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SQ 887 Y TU 14JUN  ICNSIN HK1   1630 2145  
2 SQ 322 Y TU 14JUN  SINLHR HK1    2320 0550*1   --15일 도착    
3 ARNK                                                        
 4 SQ 491 Y SU 11DEC  ISTSIN HK1    1245 0715*1 --12일 도착(싱가폴 스탑오버)
5 SQ 882 Y TU 13DEC  SINICN HK1    2340 0655*1 --14일 도착 

좌석은 모두 ok 입니다.

* 참고 하실 점 : SQ0491  이스탄불 두바이  1245 1850  
                      비행시간 04.05       경유시간 01.10
                      두바이 싱가폴  2000 0715*1 비행시간  07.15
   TOTAL :  12.30

ICN 인천, SIN 싱가폴, LHR 런던, IST 이스탄불


드디어 비행기표를 예약하다.

돌아오는 날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돈에 여유가 있다면, 그리고 돌아오고 싶지 않아진다면. 모 친구의 말대로 6개월만이라고 했다가 거기서 눌러앉게 될지도...

예약하고 나니 조금 실감이 난다. 앞으로 남겨진 시간은 촉박한데 해야할 일들은 산더미라서, 무슨 명목으로 사표를 날리고 어떻게 부모님과 동생을 설득할런지 앞이 깜깜하다.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자꾸만 조급해지는 마음을 달랜다.

이제, 두달 남짓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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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ika 2005-04-07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6달에 걸친 여행....항공료 만만치 않겠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준비 잘~ 하고 계시길...^^

무탄트 2005-04-07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싱가폴 항공에서 적당한 항공권을 구했습니다. 처음엔 7개월정도 생각했었는데, 할인항공권의 유효기간이 6개월이라 일정을 조절하는데 다소 골치가 아픕니다. 어쨌거나 남은 기간동안 열심히 힘닿는 데까지 노력해야겠죠. 감사합니다. ^^
 

얼마전에 <그녀, 정혜>란 영화가 개봉됐다. 비록 그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그 제목을 떠올리는 순간 얼마전까지 나와 함께 일하다가 피치못할 집안사정으로 그만두게 된 H가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H는 두달 전까지 나와 함께 일했다. 한 회사에서 일하면서 3년 남짓한 시간동안  어려운 고비를 여러 번 함게 겪었고 그 고통을 서로 이야기로 나누면서 풀어냈었다. 일로 부딪히는 일이 전혀 없었다곤 할 수 없지만, 남직원에 비해서 여직원이 많지 않은 터라 가능하면 우린 서로를 끌어안으려고 노력했다. 중간에 여러 직원들이 들어왔다가 해고되어 다시 나가고 정말 힘들 땐 둘만 남아 있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이런저런 집안 사정까지 알게 되었다. 그녀의 자존심에 그렇게 얘기하는 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거의 하루종일 붙어있어서 얼굴을 안 볼래야  안 볼수도 없고 표정의 세세한 부분까지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으므로, 때론 친한 친구에게도 차마 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털어놓는 분위기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부모님 이야기, 여동생 이야기를 많이 했다. 단, 그녀가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되도록이면 묻지 않았고, 그저 그녀가 해주는 이야기에서 그 전후 사정을 짐작할 뿐이었다. 그녀는 이야기를 참 재미나게 잘했다.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도 그녀의 손에 들어가면 그녀의 대담하고 풍부한 유머감각을 거쳐 생생하고 재미있게 각색되어 다시 돌아왔다. 그녀 부모님의 부부싸움 이야기, 동생과의 에피소드, 시집 안간 친구의 몸부림, 남자친구의 이야기 등.

얼마전까지도 그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묻지 않아서 몰랐는데, 다만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 전혀 수입이 나오지 않는 일이어서 그녀의 적은 월급으로 집안 살림을 꾸려나간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그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 정확하게 어떤 일인지 알게 되었는데, 내가 봐도 정말 돈이 되긴 힘든, 한마디로 대박날 확률이 거의 희박한 일이었다. 밑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그 일을 위해 그녀는 거의 10년 동안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모든 책임은 그녀에게 넘어오게 되었다. 같이 짐을 짊어져야 할 그녀의 이기적인 오빠도, 이제 갓 취업한 동생도 그녀에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제 나이 서른이 되어서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그녀는 목숨 걸듯 인생을 걸고 이 힘든 시기에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더이상은 대책없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기 위해서, 딸이 늙든 말든 시집을 가든 말든 마냥 자신들을 부양해줄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부모님에 의해 저당잡힌 자신의 인생을 되찾기 위해.

그런 그녀를 2주전에 봤을 때, 그녀는 많이 힘들어했다. 괜히 직장을 그만둔 것 같다고 후회했다. 자신의 힘든 상황이 그녀의 부모님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밑빠진 독을 채울 두꺼비같은 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예전 나의 충고대로 차라리 집을 나올 걸 그랬다고, 집에만 있으면 미칠 것 같다고도 했다.

2주전 회사가 여의도에서 문래동으로 이사하는 날, 그녀는 재수 옴지게도 없는 조가의 말을 듣고 나왔다가 사장의 애매모호한 충고-왜 나왔느냐, 누가 불렀느냐, 좀더 상황이 확실해지면 부르겠다(아니면 안 부르겠다는 말인가, 전에 4/1자로 출근하라고 할때는 언제고. 젠장)-에 맘 상해 집으로 돌아갔었다. (졸지간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린 그녀를 생각하면 정말 조가 놈이 미워죽겠다.) 그리고나서 지금까지 난 그녀에게 전화하지 못했다. 긍정적인 소식이 아니라면 차라리 안하니만 못하지 않을까 싶어서. 어제 비로소 사장님이 내게 의사를 물어보셨다. 내 일에 많이 도움이 될 것 같냐고. 좀 난감하긴 했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오랜시간 함께 있어서 맘도 잘 맞고 일에 대해서도 확실하다고, 사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냐고.

그래서 이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 전화를 했더니 안 받는다. 문자를 날렸다. 그녀가 아프단다. 지난 월요일부터 며칠 동안 정신없이 앓았단다. 사장님께 전화를 드리라고 말했는데, 알았다고 하고선 그때이후로 아직 연락이 없다. 2주 전 그날 이후로 너무 맘 상하여, 혹은 심하게 앓고 나면 변하는 사람도 간혹 있다던데 그래서 혹시나  심경에 무슨 변화가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된다.

어찌됐든, 무슨 일이든 그녀에게 좋은 일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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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터 예상해왔던 바이지만, 드디어 한 사람이 정리되었다. 나랑 2년 넘게 같이 근무하다가 P에 의해 밀려나고 잠시 다른 곳에서 일하다가 다시 우리 회사에 들어온 인물. 그때 저렇게 해서라도 들어와야 하나, 좀 구차하다고 생각했었다.  욱하는 성질은 있지만 솔직하고 좋은 분이어서 참 좋아했다.

떠나는 사람의 인터뷰:

A :  지금은 미련없어요. 전에 기술팀으로 일하다가 잘릴 땐 열받았었는데, 지금은 영업을 못해서 그런걸. 그래도 W가 많이 봐준 거지.

사실 내가 생각해봐도 많이 봐준 셈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지난 연말에 그만뒀어야 했으니까.  그래도 씁쓸함은 남는다. A의 해고가 어떤 큰 일의 전초전처럼 불길한 기운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아서.  A와 이야기하다가 지금 회사 분위기에 대한 말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나도 이미 대충 눈치채고 있었던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뿌옇게 맴돌기만 하던 것이 구체적으로 가시화되었을 때 받는 충격은 생각보다 강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지금 우리 회사는 더 혼란스러운 상황-전국시대에 놓여 있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못 보고 못 들은 것처럼 살면 것이다. A말대로 지금 나는 나름대로 없으면 아쉬운 인물이므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살려면 그렇게 살 수도 있다. 공사 구분이 확실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인간적인 관계에 치중하고 있던 순진한 나로서는 그 관계의 허무함, 깨어진 신뢰성을 극복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게 문제이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이용하고 제 밥그릇을 챙기기에 바쁜 상황을 내가 얼마나 견뎌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우선 복잡한 내 머릿속을 위해서 삼파의 관계를 정리해보면,

1. 우파 : 사장. 어떻게든 회사를 살려서 끌어나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사실 내가 봐도 밑빠진 독에 물 붓기인 면이 없지 않다. 혹자의 말에 의하면 6개월 살다가 나와서 신용불량자가 되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평생 떳떳하게 살아오려고 노력한 인물에게 그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내가 봐도 그렇게 뻔뻔한 인물은 아니다. 모사장의 나쁜 영향으로, 혹은 각박한 현실때문에 점점 뻔뻔해지고 냉혹해지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가능한 한 손해를 덜 보는 선에서 조파를 떼어내려고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더불어 자기 맘에 안드는 박가 등의 인물도 조파에게 덤탱이를 씌울 속셈이다.

2. 조파 : 전 영업부장, 현 다른 법인체를 설립하여 사장이 되려고 하는 인물.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인물이지만 남들은 뭐 그럭저럭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내가 보기엔 영업력 별로 없고 큰소리만 치고 잘난 척만 해대는 절라 재수없는 인물이지만, 이상하게도 남들은 그를 무시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의 카리스마 운운하는 이도 있겠지만 아마도 그가 회사카드를 긁어대며 열심히 환심을 산 결과가 아닐까 짐작만 하고 있다. 어떻게든 우파에서 득되는 것만을 빼내려고 애쓰고 있지만 박가같은 아무 쓰잘데기 없는 인물때문에 골치가 꽤 아플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분리되어 나가서 얼마나 잘 사는지 지켜보고 싶은 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3. 서파-박씨 : 영업부 이사 서파와 영업부 과장 박씨가 손을 잡았다는 풍문이 최근에 내 귀에 흘러들어왔다. 모씨의 말에 의하면 지금까지 실질적으로 실세였던 우파를 폐위시키고-그에게 모든 짐을 지워 6개월 보내고- 새롭게 거듭나는 게 어떻겠냐는 심중을 암암리에 갖고 있다는, 나로서는 다소 충격적인 소문을 접하게 되었다. 어찌보면 전 회사에서 짤린 서파를 어떻게든 옆에서 끼고 챙겨준 게 우파이거늘, 그런 우파의 입장에서 보면 서파는 배신자인 셈이다. 박씨 또한 우파가 평소 아끼고 충실히 마음에 두고 있는 인물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이로서 두 사람의 냉정하고 냉혹한 면모-비록 소문일지라도-를 새로이 접하게 된 순진무구한 나로서는 그 두 인물에 대한 신뢰감이 깨어짐과 동시에 무서워졌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전에도 그 두 사람에게서 묘하게 그런 느낌을 받은 것 같기도 하다.

그외 인물들은 지금 관망하는 중이다. 내 입장은 우파에 가깝긴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하여 내 자신의 순진함을 개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억지로 부인하려고 했던 사실, 내가 힘도 없고 머리도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뼈져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그런 나를 보면서 불쌍하고 바보같다고 얼마나 비웃었을까. 하물며 이번에 물러가는 A 씨조차 장래를 위해 사적인 인간관계를 공적인 관계로 잘 확장, 유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이 확인된 이상, 감정적인 인간관계만을 앞세워 상황을 판단하던 미숙한 자아를 가지고 있는 내 자신의 우매함을 어찌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현실은 냉정하다. 냉혹하다. 이제 더이상 나도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살 수 없을 것이란 예감이 들어 슬프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바보같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나로선 정말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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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젠 내 생일이었다. 일주일 전 금요일이 생일이었던 동생과 함께 생일 파티를 했다. 원주에서 반가운 친구가 달려와(?) 주었고, 단식을 하느라 몸이 많이 축나서 안쓰러운, 쓰러질까봐 걱정되는 동생까지 와 주었으며,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맛있는 샴페인을 들고 택시타고 달려온 친구와 멋있는 수염을 달고 나타난 동생까지, 정말 행복한 생일날이었다. 그리고 마법에 걸린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잠이 쏟아지는 생일날이엇다.

어제 아침 이상하게 눈이 일찍 뜨였더랬다. 6시라니, 평소 출근할 때도 일어나기 힘든 그 시간에 눈이 번쩍 뜨인 나는 이주일 넘게 기다려왔던 플라스틱 서랍장을 열심히 닦아서 집안에 있는 각종 잡동사니들을 말끔히 치워버렸다. 의기충전하여 밀린 빨래들을 해치우고, 청소기를 돌려 쌓인 먼지들을 뽑아내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광나도록 방을 닦았다. 어머니께서 그토록 잔소리를 하셨건만 미역국같은 건 별로 먹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할 것 같아서 해놓은 현미와 보리쌀을 섞어 만들어놓은 죽밥을 가공하여 동생이 맛있는 김치볶음밥을 해주었다. 동생의 성의를 생각해서 배터지게 먹고 부리나케 씻고 나왔는데 결국 Y동생이랑 보기로 했던 영화를 놓쳐버렸다. (아니 지레짐작으로 놓칠 것 같아서 Y동생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는데 알고보니 생각보단 시간이 남았더랬다. ) Y에게 미안해서 기분이 우울해졌다. 아침부터 늦잠도 안자고 수선을 떨었더니 몸도 피곤했다.  내가 조금만 더 서둘렀으면 좋았을텐데. 왠지 처음부터 자꾸만 어긋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 탄 전철이 청량리행임에도 불구하고 오류동까지만 간다고 해서 역곡에서 내렸다. 싸늘한 바람이 부는 플랫폼에 앉아서 잠시 정신을 바람결에 흘러보냈다. 내 우울한 마음과는 달리 용산행 급행열차는 곧 들이닥쳤다. 대방역에서 열나게 뛰어 다시 의정부행 열차를 잡아탔다. 내 예상보다 시간은 단축되고 있었지만, 단축되는 시간이 반갑지 않았다. 우울했다.

영풍문고에서 지난 주가 생일이었던 L동생이 평소 보고 싶어하던 레이먼드 카버의 <제발 조용히 좀 해요>를 집어들고 Y동생이 올 때까지 영풍문고를 배회했다. 몸이 피곤하니 책도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발이 너무 아파서 그저 어딘가에 앉고만 싶었다. 지하에 있는 스타벅스도, 다른 커피숍도 들어가기 싫었다. 1시간이 넘어도 Y가 오지 않아서 걱정이 되었다. 내가 먼저 약속을 깨서 김이 새버린 건가, 아니 단식때문에 허약해져서 쓰러진 게 아닐까. 안그래도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다고 했었는데. 온갖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몸은 점점 무거워져서 어딘가 앉을 만한 곳을 찾아서 전화를 해야지 하면서 영풍을 막 나선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Y였다. 피곤하고 약한 목소리였다. 걱정이 돼서 이러저리 뛰어다녔는데 Y는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알고보니 Y는 내가 좀처럼 가지 않아서 있는 줄도 몰랐던 출구쪽에 앉아있었다. 야윈 Y의 얼굴을 보니 안심이 되는 한편 안쓰러웠다. 까만 코트에 까만 치마를 입은 백짓장처럼 하얗고 야윈 얼굴의 그녀는 마치 하얀 마녀같았다.(왜 마녀란 단어가 떠오르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그녀를 부축하고 걸었다. 어딘가 신선한 공기가 있는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내가 만나기로 정했던 곳은 그런 곳과는 하늘과 땅차이만큼 거리가 먼 종로 한 복판이었다. 그나마 선선한 날씨가 다행이었다.

물과 특별한 소금만을 먹은지 엿새되는 날이었던 어제 Y는 좀 힘들다고 했다. 사흘을 주기로 아픈 것 같다고. 단식을 하면 허기가 져서 먹을 것 생각이 많이 나고 유혹이 심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생각보다 먹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고 했다. 아무 것도 안 먹게 되면 오히려 먹고 싶어지는데, 물과 소금만 먹으면 그렇지 않더란다. 대신 냄새에 극도로 예민해져서 냄새만 맡아도 음식의 맛과 신선함을 점칠 수 있을 정도라고. 물의 냄새에도 예민해져서 물도 신선하지 못 마시겠단다. 음식을 먹는 대신 냄새를 맡는다는 그녀를 위해서 그녀가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하여 그 냄새를 맛볼 수 있게 해주려고 했다. 내 생각엔 고통만 있을 것 같은데 (물론 그녀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을 것이다) 그녀는 괜찮단다. 단식이 끝나면 단식기간의 딱 세배되는 기간동안 보식을 해야하는데, 보식때는 가능하면 물을 마시지 않는 게 좋단다. 물을 마시게 되면 식욕이 땡기게 된다고. 가루 선식만 먹으면 좋은데 먹기가 쉽지 않으므로 과일같은 것을 곁들여 먹는단다. 물은 식전후 2시간,  속이 완전히 비어있을 때만 먹을 수 있다고. 보식의 기간이 지나면 장어구이를 먹으러 가기로 Y와 약속했다. 

친구 J와 만나기로 한 인사동의 <신옛찻집>은 입구의 너구리부터 예사롭지 않은 곳이었다. 아! 새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지난 주 연이틀동안 새똥의 축복을 접했던 나에겐 운명같은 곳이었다. 다행히도 이번엔 새똥의 축복이 나를 비켜갔다. 지난 새똥의 축복에 대한 Y동생의 이론에 의하면, 신께서 첫날 새똥의 축복을 하사하셨을 때 내가 그만 피해버려서, 에라 한번 더 받아라면서 두번째 정통으로 축복을 내려주신 거란다. 고로 난 새똥의 축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친구 J의 전혀 다른 해석에 따르면, 첫날 새똥의 세례를 피해버려 새의 원한을 사서 두번째로 분노의 응징을 받았다고도 했다. 어쩄거나 난 첫번째 해석이 맘에 드므로 전적으로 Y동생의 해석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믿거나 말거나.

밤을 새우기 위해서 들어간 어느 호프집(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에서 친구K가 들고온 럭떠리한 샴페인을 마시며 다시 한번 케익에 불을 붙여 우리-나와 동생L의 생일을 축하했다. 예상치않은 거품세례까지 받았다. 달콤한 케익과 상큼한 샴페인이 입안에서 돌고 돌았다. 내 정신도 뱅글뱅글 돌았다. 참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눈꺼풀의 나른한 공격엔 속수무책이었다. 나와 L은 잠의 유혹 속에 빠져들었다. 불편한 자세로 졸고 또 졸았다. 별로 취한 것도 아닌데 잠은 마구 쏟아졌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이랬을까. 우리가 잠의 나락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동안, S동생은 전화 몇 통 받더니 중간에 돌아가고 친구J와 K는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친구처럼 얘기를 나누느라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직선적인 K의 공격에 J의 대응도 만만찮아서 다소 과장을 하자면 전쟁터를 방불케했다. 즐거운 전쟁?! 사막에 떨어뜨려도 살아남을 J와 K다웠다. 손님을 초대한 주인장이 헤롱대는 동안 손님들끼리 알아서들 즐겁게 놀고 있는 형국이었던 게다. 참으로 유쾌함의 경지에 다다른 J가 없었다면 K를 어떻게 대접했을지, K가 없었다면 밤새울 각오를 단단히 하고 오라고 으름장을 놓았던  J를 어디서 재울지로 고민했을 이 잠꾸러기 주인장의 심정을 알아서들 헤아려 준 것이리라.

새벽4시까지 술자리는 계속되었다. 역시나 나와 L은 자세를 바꿔가면서 졸아댔다. 술집도 문은 닫아야하고 술을 마시면 노래방을 가야하는 게 정석인 K, 아니나다를까 이번에도 어김없이 노래방은 정식코스에 들어있었다. 어느 순간이든 잘 준비가 되어 있는 나와 L은 몇 곡 뽑은 후에 노래방 의자에 뻗어서 또 단잠에 빠져들고 K와 J는 서로 입맞춰 노래를 불러댔다. 주인장이 또 정신없이 잠에 빠져든 사이, 그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랬거나 말거나 난 계속해서 잠자고 싶었다. 차가운 커피 한 잔 들이키고 아쉽지만 우린 제각각 흩어졌다. 그리고 나는 밀린 회사일을 헤치워야 한다는 핑계삼아 사무실에 돌아와 사장님실 3인용 소파에 누워 퍼지도록 잠을 잤다. 몸은 추웠지만 발끝은 난로의 열기때문에 뜨거웠다. 잠은 달콤했다. 소사의 목소리처럼. 영혼의 울림이 텅빈 사무실을 가득 채운다. 난 지금 사무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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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6개월 남짓 정이 들었던 동생 P과 헤어졌다. 잘되면 밀린 급여 정리해줄터이니 파산정리까지만 해달라고 애원할 때는 언제고, 백수라고 집에만 있으면 더욱 기분 쳐지게 될까봐 꼬박꼬박 사무실에 나와 있던 그녀를 다른 자리에서 바보라며 씹었다는 그 재수없는 대머리 사장 꼴 보기가 더 이상은 싫단다. 당연하다.  입을 열지 않으면 그래도 봐줄만한, 그러니 입을 열면 싸가지없이 말하기 일쑤인, 말만 번지르하게 하는 그 놈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지 코가 석 자인데 남 챙겨줄 위인이 절대로 아닌 것을. ( 난 우리 사장이 물들까봐 두렵다. 이미 물이 좀 든 것도 같지만)

진작에 기한을 정해놓고 접었어야 했다. 다만 그녀는 우리랑 얘기하는 즐거움을 위안삼아 교통비며 식비를 들여가면서 왔을 뿐인데, 그래도 형편이 되면 봐주겠지 하는 일말의 기대를 품었을 뿐인데, 어쩜 충분히 예상하고 있을 수 있는 일이었음에도 P는 철저히 농락당한 느낌에 배신감이 들어 치가 떨린단다. 그리고 우린 전부터 이미 예정된,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마음아픈 이별을 해야만 했다.

난 미련이 참 많은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한번 끝난 관계는 뒤도 돌아보지 않을 만큼 무처럼 단칼에 잘라버리는 편이다. 어차피 끝날 관계라면 그게 서로를 위해서도 좋으리라고 생각하니까. 나중에 내가 아무리 뼈아프게 후회하게 될지라도. 한번 끝난 관계는 다시 예전처럼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예전과 똑같은 관계란 게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 강산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별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몇 번을 되풀이해도 언제나 이별은 아프다.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다. 마음을 준 깊이만큼 이별은 더욱 큰 상처를 남긴다.

짧은 시간을 함께 해도 깊은 정이 드는 만큼 이별도 아프다. 이제 곧 결혼을 앞두고 있는 그녀가 행복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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