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 수첩 문예중앙시선 44
조혜은 지음 / 문예중앙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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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신부 수첩, 조혜은

신부 수첩이라는 제목과 핑크책 커버의 시집은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시가 아니었다. 여자이자 아내이고 엄마인 ‘나’의 이야기는 결혼의 행복이 아닌 불행에 대한 문장으로 가득했다. 음울하고 온화한 유령의 모습으로 가장하고 가장의 권위를 맞았다. “당신이 가장의 권위를 주장할 때, 나는 음울하고 온화한 유령의 아내를 가장했지.(가장,12쪽)” 결혼한 비슷한 지인은 자신의 삶에 찬물을 끼얹고 미혼이거나 어린 지인들은 조언을 했다. 그래도 우리 정도면 행복하지 않냐며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 정도면 행복하잖아. 거짓말을 한다.(이방인_엄마에게,15쪽)“ 나를 집을 싫어하게 되고 상처를 받으면서 무덤덤하게 불행이라는 궤도속으로 들어갔다. 남들만큼 살지 못해서 남들 흉내를 내면서. ”우리는 순서대로 무덤덤하게 불행이라는 궤도속으로(...) 남들만큼 살지 못하는데 그래도 남들 흉내를 내야 하나?(신부수첩_식탁)“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의 제도안에서 흉내나 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묻게 된다. ”우리는 끝이 나야 해. 너는 끝없는 여행을, 나는. 또 다른 나를. 너에게 나는 그리운 말이었다. 나는 매일 밤 나를 흉내 냈다. 관광지에서. 우리가 서로 멀어지다가 우연히 만나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길. 겹쳐진 많은 날들이 날 선 문장을 선물하고. 우리는 걷고 있었다.(관광지_우리, 32쪽)”


아기는 자라고 있는데 당신은 없다. 외롭고 힘든 일을 하며, 휴일도 없이 일을 하면서. 나는 그저 기계처럼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나를 모욕하고 때리고 괴롭혀도. 그러나 이제 끝났다. 조각난 우리는 이제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아기는 자라고. 너는 휴식은 있지만 휴일이 없는 나라에서, 나는 휴일은 있지만 쉴 수 없는 오늘을 이야기하지. (...) 여기는 계속되는 장마야. 나는 이곳에서 아내라는 기구처럼 작동하고 타이머가 끝날 때까지 먼지를 털며 널 기다리지.(장마_동화)”
“저 가파른 골목은 이제 누구의 낭떨어지인 걸까. 먼 곳에 있으면 멀어지는 것들을 바라보기 쉬웠지. 실은 네게 아무것도 미안하지 않아. 긴 장마는 끝났어. 휴일은 있지만 쉴 수 없는 나라에서, 이제 휴일이 끝나도 결코 만날 수 없어. 조각난 우리는. (장마_휴일)”

이제 불행을 제대로 마주해야 한다. 불행을 연습할 수 있었다면, 불행이 오는 것을 셀 수 있었다면 더 나아질 수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랬다면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이제 불행 앞에서 그대로 불행을 껴안고 갈 수는 없다. “다가올 불행을 연습할 수 있었다면, 더 나아질 수 있었을까(우리의 순간_탄생)”
부서지더라도 꿋꿋하게, 헤매더라도 단단하게. 나쁜 사람이 되더라도 돌아가서는 안 된다. 당신과 헤어져도 나쁜사람이 될지라도, 그럴 일도 없겠지만 살아남기를. 더 나은 일만 남았다고, 그렇게 반짝일 것이라고.
나는 꿋꿋하게 부서지는 중이었다

나는 단단하게 헤매는 중이었다

나는 당신들의 비난에 맞는 진심으로 나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결코 당신에게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
비밀처럼 살아남아 반찍이길 원했다
엄마가 잘살게 해줄게
(당신과 헤어졌다)

자꾸만 답담해지고 무거워지고 마음아파지던 시들은 마지막에 가서야 폭발했다. 너는 어디에서 왔을까? 괴롭히는 것을 정당하게 인정받게 된 걸까. 누군가를 괴롭하고 모독하고 몰아세우면서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 수많은 ‘너’, 너는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너는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나를 괴롭히는 이유를 댔다. 너는 어디에서 왔을까? 너는 누구일까? 가끔 나는 의아했다. 어째서 너는 너를 괴롭히는 것을 정당하게 인정받게 된 걸까. 나는 어디서 살고 있는 걸까. 너는 네가 하는 말의 즐거움을 위해 나를 모독하고 몰아세워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 그런 너에게 결혼이란 참 합리적인 제도였다. 그곳에서 너는 어떤 처벌도 사랑이란 말로 무마하며 결코 나와는 행복하지 않았다.
(가정)

읽는 내내 괴로웠다. 서정적이고 밝은 시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 안의 아픔과 고통, 절망과 슬픔들이 너무나 현실적이고 무거워서 자꾸만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이런 마음들도 있는 거라고, 불행과 아픔을 밟아 자신을 닮은 글을 써내려가는 사람도 있는 거라고. 그렇게 그 모습을 상상한다. 진짜 글쟁이구나.

이제 진짜 글쟁이가 되겠구나
습관처럼 아픔을 밟아 나를 닮은 글을 쓰고 싶었다면,
피멍 든 거짓일까
(당신과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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