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진은영 지음 / 마음산책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의책 #하리뷰 #시인의산문집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영혼의 반짝임을 발견하는 시인,

진은영의 신작 산문집


#나는세계와맞지않지만

#진은영

#마음산책


“위대한 책들의 타격 아래서 우리는 번번이 죽고

또 번번이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


다 기억할 순 없지만 죽고 싶었던 숱한 순간에 시인을 살린 문장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고통의 순간도 회복의 과정도 전부 잊었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 여기 살아 있다고 말한다.


내가 특히 어려워하는 책이 고전인데 알고본 이 책, 진은영 시인을 살린 책들에 대한 책이었다. 시인이 사랑했던, 시인의 숱한 밤을 함께했던, 죽고 싶었던 순간을 살려냈던 작가들. 프란츠 카프카, 버지니아 울프, 알베르 카뮈, 실비아 플라스, 한나 아렌트…… 그들의 이름은 너무도 유명하기 때문에 나같은 고전바보에게도 친숙한 이름들이다. 


그러나 어쩜 이래? 시인의 말한 작품들 중에 읽은 작품 하나도 없다! 앞으로도 읽을 수 있는 작품일지 단언할 수 없는 작품들이었다.(얼마 전에 읽었던 청춘의 독서가 생각하네...?)


사는 동안 삶이 행복이라 생각하며 살지 못했다. 그래서 시인이 들려주는 첫 번째 글, 서문에서부터 마음을 홀딱 빼앗기고 말았다. 물론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이라는 제목에서 이미 예상한 결말이었다. 삶은 고통으로 가득하고 아무리 애써도 이 절망과 고통과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작가들을 만나며, 그들의 문장을 읽고 살피며,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문학이 가진 힘이 아닐지. 


전에 만났던 백은선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무해한 시가 아니라 행복만으로 추구하는 글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건져올리듯이. 친절하게 다정하게 괜찮다, 행복해질 것이라고 아첨하지 않고 너에게 고통이 올지라도, 그 고통을 다 겪더라도 너 자신의 삶과 고유함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둔다. 쉽게 위로하지 않지만 우리는 결국 위로받고 만다.


좋은 작가는 아첨하지 않는다. 오랜 친구처럼 우리에게 진실의 차가운 냉기를 깊이 들이마시라고 무심한 얼굴로 짧게 말한다. 카프카, 울프, 카뮈, 베유, 톨스토이, 플라스, 니체, 아렌트…… (…) 이들은, 내 책을 읽는다면 넌 아침에 슬펐어도 저녁 무렵엔 꼭 행복해질 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너는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겠지만 그래도 너 자신의 삶과 고유함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말해준다. 작가들은 진심으로 독자를 믿는다. 그들에게 그런 믿음이 없다면, 어떤 슬픔 속에서도 삶을 중단하지 않는 화자, 자기와 꼭 들어맞지 않는 세계 속에 자기의 고유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 싸우는 주인공을 등장시킬 수 없을 것이다.

_ 책머리에


위대한 책을 읽는다고 혁명을 일으키거나 인류를 구원하지는 못했지만, 다만 살아갈 수 있었다는 진은영 시인. 그리하여 기어코 살아가게 하는 문장을 만날 것이다. 인류는 구원하지 못해도 나 자신은 구원할 수 있으므로.





P. 22 사실 삶은 기나긴 소송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성별, 인종, 계급 등의 사회문화적 규정들 속에 던져진다. 사회는 그 규정들이 제대로 지켜지는지 감시하며 늘 우리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하려고 대기 중이다. 규정 하나를 잘 지켜도 다른 규정들로 인한 소송들이 이어질 수 있다. 그러니 누구나 사는 동안 사회적 ‘정상상태’에 있을 것을 명하는 법 앞에서 계속 무죄를 입증하거나 유죄를 인정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완전한 무죄방면은 불가능하다.


P. 34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은 소중하지만 자신이 짜 넣을 인생의 무늬들이 모두 관계로만 환원된다고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올랜도는 고독을 사랑하는 실존주의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P. 67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은 한없이 어둡다. 그런 세상에서 사랑은 벼락처럼 아주 잠시 동안 번쩍이며 어둠을 밝힌다. 장미꽃처럼 붉고 짧은 빛 속에서 바흐만은 꽃들을 몽환적으로만 그려내지 않는다. 피어난 꽃들 아래 환하게 불 밝혀진 역사의 과오라는 가시들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P. 117 어떤 시인들은 시 속에 죽어가는 이의 가쁜 숨소리를 담아낸다. 읽은 이의 가슴을 찢는, 고귀한 시들이다. 그러나 백석의 시에선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할 만큼 큰 비명이나 고통스러운 신음은 들리지 않는다. 다만 그는 죽어가는 사람, 피로와 고통과 절망에 취해 널브러져 있는 사람 곁에서 속삭이며 중얼거리듯 쓴다. 그 중얼거림에 삶의 깊은 성찰이나 낙원의 약속이 담겨 있는 것도 아니다.


P. 156 슬픔에 빠진 아이는 늘 구석에 가서 웅크린다. 겁에 질린 동물들이 찾는 곳도 구석이다. 세상에서 버려진 기분이 들 때 우리는 구석으로 숨는다. 바슐라르에 따르면 구석이야말로 안전에 대한 몽상을 충족시켜주는 진정한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편안하게 거주한다고 말할 수 있는 곳은 상처받는 순간에 숨을 수 있고 비밀의 은신처가 될 수 있어야 하니까. 어쩌면 집은 “세계 안의 우리들의 구석”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P. 175~176 사랑은 늘 이런 식이다. 시대의 어둠, 운명적 불운, 제삼자의 모략, 서로에 대한 의심, 착각과 실수 등 배송 과정에 끼어든 각종 장애로 내가 보낸 사랑의 정량은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지금 당신의 연인이 홀로 어떤 마음의 감옥에 갇혀 있는지 살피라는 듯 소설은 거듭되는 배송 사고를 전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