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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기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평점 :
#오늘의책 #하리뷰 #에세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런 문장이다
계엄과 탄핵, 슬픔과 분노, 다정함과 고마움
따뜻한 빛처럼 위로가 되는 황정은의 작고 단단한 기록들
#작은일기
#황정은
#창비
황정은의 문장을 소설로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황정은에게 소설쓰기를 멈추게 했다. 2024년 12월 4일, 전국민에게 또다시 잊지 못한 하루를 만들어냈다. 권력에 미친 한 인간의 선택, 비상계엄이라는 황당하면서 두려움에 떨게 했는 그 결정의 날을 우리는 잊지 못할 것이다.
<작은 일기>는 소설가 황정은이 현직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라는 초유의 사태 이후에 대해 써내려간 글이다. 12월 3일 이후로 매일의 삶을 기록하며 광장에 나가 구호를 외치기도 하고 집안에서, 거리에서 보고 느꼈던 것을 기록했다. 함께 분노했고 불안과 두려움을 동반한 피로감에도 광장으로 나갔다. 감히, 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던 시간들. 우리가 모두 한마음이지 않다는 사실이 처참하면서도 매일 쏟아지는 뉴스에 지쳐버리기도 했다. 어떻게 법원에 쳐들어갈 수 있는지, 탄핵을 반대할 수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폭설에도 밤새 자리를 지키는 키세스단이나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나섰던 시민들의 모습에 우리는 모두 놀랐고 감동했으며 고마웠다. 극단적이면서 폭력적인 극우세력의 모습 앞에서 다른 의미로 놀라웠고 극우세력과 함께하는 언론, 정치인, 사법기관의 행태에는 씁쓸함을 넘어 참담하고 슬프기까지 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참담함을 딛고 평온함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 사이 무모하고 끔찍했던 대통령은 탄핵되었고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맞이했다. 여전히 사건은 해결되지 않았고 윤씨의 태도는 꼴도 보기 싫지만 분명 우리에게 정의로운 결말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에 동조했던 인간들의 이름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P. 188 윤석열, 한덕수, 최상목, 심우정, 지귀연, 조희대
(더많은 인간들이 있겠지만)
P. 10 번역서 두권을 주문하는 김에 귤을 샀다. 지난달에 백두대간수목원을 방문하고 들은 이야기도 곧 원고로 정리해야 한다. 오늘은 원고지 다섯매를 썼는데 밤에 한번 더 보면서 다듬고 싶다. 오후 열시 이십삼분 계엄.
P. 13 국회의원이든 시민이든 그 자리에 모인 사람 중에 절박하지 않은 이가 있었을까. 나도 계엄에 반대하고 윤석열의 탄핵과 구속을 간절히 바라며 서 있었지만, 윤석열과 그가 초래한 국가 상태를 묘사하려고 ‘정상‘과 ‘비정상‘을 반복해 말하는 몇몇 연설은 집중해 듣기가 어려웠다. 이사회의 정상성 기준으로 불편과 부당을 겪는 사람들, 소수자들도 여기 있는데 별 조심성 없이 그 말들이 사용되고 있었다. 선 자리가 따끔했고, 뒤쪽 눈치가 보였다. 하지만 지금 이 불편함을 말할 수 있을까, 지금은 그래도 되는 시간일까. 2016년 광화문에서 한 생각을 2024년 국회 앞에서도했다. 스스로를 비겁하다고 느꼈다.
P. 38-39 12월 3일, 국회가 계엄을 해제하고 새벽 네시 삼십분에 이를 때까지, 그리고 이후로 주말까지, 특수요원들을 동원한 국지전 위험이 있었다는 뉴스 보도가 며칠째 이어지고 있다. 국지전을 일으켜 계엄을 정당화하고 장기 집권으로. 2024년 12월 둘째 주, 지금으로선 이름도 붙이지 못할 이 기간의 불안과 울분을 어떻게 기록해야 할까. 감히. 혼란이 어느 정도 가시고 나니 이 말만 입속에 줄곧 서 있다. 감히.
P. 43 나도 겪곤 하니까. 그 무서운 일을 내게 너무나 중요한 그것이 당신에겐 중요하지 않다는 걸 목격하는 일, 사람의 무언가를 야금야금 무너뜨리는 그 일을.
P. 58 그 추운 밤을 그 자리에서 보낸 사람들도 놀랍고, 그들에게 난방 버스며 음식이며, 바람 넘는 고개에서 버티는 데 도움이 되는 물품들을 즉시 보낸 사람들도 놀랍다. 그건 나라에서 받은 것이 없어도 위기가 닥치면 들불같이 일어난다는 어느 민족의 성격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남의 곤경과 고립을 모르는 척 내버려두거나 차마 두고 갈 수는 없는 마음들 아닐까. 남의 고통을 돌아보고, 서로 돌볼 줄 아는 마음들.
P. 64-65 사람들의 악함을 마음에 들여 되짚고 생각해보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내게도 그 싹이 무성하게 있으니까. 그런 것이 자신에겐 없을 거라고 믿는 얼굴 앞에 서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내게는 그런 입장 역시 악함의 기반이 되는 약함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의 약함에 내가 얼마나 분노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약함은 어느 정도 그의 탓일까. 그리고 권력 가진 이들의 혼돈 그 자체인 악함도 약함에서 그 탓을 찾을 수 있을까.
P. 85 누가 그랬나. 케이팝과 응원봉의 물결을 보며 축제 같다고. 그런 면도 물론 있지만 이 집회의 가장 깊은 근원을 나는 그 순간에 본 것 같았다. 슬픔. 저마다 지닌 것 중에 가장 빛나는 것을 가지고 나간다는 그 자리에 내가 바로 그것을 쥐고 나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무사를 바라며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그 자리에 남아 밤샘 집회를 하고 있다. 눈 내린다. 파주에도 서울에도.
P. 102 현장에서 체포된 사람 중 절반 이상이 이삼십대 남성이라는 뉴스 보도가 있었다. 같은 세대 여성들이 이 나라 민주주의와 헌법을 지키려고 추운 날 거리를 돌아다니고 서로를 돌보며 밤을 새우고는 할 때, 저들은 비틀린 세계인식과 자아 인식으로 국가기관인 사법부에서 난동을 부렸다. 대가를 치를 것이다. 동시에 이 광경을 봐야 하는 사회구성원들도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그들에게 그렇게 해도 된다고 가르쳐온 걸까. 1월 19일 새벽, 우리 사회가 그간 육성해온 일부가 크게 자라나 이 괴상망측한 열매를 거뒀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다, 이것도 과정이지, 결과도 아닐 것이다. - P102
P.102 젊은 남성들의 이 고집스러운 고립이 징그럽다.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 냉소와 혐오와 자기연민과 기만으로 가득한그들이 놀이 삼아 자신과 타인의 삶을 조롱하고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이제 더 보고 싶지 않다. 불법 계엄이라는 국가폭력이 그들과 너무도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다. 스펙트럼으로 이 내란을 보면 윤석열이 그들의 일면이기도 할 테니까. - P102
P. 112 2월 27일 목요일 오후 여덟시 오분 지난 2월 25일. 헌법재판소에서 윤석열 탄핵 재판의 최후 변론이 있었다. 국회 측 대리인인 장순욱 변호사의 최후 변론이 내게무척 아름다웠다. "오염"이라는 말로 내 상처의 원인을 부드럽게 짚어주는 것 같았다. 말헌법의 오염. 바로 그것을 내가 견디기 어려웠다. 정확한 말이 건네는 위안을 받았다. - P112
"존경하는 재판관님, 피청구인은 자유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언동을 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말했습니다. 헌법을 파괴하는 순간에도 헌법 수호를 말했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헌법의 말, 헌법의 풍경을 오염시킨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이 노랫말처럼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우리도하루 빨리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그 첫 단추가 권력자가 오염시킨 헌법의 말들을 그 말들이 가지는 원래의 숭고한 의미로 돌려놓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국민과 함께 이 사건 탄핵 결정문에서피청구인이 오염시킨 헌법의 말과 헌법의 풍경이 제자리를찾는 모습을 꼭 보고 싶습니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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