 할 텐데. K가 얼른 회복하고 S도 연애 전선 이상 없기를. 날씨도 꿀꿀했는데 친구들 덕분에 좋은 에너지를 많이 얻었다. 매사 칭얼대는 일 없이 듬직한 K, 사랑스러운 언어와 밝은 기운으로 주변에 빛을 주는 S, 벌써 함께 한 세월이 십년이 넘었지만 변함없는 그 다정함이 새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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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0-01-21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기운이 여기까지 전해집니다~


급작스럽게 유쾌하지 않은 동행으로 퇴근길이 걱정되어 다운되었는데,
깐따삐야님 페이퍼를 읽고 기분이 나아졌어요.
응, 괜찮을거예요. ^^


깐따삐야 2010-01-22 19:41   좋아요 0 | URL
레와님, 괜찮으신 거죠? 날씨가 다시 또 추워졌어요.
훈훈한 생각으로 항상 따순 마음 유지하시길.^^

2010-01-21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2 1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0-01-22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님의 친구분들은 깐따님을 닮아 다들 미모가 출중한가봐요.
(적절한 아부는 출산에 크나 큰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깐따삐야 2010-01-23 11:38   좋아요 0 | URL
요즘은 다들 워낙에 관리들을 잘해서 아기를 낳고 오히려 더 예뻐지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자극 받습니다. 벌써부터.ㅠ
(우리 남편한테 좀 알려주세요.)
 

  날씨가 풀린 주말 오후, 친구들이 다녀갔다. 밖에서 만나기에는 무거운 내 몸이 민폐인지라 집으로 오라고 했다. 김밥도 싸고 찐빵도 찌고. 자취하는 친구가 오기에 뭘 시켜먹기도 그래서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목하 열애 중인 H는 어째 더 앙상해진 것 같았고 귀차니즘을 달고 사는 E는 차를 뽑은 후 세차는 한 번도 안했으면서 앞머리를 내리고 매니큐어도 하고 나름 더 어려졌다.

  H는 첫사랑과 연애하는 요즘이 꿈만 같다고 했다. 판도라의 아바타처럼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 나는 먼저 시집 간 언니가 노파심을 부리듯 몇 가지 우려를 드러내면서도 사랑에 빠진 H의 눈빛을 보니 입을 다물게 되었다. 과거를 확인하는 그 남자는 교활했지만 H는 이미 판단력을 잃은 상태였다. 그래, 나중에 잘 살면 되니까. 나로서는 모든 것을 천천히 생각하기를, 몸이 안 좋아진 것 같단 이야기에 짬을 내서 병원에 꼭 가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H는 가족과 떨어져 오랫동안 자취를 해왔고 그만큼 혼자 사는 일에 지쳤거나 물려버린 것 같았다. 결혼하면 아이도 셋이나 낳을 거란다. H는 본래 성품도 그렇지만 오랜 외로움 때문에라도 웬만큼 괜찮은 시집을 만나면 정말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착한 며느리가 될 것 같다.

  E는 요즘 아버지로부터 하숙생이라고 불린다고. 집안에서 마주치면 야, 하숙생! 그러신단다. 제 방에 틀어박혀 책 보다, 인터넷 서핑하다, 잠시잠깐 방 밖으로 얼굴을 비추니 그럴 만도. 엄마는 아예 나가라고 하신단다. 하지만 독립할 자신도, 결혼할 생각도 없단다. 독립을 하기에는 기회비용이 많이 들고 결혼은 필요성을 못 느끼고. 그렇게 확고한데도 우리 나이가 그런 건지 무언의 압박 같은 것을 피할 수는 없다고. E는 그런 애매와 불안 사이의 무료함을 쇼핑으로 달래고 있었다. 너희는 백만 원이 생기면 뭘 할 거니? 여행을 갈까, 가방을 살까. 대학원 교수님이 삶의 넓이를 알고 싶으면 ‘삼국지’를 읽고, 삶의 깊이를 알고 싶으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어보라고 했다면서 내게서는 정이현의 책을 빌려갔다. ‘추노’ 재방송을 보면서는 입을 못 다물었다. 짐승남들의 초콜릿 복근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나, 이제부터 저 드라마 봐야겠다, 한다. 얘는 남들 모두 뱀파이어 에드워드에 꽂힐 때 혼자 늑대인간에 꽂혀서 난리다. 으이구, 지지배.

  친구들은 내가 결혼한 후로 이구동성으로 너무 비관적이 됐다고 한다. 씩씩하긴 해도 별로 낙천적인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더 비관적이 되었다니, 그저 약간 더 현실적이 된 것 뿐인데 아가씨들 눈에는 좀 각박해 보였는가 보다. 나는 결혼했지만 굳이 결혼하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을 여전히 하고 있고 남편이나 결혼생활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해주곤 하는데 결혼한 지 일 년 남짓 된 새댁치고는 너무 건조했나 보다. 그냥 너희들 상상만큼 장밋빛이 아니라는 말인데 자꾸 결혼하라고 부추기지는 못할망정 은근히 혼자 살 것을 종용이라도 하고 있단 말인가. 나야 친구들이 유부녀가 되면 공감대와 이야깃거리가 늘어나니 좋지만 나 안 심심하자고 일생일대의 큰 변화를 마구잡이로 부추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더욱이 매사 적응이 빠른 H라면 모를까, E는 결혼하면 나만큼이나 엄청 툭닥거리며 살 것 같아 쉽사리 권할 수도 없다.

  유럽에 갔다는 S와 육아에 바쁜 K는 오지 못했는데 다 같이 모인데도 좀 묘한 관계망에 얽혀 있기는 하다. 대학 시절 내내 동아리다 뭐다 외도를 많이 했던 나는 그래서인지 오히려 두루두루 친한 편인데 좁은 과 내에서 나 모르는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는가 보다. 예전엔 소문만 듣고 같이 흥분한 적도 있었지만 그새 세월이 많이 흘렀고 그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일을 겪다 보니 지난 시절의 동동거림이 생경할 지경이다. 내 삶은 그때만큼 뜨겁고 흥미진진하지 않지만 그 동안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조금이라도 더 깊어지거나 넓어졌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내 근본마저 두루뭉술해질 것 같지는 않지만 이제는 각 세우며 나 자신을 내던지는 일에 자신이 없어졌다. 점점 그렇게 되어버렸다.

  E는 미안했는지 다음에는 몸도 무거운데 그냥 시켜먹자고 말한다. 그래도 핑계 김에 오랜만에 남편과 김밥을 말면서 즐거웠다. 그는 친구들이 올 시간에 맞춰 도시락까지 예쁘게 싸서 자취하는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 친정엄마한테도 갖다 드렸더니 사위한테 손수 싼 김밥을 다 얻어먹는다고, 나중에 소풍 도시락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며 감탄하신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인 것이 결혼이라지만 그런 몇몇 순간들 때문에 살게 되는 것 같다. 비관적인 유부녀도 그래서 종종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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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7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8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8 1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9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0-01-17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밥에 우엉조림을 넣으면 감칠맛 납니다. 냉중에 한번 시도해보시길...^^

깐따삐야 2010-01-18 11:5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지난번엔 당근을 안 넣고 우엉조림을 넣었어요. 이번에는 오이도 들어가고 해서 뺐죠.^^

조선인 2010-01-18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우엉조림 한 표. 그나저나 정말 정갈해보고 얌전한 말음새입니다. 부러운데요?

깐따삐야 2010-01-18 11:53   좋아요 0 | URL
남자라서 그런지 꽉꽉 잘 말더라구요. 무려 스무 줄을 쌌는데도 안 징징거리고. 참말로 무던한 남자이긴 해요.

무스탕 2010-01-18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위가 싼 김밥 드시는 장모님은 정말 기분 좋으셨을거에요 ^^

울 동네 김밥집도 김밥에 우엉조림을 넣어요 :)

깐따삐야 2010-01-18 11:56   좋아요 0 | URL
제가 집에서 싼 엄마표 김밥을 정말 좋아라 하는데 남편이 비슷하게 흉내를 낼 줄 알아서 다행이죠. 엄마한테 늘 얻어다먹기만 하는데 가끔씩 싸다 드려야겠어요.^^

레와 2010-01-18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뻐요! ^^

깐따삐야 2010-01-19 09:27   좋아요 0 | URL
^^
 


열대우림 외곽에 위치한 사바나 기후는 독특한 건기가 특징. 수개월간 비 한방울 없이 계속되는 건기 동안 사바나의 생물들은 고통스러운 생존의 분투를 거듭한다. 가뭄과 불에도 죽지 않는 강인한 초지를 기반으로 수많은 야생 동물들이 번성하는 '야생의 천국'인 동시에, 혹독한 적자생존의 장이기도 하다. 이곳은 또한 고대 인류의 원시 문명이 발생한 지역이기도.

건조한, 절제된, 강인한 생명력. 이는 당신의 책 취향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 죽음의 건기를 대비하는:
    죽음의 건기를 대비하는 생물처럼, 치밀한 계획 하에 쓰여진 정교한 책을 선호. 책이란 무릇 간결하고 정확한 내용이어야 함.


  • 대초원 위의 야생동물 같은:
    사바나의 고양이과 육식 동물처럼 유유자적 고상한 취향. 과격하지도, 감정적이지도, 세속적이지도 않은 나름 고상한 선택 기준을 갖고 있음. 아마도 경험이나 교육에 의한 분별력으로 추정됨.


  • 절제된 현실주의:
    멍청한 감상주의, 값싼 온정주의, 상투적 가족주의, 이런 것들로 장사하려는 상업주의를 배격함. 문화적인 보수 성향이 있음. 지나치게 독창적인 책보다는, 절제력과 품격을 갖춘 것을 더 선호함.


당신은 출판시장에서 가장 보기 드문 취향 중 하나입니다. 분명한 취향 기준이 있음에도 워낙 점잖은 탓에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당신의 취향은 다음과 같은 작가들에게 끌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움베르트 에코
로마의 원형 경기장 시절부터, 인류는 줄곧 잔인한 구경거리를 좋아했다. 이런 소름 끼치는 고문에 대한 최초의 묘사 중 하나는 오비디우스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그는 아폴론이 한 음악 경연에서 사티로스인 마르시아스를 패배시킨 후 산 채로 그의 가죽을 벗겼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실러는 소름 끼치는 것에 대한 이 "자연적 성향"을 아주 잘 정의했다. 그리고 시대를 막론하고 처형이 벌어질 때면, 사람들은 그 장면을 구경하려고 항상 흥분해서 달려갔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만약 오늘날 우리가 스스로를 "문명화"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다만 영화관에서 유혈 낭자한 "스플래터" 영화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기 때문일 텐데, 그 영화가 허구로서 제시되는 이상 관객들의 양심이 흔들릴 일은 없는 것이다.
- 추의 역사 中

김승옥
'바다가 가까이 있으니 항구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가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럴 조건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수심(水深)이 얕은데다가 그런 얕은 바다를 몇 백 리나 밖으로 나가야만 비로소 수평선이 보이는 진짜 바다다운 바다가 나오는 곳이니까요.'
'그럼 역시 농촌이군요.'
'그렇지만 이렇다 할 평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그 오륙만이 되는 인구가 어떻게들 살아가나요?'
'그러니까 그럭저럭 이란 말이 있는 게 아닙니까?'
그들은 점잖게 소리내어 웃었다
- 무진기행 中

J.D. 샐린저
"나는 특히 목사라는 인간들에게 혐오감을 느낀다. 내가 다닌 학교에는 모두 목사가 잇었는데 모두들 설교를 할 때마다 억지로 꾸민 거룩한 목소리를 냈다. 나는 그것이 역겨웠다. 그들은 자연스러운 목소리를 내면 품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억지 소리를 내는 것이 더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설교가 모두 거짓으로 들린다는 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 호밀밭의 파수꾼 中
 

오, 그런가? 

움베르트 에코는 감히 존경만 하는 작가이고, 김승옥의 단편들은 지금도 국문학상 단연 최고라고 생각한다. 나는 <환상수첩> 같은 설익은 작품을 좋아했다. 샐린저의 다른 책은 읽지 않았지만 <호밀밭의 파수꾼>은 사춘기 무렵, 마치 내 뒤통수를 후려치는 느낌이었다. 지금은? 홀든도, 나도 참 어렸다는 생각. 그나저나 테스트 내용과 끌리는 작가가 제대로 상관관계가 있기는 한건가?

테스트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니 내가 참 재미없고 보수적인 독자 같다. 건조한, 절제된, 강인한...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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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1-13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동족하나 추가요!

깐따삐야 2010-01-14 09:08   좋아요 0 | URL
알라딘 마을엔 사바나 취향이 참 많은가 봐요.^^

마늘빵 2010-01-13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툰드라 사막 지대지만, 샐린저를 좋아해요. 투덜이 홀든은 정말 귀엽다니까.

깐따삐야 2010-01-14 09:10   좋아요 0 | URL
우리 남편도 툰드라 사막 취향 나왔어요. 막 놀렸는데.ㅋㅋ 지금의 삼십대들도 홀든이었던 시절이 있었죠.^^
 

  누군가에 대해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이 가장 많은 돈을 쓰는 쇼핑 품목을 보면 된다는 말이 있다. 책 위에 앉아있는 먼지들을 털어내고 묵은 옷가지들을 정리하고 나한테 이런 것도 있었나, 하는 크고 작은 물품들을 정리하면서 저 말을 떠올렸다. 그러나 열혈 독서가라기에는 지식과 상상력이 너무 빈천하고 패셔니스타라기에는 내 옷장의 옷들은 유행과는 거리가 멀다. 그 외에 내가 꾸준히 사들이는 품목이 있었던가. 한때는 음반에 미쳐 있었고 예쁜 가방, 머그잔에 꽂힌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나마 기복 없이 사들이던 책도 아주 띄엄띄엄, 생각과 생각을 거듭해 구입하곤 한다.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이 짐처럼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혼할 때 온 식구들을 동원해서 내가 읽어온, 아니 쌓아온 책들을 신혼집으로 옮겼었다. 내가 책을 빼서 내려놓으면 아빠와 엄마가 층층이 쌓인 책들을 묶었다. 이런 책은 왜 가져가니. 다시 읽지도 않을 텐데. 엄마는 할랑한 에세이집이나 케케묵은 소설책 등을 가리키며 혀를 차셨다. 내가 좋아했던 작가 책이라서 버릴 수가 없어. 하지만 지금 책장을 칸칸이 차지하고 있는 그 책들을 보면 어쩐지 안쓰럽고 우울해진다. 엄마의 예상처럼 한 번도 다시 펼쳐보지 않았고 남편 또한 관심을 보이지 않기에 마치 데리고 온 자식 같은 느낌. 하지만 감흥은 덜할지언정 애정마저 변한 것은 아니다. 그래, 내 성장의 이력이야. 그래도 언젠가 애지중지하던 추억의 활자들이 지퍼로 입을 닫은 봉제인형처럼 외롭고 슬퍼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일찍이 누군가에게 주어버렸거나, 잃어버렸거나, 두고 왔다면 적어도 주인의 무심함에 잊혀져가는 짐처럼 보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언젠가 다시 입으리라 기대는 하고 있지만 허리선이 없어진 요즘 임신 전에 입던 옷들이 남의 옷처럼 보인다. 그 남의 옷처럼 보이는 옷가지들 중 다시는 입지 않을 것 같은 옷을 수거함에 버렸다. 안목이 형편없는 것인지, 당시에 무슨 바람이 들어 샀는지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요즘은 배를 감싸주는 편안한 임부복만 주구장창 입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입게 되는 것만 입는다. 내 성향이 본래 이런 것 같다. 여러 벌을 가지고 바꿔 입기보다는 마음에 드는 옷 몇 가지를 계속 입는 식. 그런데도 옷장을 쭉 둘러보면 옷이 여전히 많은 것 같다. 다시 입지도 않을뿐더러, 어쩌면 다음 쇼핑에도 방해가 되는, 이 또한 짐이다.

  그밖에도 정리하다 보니 펜과 포스트잇은 갖가지 색상별로 왜 이렇게 많고 샘플로 받은 화장품이며 기념품이나 증정용으로 받은 컵은 참 다양하기도 하더라는. 막상 내가 애용하는 것들은 0.7 포인트의 평범한 볼펜과 HB 연필, 기초화장품 두어 개, 알라딘 머그컵인데 말이다. 필요해서 갖고 있기보다는 버리지 못해 하나, 둘 쟁여둔 것들. 새해가 되어 휴대폰에 저장된 전화번호 목록도 정리를 했는데 어제 저녁 대학원 후배한테 오랜만에 연락이 왔을 때 하마터면 누구세요, 할 뻔 했다. 연락처 정리는 이따금 그런 미안한 후유증을 남기기도 한다. 대개는 삭제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멀어지는 경우가 더 많지만.

  아기를 갖고 나서 잠도 많아지고 그에 비례하는 것인지 이런저런 꿈을 많이 꾸는데 내가 움켜쥐고 사는 기억이 참 숱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비가시적인 영역에서조차 나는 무엇 하나 깔끔하게 버릴 줄을 모르는가 보다. 내게 상처를 주었던 이들과 재회해 얼굴을 붉혀가며 싸우기도 하고 학창시절로 돌아가 놓쳐버린 버스, 잃어버린 신발, 열리지 않는 사물함, 다 풀지 못한 시험지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뒤척이다 깨어보면 몸을 꽁꽁 웅크리고 이불 끄트머리를 꼭 쥔 채 힘들어하고 있다. 꿈이라서 다행이야, 안도하다가도 현실처럼 세세하게 펼쳐지는 옛 풍경들에 비만한 나의 기억 창고를 몽땅 털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나와, 뒷목덜미를 잡고 나를 붙잡으려는 내가 꿈속에서, 무의식의 시공간을 누비며 잠든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남편은 매사 선명하고 논리적인 내가 부럽다고 하면서도 그 이면에 잔걱정, 잔망스러움이 그득한 모순적인 모습을 파악하고는 나를 가리켜 갈팡질팡하다가 아무 것도 못하게 되는 인간 유형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종교적인 인간이 되기에는 회의와 의심이 많고 철학적인 인간으로 살기에는 종종 비논리적인 것에 휘둘리는. 나 자신도 알고 있었지만, 꽤 적확한 지적이다.

  그래서인지 좀 덜 연연하며 살았으면 싶다. 물리적인 것이든, 그 이외의 것이든, 이제껏 바쁘게 쌓아올리고 모아온 것들이 시시때때로 짐스럽게 느껴진다. 혈혈단신이 아니기에 속세의 속성을 아예 등질 수야 없겠지만 버리지 못하면 못할수록 그만큼 심신을 묶는 고리들이, 보기 좋게 정리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점점 더 늘어가는 것 같다. 개그우먼 이경실이 아침프로에 나와 그런 말을 했다. 뭔가를 계속 사들일 때가 있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마음이 참 허했던 때라고. 나도 그런 때가 있었다. 사들인 책이나 옷에서 내 정체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카드 명세서를 보면서 헛헛했던 나를, 나 자신에게 들킨 적이 있었다. 이미 오래 전 해프닝이지만 그녀의 반성에 공감했다.

  그밖에도 잊었다고 믿었던 기억이라든가, 완전히 놓아버리지 못한 꿈, 허영기 어린 계획들, 자질구레한 일상 소품들 외에도 버리고 비워야 할 것들이 참 많다. 내가 버리지 못한 것들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듯한 이 근질거리는 느낌. 반드시 갖고 가야 할, 또는 앞으로 쌓아가야 할, 소중한 것들은 예나 지금이나 몇 안 되는데 나머지 것들은 대개 군더더기이자 허욕인 셈이다. 자칫 느슨해지거나 자기합리화에 빠지지 않고도 내내 단촐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최고의 인테리어는 말끔한 청소, 최고의 사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되도록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 그렇듯 청신한 마음가짐과 생활태도로 말이다. 짐정리를 끝내고 가뿐하고 후련해진 기분, 그것 또한 내 마음이 누리는 넉넉한 호사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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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1-12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은 언제나 조곤조곤, 요란하지 않게, 그러면서도 추천을 누를 수 밖에 없는 글을 쓰시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읽다가 추천을 눌러요.
그리고 몇가지를 덧붙일까 하다 관둡니다. 제 요란한 마음에 대한 댓글을 쓰다보면, 이 페이퍼의 차분함에 스크래치를 낼 것 같아요. 방금전까지 방방 뜨는 마음이었는데, 이 글을 읽고 나니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아요. 글 내용뿐만이 아니라 분위기로도 깐따삐야님의 페이퍼는 제가 가끔 읽어줘야 할 그런 페이퍼에요.

만약 깐따삐야님이 에세이집을 내신다면, 저는 사서 여러 친구들에게 선물하겠어요.

깐따삐야 2010-01-13 11:44   좋아요 0 | URL
추천 감사합니다.^^ 저는 제 삶에서 감탄이나 환호가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고 또 아쉬운데 다락방님의 글에는 느낌표(!)가 살아있어요. 축축 늘어지기 일쑤인 제가 가끔 읽어줘야 할 페이퍼에요.

와... 적어도 세 권은 팔리겠군요! 흐흐.^^

비로그인 2010-01-12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핑이면 어지간한 스트레스는 다 풀린다는 친구가 있었어요. 책을, 옷을, 구두를, 기타 등등을 휘몰아치듯 쇼핑하는 저는 어디쯤 와있는 걸까 생각하다 이 글을 읽었습니다. 타이밍이 무서워질 지경.

전 임부복을 입은 제가 세상에서 가장 그로테스크해 보였어요. 제 모습이 늘 적응이 되지 않았던 때였던 것 같아요.

깐따삐야 2010-01-13 11:50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때가 있었고 지금도 간혹 충동적으로 질러대는 순간이 있어요. 그 묘한 충족감을 대체할만한 것이 있다면 좀 알고 싶어요.

Jude님도 그러셨구나. 정말 그렇죠? 옆모습은 더 이상해요.ㅠ 초음파를 볼 때만 잠깐 현실감이 느껴지고 대부분의 시간은 내 배가 내 배가 아닌 것 같은 느낌으로 살아요.

비로그인 2010-01-13 16:11   좋아요 0 | URL
여기저기서 들으셨겠지만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출산 후 바로 살이 빠지진 않아요. 물론 몸무게는 순간 줄어들겠지만 그 전의 체형으로 돌아오는 데에 저는 거의 1년 반은 걸린 것 같아요. 이전의 완벽한 그 실루엣은 아직, 이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은 필요한 것 같아요.

깐따삐야 2010-01-14 09:14   좋아요 0 | URL
헉! 너무 오래 걸리네요. 일년 반이라니. 과연 임신 전에 입었던 옷들을 언젠가 입을 수나 있을까요. 열심히 모유수유 해야겠어요.ㅠ

Mephistopheles 2010-01-12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페이퍼를 쓰고 있는 깐따님을 상상했어요. 불룩하니 이쁘장하게 나온 배를 젖히고 골똘히 생각하면서 키보드 치는 깐따님..^^

깐따삐야 2010-01-13 11:52   좋아요 0 | URL
불룩한 건 맞는데 과연 이쁘장하기만 할까요? ㅋㅋ 엄마가 잡념이 많아서 심란한 아이로 자랄까봐 걱정이에요.

2010-01-12 2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3 1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3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4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10-01-13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릴 걸 다 버리고 가는 건 60 정도에 하려구요. 그 전에는 할 수 있는 힘껏 최대한 짊어지고 살아보려구요. 그게 삶의 재미일 수 있고,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싶어요. 페이퍼에 안 어울리는 생뚱맞은 얘기네요. ㅎㅎ

깐따삐야 2010-01-13 12:05   좋아요 0 | URL
저는 애도 낳기 전에 벌써 조로인가 봐요. 이것저것 내다버릴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니 어째요.ㅋㅋ

레와 2010-01-13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감하게 뭔가를 버릴때 희열이 느껴집니다!! 네네!
몸무게와 상관없이 몸이 가벼워지는 .. 그런 느낌? ^^


아무리 비싼 물건을 사고 오랜시간 쇼핑을해도 허한 마음이 충족되지 않는 단계에 와 있었어요. 적어 놓고 보니 심각하네요.

깐따삐야 2010-01-14 09:22   좋아요 0 | URL
맞아요. 몸이 무거워지니 더 버리는 지도? ㅋㅋ

레와님 뿐만 아니라 특히 여자들은 그런 심각 단계가 간혹 있는 것 같아요. 후회에 몸무림치지 않으려면 조~오심 하긴 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