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그녀, 정혜>란 영화가 개봉됐다. 비록 그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그 제목을 떠올리는 순간 얼마전까지 나와 함께 일하다가 피치못할 집안사정으로 그만두게 된 H가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H는 두달 전까지 나와 함께 일했다. 한 회사에서 일하면서 3년 남짓한 시간동안 어려운 고비를 여러 번 함게 겪었고 그 고통을 서로 이야기로 나누면서 풀어냈었다. 일로 부딪히는 일이 전혀 없었다곤 할 수 없지만, 남직원에 비해서 여직원이 많지 않은 터라 가능하면 우린 서로를 끌어안으려고 노력했다. 중간에 여러 직원들이 들어왔다가 해고되어 다시 나가고 정말 힘들 땐 둘만 남아 있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이런저런 집안 사정까지 알게 되었다. 그녀의 자존심에 그렇게 얘기하는 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거의 하루종일 붙어있어서 얼굴을 안 볼래야 안 볼수도 없고 표정의 세세한 부분까지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으므로, 때론 친한 친구에게도 차마 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털어놓는 분위기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부모님 이야기, 여동생 이야기를 많이 했다. 단, 그녀가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되도록이면 묻지 않았고, 그저 그녀가 해주는 이야기에서 그 전후 사정을 짐작할 뿐이었다. 그녀는 이야기를 참 재미나게 잘했다.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도 그녀의 손에 들어가면 그녀의 대담하고 풍부한 유머감각을 거쳐 생생하고 재미있게 각색되어 다시 돌아왔다. 그녀 부모님의 부부싸움 이야기, 동생과의 에피소드, 시집 안간 친구의 몸부림, 남자친구의 이야기 등.
얼마전까지도 그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묻지 않아서 몰랐는데, 다만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 전혀 수입이 나오지 않는 일이어서 그녀의 적은 월급으로 집안 살림을 꾸려나간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그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 정확하게 어떤 일인지 알게 되었는데, 내가 봐도 정말 돈이 되긴 힘든, 한마디로 대박날 확률이 거의 희박한 일이었다. 밑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그 일을 위해 그녀는 거의 10년 동안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모든 책임은 그녀에게 넘어오게 되었다. 같이 짐을 짊어져야 할 그녀의 이기적인 오빠도, 이제 갓 취업한 동생도 그녀에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제 나이 서른이 되어서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그녀는 목숨 걸듯 인생을 걸고 이 힘든 시기에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더이상은 대책없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기 위해서, 딸이 늙든 말든 시집을 가든 말든 마냥 자신들을 부양해줄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부모님에 의해 저당잡힌 자신의 인생을 되찾기 위해.
그런 그녀를 2주전에 봤을 때, 그녀는 많이 힘들어했다. 괜히 직장을 그만둔 것 같다고 후회했다. 자신의 힘든 상황이 그녀의 부모님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밑빠진 독을 채울 두꺼비같은 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예전 나의 충고대로 차라리 집을 나올 걸 그랬다고, 집에만 있으면 미칠 것 같다고도 했다.
2주전 회사가 여의도에서 문래동으로 이사하는 날, 그녀는 재수 옴지게도 없는 조가의 말을 듣고 나왔다가 사장의 애매모호한 충고-왜 나왔느냐, 누가 불렀느냐, 좀더 상황이 확실해지면 부르겠다(아니면 안 부르겠다는 말인가, 전에 4/1자로 출근하라고 할때는 언제고. 젠장)-에 맘 상해 집으로 돌아갔었다. (졸지간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린 그녀를 생각하면 정말 조가 놈이 미워죽겠다.) 그리고나서 지금까지 난 그녀에게 전화하지 못했다. 긍정적인 소식이 아니라면 차라리 안하니만 못하지 않을까 싶어서. 어제 비로소 사장님이 내게 의사를 물어보셨다. 내 일에 많이 도움이 될 것 같냐고. 좀 난감하긴 했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오랜시간 함께 있어서 맘도 잘 맞고 일에 대해서도 확실하다고, 사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냐고.
그래서 이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 전화를 했더니 안 받는다. 문자를 날렸다. 그녀가 아프단다. 지난 월요일부터 며칠 동안 정신없이 앓았단다. 사장님께 전화를 드리라고 말했는데, 알았다고 하고선 그때이후로 아직 연락이 없다. 2주 전 그날 이후로 너무 맘 상하여, 혹은 심하게 앓고 나면 변하는 사람도 간혹 있다던데 그래서 혹시나 심경에 무슨 변화가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된다.
어찌됐든, 무슨 일이든 그녀에게 좋은 일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