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다시 소중한 것들이 말을 건다 - 연필이 사각거리는 순간
정희재 지음 / 예담 / 2014년 9월
평점 :
외롭고 높고 쓸쓸한 순간의 연필 테라피라는 책 커버의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연필로 쓴 책 제목 역시 두근거리게 했다.
연필마니아인 정희재 작가가 들려주는 연필테라피. 그 이야기가
궁금했다. 나 역시도 연필을 좋아한다. 연필로 글씨를 쓸 때 그 사각거리는 소리를 좋아한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연필을 자꾸 찾게되고 언제 처음 연필을
썼었는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사실 연필의 첫 시작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ㄱ.ㄴ.ㄷ.
ㅏ.ㅑ.ㅓ.ㅕ 를 배우던 그 시절이 기억이 날 뿐이다. 네모칸이 쳐진 공책에 꾹꾹 눌러쓰던 그 때의 그 연필.
엄마가 깍아주던 그 연필. 내가 스스로 깍게 되었을 때의 그
뿌듯함. 연필은 그렇게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추억의 일부분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연필보다 샤프를, 그리고 볼펜을 쓰기
시작했다. 연필이 점점 사라져갔고 소중히 여기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고 글쓰기는 연필로 쓰는 게 좋다고 가르치고
있는 사람이다보니 다시 연필과 함께하는 삶으로 돌아왔다.
책을 읽고 난 후 필사를 자주 하는 편인데 펜, 연필, 마카 가리지
않고 써보고 있다. 캘리그라피를 독학으로 하고 있어서 더더욱 손으로 글씨를 쓰는 일이 자주 있다.
수많은 필기구를 이용해 써보고 있지만 연필로 쓸 때의 느낌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연필을 잡고 쓰는 순간의 고요함. 그리고 사각거림.
정희재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쓰면서 손으로 위로받고, 사각거리는 소리로 세상의 소음을
지운다." p.191
그렇다. 쓰는 행위만으로도 위로받고 온전히 몰입할 수 있게 하는
것.
쓴다는 것만으로 보면 어떤 필기구라 하더라도 상관없겠지만,
나는 연필만의 그 필기감이 좋다.
작가가 굉장한 연필애호가다보니 연필종류나 그로 인한 에피소드에서는
공감을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필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공감할 수 있게 하는 게 연필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분명 연필의 추억이 있을테니까 말이다.
작가를 보면 연필로 쓰면서 수행을 하는 것만 같다. 연필로 인해
깨닫게 되는 것이 삶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되는 과정이었다.
세상엔 완벽한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 왼손으로는 내 의지대로
쓰지 못하는 것처럼 세상사역시 통제할 수 없다는 것,
행복해지기 위한 문장을 정성들여 쓰면서 행복 역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단순한 사실이지만 자꾸 잊어버리는 사실들을 연필을 통해 기억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유가 없고 긴장하며 바쁘게 살아가는 세상 속에 가만히 앉아 연필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깍고 쓰는 것이 시간낭비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나면 연필을 깍고 싶어질 것이다. 연필깍기 아닌
칼로 직접 정성들여. 나는 책을 덮고나서 차분하게 연필을 깍았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구절을 적어보았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쓰기의 기능을 구조 조정해
몸의 능동성을 하나씩 잃어가는 동안
인간이기에 지닐 수 있는 소중한 능력도
장작불에 내리는 눈송이처럼 사라져가는 것은 아닐까?
p.216
손에서 연필을 비롯한 필기구가 사라져가고 키보드. 스마트폰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인간에게 편리함을 주었지만
손으로 쓰던 그 순간의 설렘과 온전히 내 생각에 빠지게 하는 그
고요함을 빼앗아 가버린 것 같아 씁쓸해졌다.
늘 피곤하다하면서도 스마트폰에 빠져있는 나를 볼 때도 씁슬해지곤
한다. 이 책은 다시 한번 나를 들여다보게 한다.
연필테라피라는 말이 딱 맞다. 내가 똑바로 서는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싶다.
사랑은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경험하는 것일 뿐. 그 경험의 한
가운데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똑바로 서는 순간이 내게는 소중하다.
상처받고도 끝내 훼손되지 않는 무엇인가를 연필심처럼 가슴에 품고
세상의 길들을 걷게 되기를 나는 바란다. p.295
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