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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밭 걷기 ㅣ 문학동네 시인선 214
안희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6월
평점 :
#오늘의시집 #하리뷰 #시집추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굉장한 것
빛 쪽으로 한 걸음 더 내딛겠다는 의지와 다짐
시인과 함께 당근밭을 걸었다.
#당근밭걷기
#안희연
#문학동네시인선214
#문학동네

나의 밤은 나를 사랑하려는 안쓰러운 발버둥이었다. 나는 나를 미워하고 사랑하고 지겨워하고 안쓰러워하고. '지겹도록 저 자신이라는 사실을 벗고 싶어( #코트룸 )' 하면서도 '여름이 상하게 한 것은 나만은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해서(당근밭 걷기)' 상한 당신을 찾아 기웃거렸다.
시인의 시를 읽으면 슬픔과 절망이 몰려온다. 결핍의 밤이 찾아온다.
나를 찾아와줄 거라고, 나를 알아봐줄거라고 믿었던 날들이 있었다. '아무도 나를 구해주지 않아 세상이 망해버렸으면 좋겠어(구스베리 구스베리 익어가네)' 그렇게 믿기도 했다. 망해버렸으면. 그러니까 '누가 누굴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 신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네(나의 시드볼트)' 헛된 희망을 말하는 나를 비웃었다. 그러면 나는 '너무 오래는 말고 한 사나흘만 나를 좀 갖다 버렸으면 싶(토끼굴)어지고.
아침이 오면 나는 다시 살아난다. 지난 밤의 나는 사라진다. 웃으며 인사하고, 시답잖은 농담도 하고, 쓸데없는 수다도 떨고, 미운 사람 욕도 하고 무사히 하루를 보낸다. '나의 범람, 나의 복잡함을 끌어안고서(물결의 시작)'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요. '겨우, 기껏, 고작, 간신히, 가까스로....(야광운)' 그렇게 사는구나. 겨우 이렇게 버티는구나. 나는 그렇게 나를 물 속에 가두고 밤 속으로 숨어들고 핑계를 대고 포장을 하고 계속 제자리를 맴돈다.
시인은 나를 두드린다. '당신을 두드리는 것이 나의 일(북 치는 소년)이라며. 슬픔도 절망도, 아픔도 괴로움도, 상실도 결핍도 그렇게 부서지고 깨진 마음을 시인의 언어로 어루만진다. <기록기>라는 시를 읽고 울고 말았다.
**하지만 너무 오래 물속에 있는 건 좋지 않아요 이제 그만 나와 함께 뭍으로 가요 혼자 있고 싶은 거라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오두막을 지어줄게요
뭍에도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있어요 곧 가로등에 불이 켜질 시간이에요
그만 깨어나주세요
자꾸 그렇게 자신을 잊으려 하지 말아요
#기록기
함께 가자는, 오두막을 지어준다는, 자신을 잊으려 하지 말라는 시인의 마음이 애틋하다.
제 발 아래 새 한 마리 떨어졌어요. 당신의 슬픔을 품에 안고 나를 구하러 갑니다. 당근밭을 걷는 동안 당신이 붙잡아준 손이 따뜻해서 좋았어요. 그래서 '내가 나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으로(야광운)'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한 사람 안에 포개진 두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는 거(긍휼의 뜻)' 이제 알겠어요. 슬픔에서 슬픔으로, 빛에서 빛으로. 우리가 서로를 품에 안고 빛으로, 뭍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예요. 삶은 굉장한 거니까요. 겨우 연약한 마음이어도, 단춧구멍만한 믿음이어도.
**너무너무 좋았던 시
#밤가위 #터트리기 / #긍휼의뜻 / #부록씨삶으로데려오기 / #야광운 / #진앙 / #망각은산책한다
구구절절 썼지만 한 마디만 한다면
(바보같지만)
이번 시집 미쳤다!

당신 발밑으로 이유 없이 새 한 마리가 떨어진다면 제가 보낸 슬픔인 줄 아세요. 저는 아직 절벽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밤가위

또 한번의 밤이 지난다
아침이 오면 볼 수 있다
나를 사랑하려는
노력의 모양
굳은 모양을 보면
어떻게 슬퍼했는지가 보인다
어떻게 참아냈는지가
#간섭

실온에 두면 금세 썩는다고 했다. 알면서도 그대로 두었다. 여름이 상하게 한 것이 나만은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해서.
#터트리기

그러다 너를 봤어
단박에 알아보고 물었지
너도 있지 철가루
이상하지,
너와 마주친 순간 왜 하늘에서
철가루가 눈처럼 흩날렸을까
왜 슬픈 장면을 보며 아름답다고 생각했을까

누가 본다고 이렇게 정성 들여 지붕을 색칠하려는 걸까?
땅만 보고 걷는 사람은
거기 지붕이 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할 텐데
그러면 너는 단 한 사람이라고 말해
단 한 사람은 지붕의 색을 이정표 삼아 이곳을 찾아와줄거라고
그때 알았네
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한 사람 안에 포개진 두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는 거
계속 계속 우산을 사는 사람은 지킬 것이 많은 사람이라는 거
서글픈 농담하고 싱긋 웃기
수신인이 물인 편지는 잉크로 써야 한다고
그래야 글자들이 올올이 풀려날 수 있다고
이제야 나는 진심으로 고백해
걸고 쓰느라 부서진 마음 알아봐주는
단 한 사람
수신인이 불인 편지를 쓰기 위해
밤낮없이 장작을 모으는 사람
여기도 있다고
#긍휼의뜻
그는 귀신같이 내 눈빛을 읽는다
누가 누굴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 신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네
너는 나의 진짜 얼굴을 본 적이 없어
#나의시드볼트
기지개를 켜자 손끝에
있다,
비처럼 쏟아지는 네가 있다
이것이 슬픔이라면
나는 너를 가리고 싶어질까 다듬고 싶어질까
머리카락에 들러붙은 껌처럼
싹둑 잘라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할까
#립살리스레인
내일은 다를 거라 믿고 싶을 때
너무 오래는 말고 한 사나흘만
나를 좀 갖다 버렸으면 싶을 때
겨우 이런 곳에 오고 싶었던 거야?
이곳에서 너 자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토끼굴
죽지 마 살아 있어줘
조약돌 같은 말이었을 것이다
#자귀
저는 다만 살아 있었을 뿐이에요.
물빛은 물과 빛의 포개짐이지만
물을 물에게로, 빛은 빛에게로 돌아갈 뿐이죠.
#가는잎향유

걷다보면 또 이곳으로 흘러왔어
네 그림자가 떨어져 있던 곳
바람도 없이 꽃이 흔들린다
어떤 자장가로도 잠재울 수 없는
#진앙

망각은 오르막길을 좋아한다
한 걸음 두에서 걸으면
당신의 쏟아지는 뒷모습
발자국까지 집어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끓어요, 휘발되도록
뒤돌아보면 아무것도 없게
지워줄게요, 전부
잡아먹히며 평온한 하루가 간다
#망각은산책한다
너는 중얼거리지
아무도 나를 구해주지 않아
세상이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구스베리구스베리익어가네
삶이 잘 쓰이지 않을 땐 너른 바위를 찾아요.
축축한 당신을 널어두고 낮잠을 자는 거예요.
다 끝났다고, 더는 의미가 없다고, 스스로를 한 번 죽였으
니 이제부터의 삶은 부록일밖에요.
#부록씨삶으로데려오기
내 안에 든 것이 누구의 심장인지는 몰라도
삶은 내가 그 안에 속해 있기를 원한다
내가 있어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어떻게 살 거냐고 묻지 마세요
어떻게 살아 있을 거냐고 물으세요
오늘도 무사히 하루의 끝으로 왔다
나의 범람,
나의 복잡함을 끌어안고서
#물결의시작
겨우, 기껏, 고작, 간신히, 가까스로....
절대로, 도무지, 결단코, 기어이, 마침내, 결국.....
내가 나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으로.
#야광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