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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숲 ㅣ Untold Originals (언톨드 오리지널스)
천선란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5월
평점 :
이끼숲, 천선란
천선란 작가를 만난 첫 책. 이끼숲을 읽었다.
이끼숲은 세 편의 연작소설로 더 이상 지상에서 살 수 없게 된 인류가 지하에 세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있다. 여섯 명의 친구들의 이야기, <바다눈>,<우주늪>,<이끼숲> 이렇게 세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첫사랑임을 깨닫자마자 그 상대를 잃고 마는 소년의 아픈 성장을 보여주는 「바다눈」
지하도시의 연구소 경비원으로 일하는 마르코. 어느날 연구소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홀린 듯 따라가게 되는데, 그렇게 만나게 된 은희. 마르코와 은희는 연구소에서 함께 일하며 서로에게 끌리고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지하도시에서 그들의 삶은 어둡기만 하다. 한정적인 공간인 지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구도 노동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미래사회에서도 여전히 열악한 노동환경이 존재하고 오히려 더 부당한 노동을 해야만 하는 게 현실이다.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일을 하지만 그만한 대가는 돌아오지 않는다. 연구소 직원들의 파업 속에 신입인 마르코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괴롭기만 하다. 결국 파업이 끝나고 난 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커커스는 패배한 게 아니라, 밟혔다(p.89)고 말하는 마르코의 말처럼 회사와 노동자 사이에서의 결말은 이렇게 씁쓸하다.
첫사랑의 설렘과 기쁨도 잠시 마지막 마르코의 울음소리가 마음아프게 다가왔다. 도망보다는 모험을, 추방보다는 발견을, 타락한 세계보다는 미지의 세계를 바라던 은희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지하도시는, 이 세계는 조급하고, 초라고, 두려웠다. 지하에 갇혀버린 미래가 암울하다. 어디로 가든 벽이 있고 지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유를 잃어버린 세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퍼할 틈도 주지 않는 지하세계에서 슬퍼하고 바라고 기대하면서 닫힌 세계를 열고 나아가고자 한다. 그 아이들이.
천선란 작가의 북토크에서 독자가 왜 주인공은 항상 청소년인지 물었다. 어른에 대한 기대가 없어서? 라며 웃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미래를 구한다면 역시 청소년일 것이라고, 무언가 변하고 나아가고 바뀌기를 바라고 저항하고 싸우는 건 역시 미래를 살아가야 할 아이들이라고. 자신이 청소년에게 바라는 모습이기도 하다는 작가님의 대답이 인상깊었다. 그 후에 이 책을 읽으며 마르코와 친구들을 보며 나 역시 그렇게 믿는다.
˝너 그 사람의 목소리에 흠뻑 빠졌구나! 그 목소리를 사랑하는거야. 상대방이 가진 만 가지 특징 중에서 단 하나의 특징이 마음에 쏙 들어오면 사랑이 시작되는 것 같아.˝ p.40
˝더 할 말 남았구나?˝
˝보고 싶어서.˝
말은 본능처럼 툭 던져졌고 주워담을 수 없었다. 마르코가 손쓸 수 없이 데구루루 굴러간 말을 은희가 잡았다.
˝그래? 보고 싶으면 봐야지!˝ p.62
닫힌 세계라서 이길 수 없었다는 커커스의 말을 달리하자면, 이곳이 지상이었다면 가능했을 거란 말이었을까. 이곳에 하늘이 없고, 건너갈 바다가 없고, 숨을 동굴이 없어서 백기를 들어야 했다는 말이었을까. 저 위는, 이것이 아니면 저것을 하면 되는 세상이었나. 아닌 것 같다 싶으면 옮겨가고, 위험하다 싶으면 멈추고, 잘못됐다 싶으면 돌아갈 수 있는. 역시나 살아보지 못해 알 수 없었다. p.88
2. 누구보다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열렬히 사랑하는 쌍둥이 자매에게 보내는 편지글로 이루어진 「우주늪」
지하도시에서는 임신과 출산도 계획하게 진행된다. 지하라는 공간은 한정적이고 인구과밀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계획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정해진 출산계획에서 벗어난 아이들도 생겨나는 것이다. 등록되지 않은 아이는 평생 밖을 나갈 수 없다. 의조는 쌍둥이로 태어나 등록할 수 없었던 아이였다. 부모는 태어나자마자 죽이려고 했으나 그러질 못했다. 그렇게 좁은 방안에 갇혀 살 수 밖에 없는 의조는 왜 자신이 아니라 의주여야만 했는지 분노하고 미워하고 부러워하며 살아간다. 증오로 가득찬 분노어린 의조의 이야기에, 환풍구를 기어다니며 세상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의조의 처지에 마음이 참 쓰렸다. 내가 여기 있다고, 나도 살아있다고, 그러나 갇혀살 수 밖에 없는 의조에게도 할 일이 생겼다. 의조에게도 자유가 생길까? 고마워요씨를 만났으면 좋겠다.
문장을 쓸 때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게 돼서 자꾸 거친 숨을 쉬게 되거든. 내 생각이 글자로 옮겨지다니, 엄청난 일이야. 이건 어떤 세상을 옮기는 일이라고. 그래서 매번 문장을 쓸 때마다 건축하는 마음으로 해. 나는 건축도 뭔지 잘 모르지만, 이 지하도시와 같은 거 아니겠어? 무너지지 않게, 헷갈리지 않게, 망가지지 않게. p.107
나는 언제나 말을 과격하게 해. 뾰족하게 하고, 날카롭게 하지. 누구든 찔리고 긁히라고. 그러지 않으면 종종 까먹더라고. 내가 살아있다는 걸. 엄마가 상처받을까봐 걱정되니? 내 몫까지 네가 실컷 해. 나는 걱정 안돼. 나한테 그런 것까지 강요하는 건 염치가 없지. p.110
나는 이제 내가 할 수 이는 걸 계속해나갈거야. 나는 고마워요 씨를 만날 거야. 엉금엉금 기어서. p.133
3. 상실의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이야기 「이끼숲」
유오가 죽었다. 지하도시는 그대로 살아갈 수 없다. 계속 넓혀나가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필요하고 그 일엔 위험이 따른다. 유오는 늘 지상에 가고싶어했다. 그러나 붕괴사고로 죽고 말았다. 유오를 사랑했던 소마는 일도 나가지 않고 슬퍼하고 괴로워한다. 결국 친구들과 유오의 클론을 훔쳐 지하도시 밖으로 탈출하고자 한다. 유오랑 똑같이 생겼지만 유오는 아닌 복제인간. 마르코의 계획을 들었을 때 소마가 물었다.
˝그럼 그거 다 무슨 소용이지?˝
유오처럼 말을 하지도 않고, 유오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면(다시 말하지면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걸 유올라고 할 수 있나?
마르코가 입을 연다.
˝그냥 우리의 미련인거지.˝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p.163
그런 클론이라도 데리고 나가고자 하는 친구들. 갑작스런 부재나 상실 앞에서 미련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을 놓지 못하는 건 당연한게 아닌가 싶다. 슬퍼하는 것이 유별나지 않은 세상. 마음껏 슬퍼하고 언제까지 슬퍼할거냐고 타박하지 않는 세상. 그게 우리의 현실에서도 바라는 일이 아닌지.
돔에서 만난 위원장의 말이 지금의 세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다 유별나고 억울하고 슬프면 도대체 일은 누가 해? 언제 일 하느냐고!˝(p.231)
유오의 죽음은 그저 노동자 한 명 사망, 한 줄로 남았다. 별것 아닌 한 줄. 그 애를 사랑했던 사람만이 그 한 줄을 뜯어 먹고 살 것이다. 글자와 글자 사이, 선과 선 사이에 촘촘히 박힌 삶을 그리워하면서(p.230) 그 죽음을 슬퍼하는 것도 애도하는 것도 유별나다고 말하는 세상이 과연 제대로 된 세상인지 묻고 싶다. 더 이상 슬픔이 유별나지 않은 세상이길 바라게 된다. 슬픈 일이 계속되고 있으므로. 슬프다고 핑계대며 남에게 피해주는 건 딱 질색이라던(p.232) 위원장의 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기를.
사실 치유키의 에피소드가 궁금한데, 자세히 나오지는 않았다. 작가님은 처음에 <이끼숲>만으로 경단편소설을 준비해었다고 한다. 지난 해 여러 사건들을 통해 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더 쓰게 되었고 세 편의 연작소설이 되었다. 다 읽고나니 소마와 유오의 이야기만으로는 아쉬웠을 것 같다. 마르코와 은희, 톨가, 의조와 의주, 그리고 치유키. 모든 캐릭터들이 살아있다. 아이들의 미래를 꿈꾸게 된다. 슬픔이 유별나도 되는 세계를. 슬픔을 마주하고 애도하는 시간을 차단당하지 않는 세계를. 닫힌 세계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세계를.
모두가 그 순간 최선을 다해 즐기고, 모든 걸 누리고, 마음껏 행복했으면 한다. 누군강의 행복과 즐거움에 그 어떤 위험도 없길 바란다. 이런 말을 하다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누구나 다 바라는 일 아니던가? 그런데 이게 왜 이렇게 어려울까?‘
이 행성에 우리가 머무는 동안, 부디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반드시
#작가의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