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젠 내 생일이었다. 일주일 전 금요일이 생일이었던 동생과 함께 생일 파티를 했다. 원주에서 반가운 친구가 달려와(?) 주었고, 단식을 하느라 몸이 많이 축나서 안쓰러운, 쓰러질까봐 걱정되는 동생까지 와 주었으며,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맛있는 샴페인을 들고 택시타고 달려온 친구와 멋있는 수염을 달고 나타난 동생까지, 정말 행복한 생일날이었다. 그리고 마법에 걸린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잠이 쏟아지는 생일날이엇다.
어제 아침 이상하게 눈이 일찍 뜨였더랬다. 6시라니, 평소 출근할 때도 일어나기 힘든 그 시간에 눈이 번쩍 뜨인 나는 이주일 넘게 기다려왔던 플라스틱 서랍장을 열심히 닦아서 집안에 있는 각종 잡동사니들을 말끔히 치워버렸다. 의기충전하여 밀린 빨래들을 해치우고, 청소기를 돌려 쌓인 먼지들을 뽑아내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광나도록 방을 닦았다. 어머니께서 그토록 잔소리를 하셨건만 미역국같은 건 별로 먹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할 것 같아서 해놓은 현미와 보리쌀을 섞어 만들어놓은 죽밥을 가공하여 동생이 맛있는 김치볶음밥을 해주었다. 동생의 성의를 생각해서 배터지게 먹고 부리나케 씻고 나왔는데 결국 Y동생이랑 보기로 했던 영화를 놓쳐버렸다. (아니 지레짐작으로 놓칠 것 같아서 Y동생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는데 알고보니 생각보단 시간이 남았더랬다. ) Y에게 미안해서 기분이 우울해졌다. 아침부터 늦잠도 안자고 수선을 떨었더니 몸도 피곤했다. 내가 조금만 더 서둘렀으면 좋았을텐데. 왠지 처음부터 자꾸만 어긋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 탄 전철이 청량리행임에도 불구하고 오류동까지만 간다고 해서 역곡에서 내렸다. 싸늘한 바람이 부는 플랫폼에 앉아서 잠시 정신을 바람결에 흘러보냈다. 내 우울한 마음과는 달리 용산행 급행열차는 곧 들이닥쳤다. 대방역에서 열나게 뛰어 다시 의정부행 열차를 잡아탔다. 내 예상보다 시간은 단축되고 있었지만, 단축되는 시간이 반갑지 않았다. 우울했다.
영풍문고에서 지난 주가 생일이었던 L동생이 평소 보고 싶어하던 레이먼드 카버의 <제발 조용히 좀 해요>를 집어들고 Y동생이 올 때까지 영풍문고를 배회했다. 몸이 피곤하니 책도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발이 너무 아파서 그저 어딘가에 앉고만 싶었다. 지하에 있는 스타벅스도, 다른 커피숍도 들어가기 싫었다. 1시간이 넘어도 Y가 오지 않아서 걱정이 되었다. 내가 먼저 약속을 깨서 김이 새버린 건가, 아니 단식때문에 허약해져서 쓰러진 게 아닐까. 안그래도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다고 했었는데. 온갖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몸은 점점 무거워져서 어딘가 앉을 만한 곳을 찾아서 전화를 해야지 하면서 영풍을 막 나선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Y였다. 피곤하고 약한 목소리였다. 걱정이 돼서 이러저리 뛰어다녔는데 Y는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알고보니 Y는 내가 좀처럼 가지 않아서 있는 줄도 몰랐던 출구쪽에 앉아있었다. 야윈 Y의 얼굴을 보니 안심이 되는 한편 안쓰러웠다. 까만 코트에 까만 치마를 입은 백짓장처럼 하얗고 야윈 얼굴의 그녀는 마치 하얀 마녀같았다.(왜 마녀란 단어가 떠오르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그녀를 부축하고 걸었다. 어딘가 신선한 공기가 있는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내가 만나기로 정했던 곳은 그런 곳과는 하늘과 땅차이만큼 거리가 먼 종로 한 복판이었다. 그나마 선선한 날씨가 다행이었다.
물과 특별한 소금만을 먹은지 엿새되는 날이었던 어제 Y는 좀 힘들다고 했다. 사흘을 주기로 아픈 것 같다고. 단식을 하면 허기가 져서 먹을 것 생각이 많이 나고 유혹이 심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생각보다 먹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고 했다. 아무 것도 안 먹게 되면 오히려 먹고 싶어지는데, 물과 소금만 먹으면 그렇지 않더란다. 대신 냄새에 극도로 예민해져서 냄새만 맡아도 음식의 맛과 신선함을 점칠 수 있을 정도라고. 물의 냄새에도 예민해져서 물도 신선하지 못 마시겠단다. 음식을 먹는 대신 냄새를 맡는다는 그녀를 위해서 그녀가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하여 그 냄새를 맛볼 수 있게 해주려고 했다. 내 생각엔 고통만 있을 것 같은데 (물론 그녀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을 것이다) 그녀는 괜찮단다. 단식이 끝나면 단식기간의 딱 세배되는 기간동안 보식을 해야하는데, 보식때는 가능하면 물을 마시지 않는 게 좋단다. 물을 마시게 되면 식욕이 땡기게 된다고. 가루 선식만 먹으면 좋은데 먹기가 쉽지 않으므로 과일같은 것을 곁들여 먹는단다. 물은 식전후 2시간, 속이 완전히 비어있을 때만 먹을 수 있다고. 보식의 기간이 지나면 장어구이를 먹으러 가기로 Y와 약속했다.
친구 J와 만나기로 한 인사동의 <신옛찻집>은 입구의 너구리부터 예사롭지 않은 곳이었다. 아! 새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지난 주 연이틀동안 새똥의 축복을 접했던 나에겐 운명같은 곳이었다. 다행히도 이번엔 새똥의 축복이 나를 비켜갔다. 지난 새똥의 축복에 대한 Y동생의 이론에 의하면, 신께서 첫날 새똥의 축복을 하사하셨을 때 내가 그만 피해버려서, 에라 한번 더 받아라면서 두번째 정통으로 축복을 내려주신 거란다. 고로 난 새똥의 축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친구 J의 전혀 다른 해석에 따르면, 첫날 새똥의 세례를 피해버려 새의 원한을 사서 두번째로 분노의 응징을 받았다고도 했다. 어쩄거나 난 첫번째 해석이 맘에 드므로 전적으로 Y동생의 해석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믿거나 말거나.
밤을 새우기 위해서 들어간 어느 호프집(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에서 친구K가 들고온 럭떠리한 샴페인을 마시며 다시 한번 케익에 불을 붙여 우리-나와 동생L의 생일을 축하했다. 예상치않은 거품세례까지 받았다. 달콤한 케익과 상큼한 샴페인이 입안에서 돌고 돌았다. 내 정신도 뱅글뱅글 돌았다. 참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눈꺼풀의 나른한 공격엔 속수무책이었다. 나와 L은 잠의 유혹 속에 빠져들었다. 불편한 자세로 졸고 또 졸았다. 별로 취한 것도 아닌데 잠은 마구 쏟아졌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이랬을까. 우리가 잠의 나락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동안, S동생은 전화 몇 통 받더니 중간에 돌아가고 친구J와 K는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친구처럼 얘기를 나누느라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직선적인 K의 공격에 J의 대응도 만만찮아서 다소 과장을 하자면 전쟁터를 방불케했다. 즐거운 전쟁?! 사막에 떨어뜨려도 살아남을 J와 K다웠다. 손님을 초대한 주인장이 헤롱대는 동안 손님들끼리 알아서들 즐겁게 놀고 있는 형국이었던 게다. 참으로 유쾌함의 경지에 다다른 J가 없었다면 K를 어떻게 대접했을지, K가 없었다면 밤새울 각오를 단단히 하고 오라고 으름장을 놓았던 J를 어디서 재울지로 고민했을 이 잠꾸러기 주인장의 심정을 알아서들 헤아려 준 것이리라.
새벽4시까지 술자리는 계속되었다. 역시나 나와 L은 자세를 바꿔가면서 졸아댔다. 술집도 문은 닫아야하고 술을 마시면 노래방을 가야하는 게 정석인 K, 아니나다를까 이번에도 어김없이 노래방은 정식코스에 들어있었다. 어느 순간이든 잘 준비가 되어 있는 나와 L은 몇 곡 뽑은 후에 노래방 의자에 뻗어서 또 단잠에 빠져들고 K와 J는 서로 입맞춰 노래를 불러댔다. 주인장이 또 정신없이 잠에 빠져든 사이, 그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랬거나 말거나 난 계속해서 잠자고 싶었다. 차가운 커피 한 잔 들이키고 아쉽지만 우린 제각각 흩어졌다. 그리고 나는 밀린 회사일을 헤치워야 한다는 핑계삼아 사무실에 돌아와 사장님실 3인용 소파에 누워 퍼지도록 잠을 잤다. 몸은 추웠지만 발끝은 난로의 열기때문에 뜨거웠다. 잠은 달콤했다. 소사의 목소리처럼. 영혼의 울림이 텅빈 사무실을 가득 채운다. 난 지금 사무실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