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터 예상해왔던 바이지만, 드디어 한 사람이 정리되었다. 나랑 2년 넘게 같이 근무하다가 P에 의해 밀려나고 잠시 다른 곳에서 일하다가 다시 우리 회사에 들어온 인물. 그때 저렇게 해서라도 들어와야 하나, 좀 구차하다고 생각했었다. 욱하는 성질은 있지만 솔직하고 좋은 분이어서 참 좋아했다.
떠나는 사람의 인터뷰:
A : 지금은 미련없어요. 전에 기술팀으로 일하다가 잘릴 땐 열받았었는데, 지금은 영업을 못해서 그런걸. 그래도 W가 많이 봐준 거지.
사실 내가 생각해봐도 많이 봐준 셈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지난 연말에 그만뒀어야 했으니까. 그래도 씁쓸함은 남는다. A의 해고가 어떤 큰 일의 전초전처럼 불길한 기운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아서. A와 이야기하다가 지금 회사 분위기에 대한 말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나도 이미 대충 눈치채고 있었던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뿌옇게 맴돌기만 하던 것이 구체적으로 가시화되었을 때 받는 충격은 생각보다 강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지금 우리 회사는 더 혼란스러운 상황-전국시대에 놓여 있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못 보고 못 들은 것처럼 살면 것이다. A말대로 지금 나는 나름대로 없으면 아쉬운 인물이므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살려면 그렇게 살 수도 있다. 공사 구분이 확실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인간적인 관계에 치중하고 있던 순진한 나로서는 그 관계의 허무함, 깨어진 신뢰성을 극복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게 문제이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이용하고 제 밥그릇을 챙기기에 바쁜 상황을 내가 얼마나 견뎌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우선 복잡한 내 머릿속을 위해서 삼파의 관계를 정리해보면,
1. 우파 : 사장. 어떻게든 회사를 살려서 끌어나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사실 내가 봐도 밑빠진 독에 물 붓기인 면이 없지 않다. 혹자의 말에 의하면 6개월 살다가 나와서 신용불량자가 되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평생 떳떳하게 살아오려고 노력한 인물에게 그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내가 봐도 그렇게 뻔뻔한 인물은 아니다. 모사장의 나쁜 영향으로, 혹은 각박한 현실때문에 점점 뻔뻔해지고 냉혹해지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가능한 한 손해를 덜 보는 선에서 조파를 떼어내려고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더불어 자기 맘에 안드는 박가 등의 인물도 조파에게 덤탱이를 씌울 속셈이다.
2. 조파 : 전 영업부장, 현 다른 법인체를 설립하여 사장이 되려고 하는 인물.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인물이지만 남들은 뭐 그럭저럭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내가 보기엔 영업력 별로 없고 큰소리만 치고 잘난 척만 해대는 절라 재수없는 인물이지만, 이상하게도 남들은 그를 무시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의 카리스마 운운하는 이도 있겠지만 아마도 그가 회사카드를 긁어대며 열심히 환심을 산 결과가 아닐까 짐작만 하고 있다. 어떻게든 우파에서 득되는 것만을 빼내려고 애쓰고 있지만 박가같은 아무 쓰잘데기 없는 인물때문에 골치가 꽤 아플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분리되어 나가서 얼마나 잘 사는지 지켜보고 싶은 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3. 서파-박씨 : 영업부 이사 서파와 영업부 과장 박씨가 손을 잡았다는 풍문이 최근에 내 귀에 흘러들어왔다. 모씨의 말에 의하면 지금까지 실질적으로 실세였던 우파를 폐위시키고-그에게 모든 짐을 지워 6개월 보내고- 새롭게 거듭나는 게 어떻겠냐는 심중을 암암리에 갖고 있다는, 나로서는 다소 충격적인 소문을 접하게 되었다. 어찌보면 전 회사에서 짤린 서파를 어떻게든 옆에서 끼고 챙겨준 게 우파이거늘, 그런 우파의 입장에서 보면 서파는 배신자인 셈이다. 박씨 또한 우파가 평소 아끼고 충실히 마음에 두고 있는 인물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이로서 두 사람의 냉정하고 냉혹한 면모-비록 소문일지라도-를 새로이 접하게 된 순진무구한 나로서는 그 두 인물에 대한 신뢰감이 깨어짐과 동시에 무서워졌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전에도 그 두 사람에게서 묘하게 그런 느낌을 받은 것 같기도 하다.
그외 인물들은 지금 관망하는 중이다. 내 입장은 우파에 가깝긴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하여 내 자신의 순진함을 개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억지로 부인하려고 했던 사실, 내가 힘도 없고 머리도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뼈져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그런 나를 보면서 불쌍하고 바보같다고 얼마나 비웃었을까. 하물며 이번에 물러가는 A 씨조차 장래를 위해 사적인 인간관계를 공적인 관계로 잘 확장, 유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이 확인된 이상, 감정적인 인간관계만을 앞세워 상황을 판단하던 미숙한 자아를 가지고 있는 내 자신의 우매함을 어찌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현실은 냉정하다. 냉혹하다. 이제 더이상 나도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살 수 없을 것이란 예감이 들어 슬프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바보같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나로선 정말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