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란언니 - 개정판
김은성 지음 / 연극과인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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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곡집 《목란 언니》에는 표제작과 <뻘>, <달나라연속극> 이렇게 세 편이 실렸다.

  이 가운데 <뻘>의 표지에는 “이 대본은 안톤 체홉의 <갈매기>를 모티브로, 김은성이 1981년 전라남도 벌교를 무대로 재창작한 작품입니다.”라고 쓰여 있고,

  <달나라연속극>의 표지에는 “이 대본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을 모티브로, 김은성이 재창작한 작품입니다.”하고 쓰여 있다.


  먼저 <목란 언니>. ‘목란’은 놀라지 마시라, 북한의 김일성이 만든 단어다. 원래 우리말 이름은 “함박꽃나무”, 정말 탐스럽게 잘 생긴 흰 꽃인데, 하루는 김일성이 꽃을 보고 너무 좋아 이런 꽃의 이름을 조선말로 천하게 지어 놓아 유감이다. 앞으로 “목란木蘭”이라 부르라. 해서 목란이 됐고, 어이없게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의 국화로 지정되었다는 거다. “목란”을 열라 검색해봐도 요리사 이연복이 운영하는 짬뽕과 탕수육이 맛난 중국집만 나오고 함박꽃나무 이야기는 저 아래, 검색창의 거의 제일 아랫부분까지 스크롤해야 읽을 수 있는 게 이유가 있었다. 나는 ‘목란’ 말고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목단’ 그리고 화투패에서 6월 모란꽃을 떠올렸지 뭐야.


함박꽃나무 (목란)


  <목란 언니>에는 등장인물이 스물여섯 명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들 전부에게 이름, 성별, 나이, 직업, 출생지, 거주지, 말씨를 특정해준다. 예를 들어 주인공 조목란. 여, 26세, 아코디어니스트, 평양生, 용인∙서울 거주, 평양말. 그리고 돈만 많은 과부 조대자 씨는 여, 55세, 룸살롱 주인, 부산生, 서울거주, 온갖말. 조대자 씨한테는 아들 삼남매가 있으니 첫째가 36세 먹은 한국사 박사이고 서울生, 서울말. 둘째가 33세의 철학박사로 대학 교수로 있지만 아뿔싸 대학의 학과 정리에 철학과가 포함되는 바람에 실직 위기에 처한 서울生, 서울말. 셋째가 외동딸로 이름이 허태양. 30세의 소설가, 조대자의 막내딸로 서울生, 서울말. 웃긴 건, 어떻게 삼남매 전부 먹고 살기 힘든 문∙사∙철을 시키느냐는 말이지. 일부러 그렇게 하기도 쉽지 않겠구먼.

  여기까지 얘기해도 뭔가 딱 떠오르지? 조목란은 평양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탈북민. 젊고 수더분하지만 야물딱진 여성으로 걱정이 한 가득이다. 5천만원을 모아 브로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아니면 자신이 다시 북으로 가던지. 북에 남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이리 데려오고 싶어서. 조대자 사장께서 탁 보니까 조목란이가 여간내기가 아니다. 그리하여 한국사 박사지만 집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는 우울증 환자이자 히키코모리인 허태산과 인연이라도 될까 싶어 허태산에게 기타와 아코디언을 가르쳐주게 한다. 허태강은 앞서 얘기한대로 실직이 코 앞이라 이제 시간 강사자리나 지방대학 조교수 자리를 찾아야 하는 신세고, 소설을 쓴 허태양은 소설은 써지지 않아 제법 돈을 받고 그럴 듯한 국회의원의 자서전을 대필하는 일을 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 대개의 작품에서 그렇듯이 태양은 싫다고, 싫다고 자존심 상해하다가 결국 대필을 해야겠지? 아니라고? 글쎄 두고 보라니까.

  허씨 삼남매를 이나마 키운 건 조대자 사장의 억척스런 삶이 있었기에 가능했겠지. 그렇지만 아이들은 엄마의 노고를 속으로 고마워하긴 하겠지만 그렇게 자랑스레 내놓을 수 없으니 오랜 세월 룸살롱 사장을 겪으며 무슨 짓을 안 했겠느냐 하는 것이지. 요즘 조대자 사장의 레이더에 꽂힌 사람이 재미교포, 아니, 한국계 미국인 강국식. 남자, 66세, 사업가, 도쿄生, LA 거주, 영어+일본어+서울말 사용자. 66세와 55세. 11살 차이니까 뭐 연인 비슷할 수도 있다. 정도 정이지만 둘은 떼돈을 벌 수 있는 합작 투자를 구상하고 있다. 아서라, 아서. 누가 “떼돈”을 벌 수 있는 아이템이 있다면 십중팔구가 아니라 백 중의 아흔아홉이 사기다. 거덜나고 싶으면 주저하지 말고 덥썩 물기만 하면 된다. 아니나 다를까, 저 뒤로 가면 조대자 여사가 조목단에게 허태산하고 좋은 관계가 되면 주겠다는 5천도 주지 못하고 거덜이 난다. 거덜이 날 정도가 아니라 일단 몸을 피신해야 하는 처지까지. 집안이 폭탄 맞는 거지 뭐.


  이게 한 가지 에피소드이고, 다른 하나는 탈북민 커뮤니티. 해방 이후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북청청년단” 같은 반공단체를 만들어 남쪽에서 가장 강력한 우익활동을 한 것처럼, 탈북민들이 남쪽에 정착해 모인 사람들도 자신이 직접 경험해보았기 때문에 단호한 반공단체를 만든 모양이다. 매스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대북 삐라 보내는 사람들도 이런 경우겠지.

  바야흐로 유사이래 언제나 멈추지 않았던 한국사의 난장판이 오늘도 벌어지고 있는데, 김은성은 이 난장판의 일부분이라도 한 무대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정말로 한 무대에서 스물여섯 명의 등장인물을 올려 한꺼번에, 사실은 순서에 입각해 모데라토, 혹은 알레그로비바체로 각각의 난장을 동시상영하며 막을 올리니, 다음과 같다.

  처음엔 서울의 한 강당에서 열린 [실향민 어버이 연합 큰잔치], 둘째가 대구의 교회 예배실과 북한 해주의 역전 광장, 셋째는 서울 룸살롱 [한류韓流] 당연히 조대자 사장, 다음엔 서울 허태산의 원룸, 서울의 국회의원실(허태양의 자서전 대필 의뢰 건), 북한 청진의 중학교 운동장, 인천 초등학교 교실, 원주 대학교 강의실(허태강의 철학과), 서울의 한 강당 [통일민주연합 청년대회],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말 제목이 “난장판 짬뽕.”

  이 가운데 처음부터 등장해 있지만 끝날 때까지 관객석을 등진 채 김일성 초상만 그리고 있는 남자가 있다. 조선호. 남, 55세, 화가, 조목란의 아버지, 평양生, 청진거주, 평양말. 그러니까 목란 언니 조목란이 어코디어니스트로 조대자의 집에 가서 조태산에게 기타와 아코디언을 교습하는 짬짬이 집안일도 도우며 돈을 벌고 있는 거다. 이 아버지를 데려오든지, 자신이 청진으로 돌아가든지 혹은 직접 가서 직접 데려오려고. 그러니 자연스럽게 극은 남쪽의 천민자본과 북쪽에서 온 사람들의 극성 우경화 같은 것을 모두 포함시킬 수밖에 없고, 판이 커져 드디어 난장판이 되어 버린다.

  근데 설마 인기 극작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김은성이 자기 작품을 이렇게 끝까지 정신 사납게 내버려 두겠어? 천만의 말씀이지. 난장으로 시작해 결말은 쓸쓸할지니, 기대하시라.


  <뻘>은 김은성의 출생지 전라남도 보성 근처 벌교를 무대로 1막부터 3막까지는 1980년 봄에서 1981년 여름까지. 3막 후반부터 4막은 1991년 겨울에서 다음해 봄까지. 1980년 봄의 전라남도라면 광주항쟁을 피할 수 없겠지? 맞다. 피할 수 없다. 그것, 항쟁과 관계없이 또는 어느 정도 관련은 있지만 새로운 대중예술을 하고 싶은 청년들과, 이곳 출신으로 잠깐 다니러 간 당대의 가수와 작곡가. 두 세대 간의 갈등도 있겠고, 화해도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결론은 아마도 안 읽으셨겠지만 비엣 타인 응우옌이 쓴 <방관자>와 비슷하다. 뭔지 안 알려드린다.

  <달나라연속극>을 재미있게 읽었다. 옥탑 단칸방에 사는 엄마-아들-딸, 그리고 아래층의 대학생 사이의 관계극. 작품의 주제는 내가 자주 하는 말과 같다. “뭐 사는 게 다 그렇지.”

  희곡집이 그리 인기가 많지 않아 사서 읽어보시라는 말은 못 하겠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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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6-03-20 0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5별 4별은 과한데 그렇다고 차마 3별은 너무한 것처럼 보여서리...

stella.K 2026-03-20 1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게 함박꽃나무라니! 예쁜건 아니지만 탐스럽고 후덕하게 생겼다고나 할까요? ㅎㅎ 암튼 우리 남한식 이름이 좋은데 목란이 뭡니까, 목란이가. 이담에 혹시 개를 다시 키우게되면 목란이라 붙여주갔습네다. ㅋㅋ

Falstaff 2026-03-20 15:44   좋아요 1 | URL
맞습네다!
주체사상 울부짖던 인간이 할 얘기임둥? ˝천한 조선말˝이라니 말입지. ㅎㅎㅎ
정말 우리말 좋지 않아요? ‘함박꽃나무‘ 아휴, 목란 이딴거 백만 개하고 절대 안 바꾸겠습네다! ㅋㅋ

:Dora 2026-03-20 16: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뻘을 남산예술센터 에서 봤던 기억이 났네요~

Falstaff 2026-03-20 17:26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까? 아후, 부럽네요. ^^
 
에티오피아 구지 G1 딤투 함벨라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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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미 좋아합니다. 맛있....기 바랍니다. 좋으면 연달아 벌컥벌컥 마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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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3-19 0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숭늉이 아닙니다.

유부만두 2026-03-19 09:20   좋아요 1 | URL
볶은 콩 우린 물입니다

Falstaff 2026-03-19 20:04   좋아요 0 | URL
맞아요, 걍 후루룩 마시면 됩니다. ㅎㅎ

페넬로페 2026-03-19 15: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산미 많은 커피 반가워요
구매하러 갑니다^^

Falstaff 2026-03-19 20:03   좋아요 1 | URL
저도 약간 신 멋이 나는 게 좋더라고요! ㅎㅎ
 
강변의 조문객 쏜살 문고
메리 셸리 지음, 정지현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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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리 셸리, 하면 당연히 <프랑켄슈타인>. 정말 다양하게 변질된 모습으로 유년 시절부터 경험한 캐릭터라서 오히려 작품을 읽지 않게 되는 명작. 그러나 귀동냥으로 한 번 읽으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프랑켄슈타인>을 쓴 작가. 하지만 오히려 이 작품이 작가 또는 독자에게 난처한 허들로 작용할 수 있으니, 독자는 메리 셸리의 다른 작품을 읽을 때에도 당연히 <프랑켄슈타인>을 염두에 두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단편소설도 마찬가지.


  《강변의 조문객》은 단편소설 아홉 편을 실었다.

  이 책뿐 만 아니라 메리 셸리를 읽기 전에 독자가 감안해야 했던 것은 이이가 18세기 말에 태어나 19세기 전반을 살다 간 작가였다는 점. 제인 오스틴의 딸 뻘이지만 윌리엄 새커리, 찰스 디킨스, 브론테 자매의 이모 뻘이다. 이걸 감안하지 않으면 작품이 어떨 것 같을까? 당연히 조금 촌스러울 수 있다. 지금부터 2백년 전에 쓴 소설이니 어쩌겠어?

  지금 읽기에는 너무 오랜 스타일이다. 2백년 전에 읽었더라면 재미 있었겠다는 의견에 동의하지만 21세기에는 아니다.

  게다가 머리 속에 들어 앉아있는 <프랑켄슈타인>의 그늘.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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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6-03-19 0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메리 샐리의 최후의 인간을 읽으면서 천재가 몰락하는 걸 보는듯했어요. 프랑켄슈타인을 쓴 어린 천재가 다른 사회적 경험을 모두 차단당했을 때,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재치만으로는 부족한 인간사의 다양한 디테일을 살려야 할때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차단당한 이가 결국 할 수 있는건 딱히 없구나 싶었어요. 메리 샐리는 지금 태어났다면 정말 역사에 길이 남는 대작가가 되지 않았을까싶어 안타깝더라구요.

yamoo 2026-03-19 09:19   좋아요 1 | URL
프랑켄슈탕인...한 작품으로도 역사에 길이 남을 이름을 남겼다고 생각합니다..ㅎㅎ
대표작이 넘사벽이면 다른 작품들은 모두 아쉬울 수밖에 없겠죠..^^;;
 
순수한 피 알라트리스테 시리즈 2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권미선 옮김 / 시공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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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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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베르테의 알라트리스테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 첫 작품인 <루시퍼>의 독후감에 내가 “레베르테의 대표적 작품” 운운했는데, 이제 그건 취소를 해야겠다. 출판사 책 소개에 당연히 들어가 있는 표현이라서 쓴 건 아니고, 일단 1편 <루시퍼>가 꽤 그럴 듯하게 시작을 해 시리즈가 가면서 스토리가 더 확장되면 꽤 근사하리라 여겨 출판사가 주장하는 작가의 “대표작”이란 표현을 옮긴 것이었다. 이제 두번째 작 <순수한 피>를 읽은 다음엔 설마 이 정도면 이름이 알려진 한 작가의 대표작은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저 심심풀이로, 카페에서 연인을 기다리는데 무료한 참에 카페 책꽂이에 아무렇게나 꽂혀 있어서 연인이 도착할 때까지 슬슬 넘길 정도의 책 수준을 조금 넘긴 정도. 목욕하고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에 책상에 정좌해 읽는 것이 옳다, 이렇게 말하면 곧바로 신경정신병동으로 후송 당할 수 있는 책.

  그리하여 1부 <루시퍼>에서 했던 말, “나는 “알라트리스테 대위” 연작을 나온 데까지 달려볼 생각이다.” 이건 지금 확실하게 취소한다. 두 권 읽었으면 됐다. 레베르테, 좀 지나서 딱 한 번만 더 보자. 아니면 말던가.


  1부에서 영국의 이교도 왕실과의 문제를 해결한 알라트리스테.

  기억하실 턱이 없어서 요약을 해드리면, 대귀족과 왕실 비서 알케사르가 두 검객, 알라트리스테와 시칠리아에서 온 괄테리오 말라테스타한테 마드리드로 들어올 두 영국 귀족에 대한 특정한 조치를 의뢰한 후, 곧바로 같은 자리에 종교재판관 보카네그라가 들어와 특정 조치 말고 아예 영국인들을 처단하라고 다시 의뢰한다. 두 검객, 말이 좋아 검객이지 쉬운 말로 청부업자는 돈을 더 주는 보카네그라의 의뢰를 우선으로 여기고 그들을 만나 싸움을 벌인다. 근데 알라트리스테가 자기 상대 영국인의 희생정신이 감동하는 일이 벌어진다. 깊은 인상을 받아 그들을 살려주어, 결과적으로 스페인과 영국 왕실 사이의 관계가 더 좋은 상태로 유지된다.

  하지만 알라트리스테의 덕분으로 스페인은 조금 더 명망있는 나라가 될 수 있었으나, 왕실비서 알케사르와 종교재판관 보카네그라, 자신의 임무 수행을 방해한 말라데스타는 알라트리스테에게 깊은 원한을 갖게 되고, 2부 <순수한 피>에서 이를 갚아주려 음모를 짠다.

  그러니 이 책은 1부부터 순서대로 읽어야 하는 시리즈. 물론 사건은 권 별로 개별적이라 볼 수 있지만 해당 사건이 왜 일어나는지, 왜 자유스러운 음모인지 알기 위하여 그렇다는 말이다.


  시작은 시대-추리물 답게 마드리드 마요르 광장에서 투우경기가 있는 날 새벽에, 산히네스 성당 앞에 한 인력거가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1부에서 알라트리스테가 궁중 귀족들을 만나게 해주는 사람이 순찰대장 마르틴 살다냐.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가 먼저 등장한다. 인력거 안에 죽은 사람이 하나 타고 있었거든. 그래서 지금 심통이 대단하다. 사건 때문에 여차하면 투우 축제를 볼 수 없을 수도 있으니. 시신은 이제 갓 50대에 접어든 노파. 사인은 목졸라 죽인 교살. 놀랍게도 시신의 손에 금화 50에스쿠도가 쪽지와 함께 쥐어 있다. 메모는 “미사를 올려서 명복을 빌어 주십시오.”라는 짧은 내용.

  이 쉰 살의 노파가 누구인지 앞서 말하면 재미가 없을 텐데, 뭐 설마 이 책을 몇 명이나 읽어보실 것이며, 읽더라도 읽기 전에 내 독후감 먼저 참고하실 분은 없으리라 생각해 무책임하게 알려드리자면, 놀라지 마시라, 수녀원에서 포주 역할을 하는 여자이다.

  시대는 1623년. 왕 필리페 4페는 그저 사람만 좋아 정무와 외무, 내무 같은 거엔 다른 비서관들에게 전권 위임하고, 사법은 거의 종교재판관들한테 넘겨주어, 남고 남는 시간에 프랑스에서 얻은 젊은, 아니, 어린 아내와 속닥거리기나 하고, 좋은 먹거리와 즐길거리만 파고 살았다. 그래서 당연히 궁정의 거의 모든 고귀족들은 왕을 장난감이나 유아기 소년으로 취급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써서 부정부패, 매관매직, 기타 나라가 거덜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 무엇일까 골몰하기에 이른다. 날이 갈수록 망해가는 스페인. 이를 지켜보기 힘들어 올리바레스 백작이 현재 스페인 성직자와 귀족의 돈줄인 이탈리아 제노바 은행 대신 신대륙과의 무역을 통해 금을 모은 포르투갈 은행과 협력해서 스페인 경제의 체질을 개선하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아니고 그리 멀지 않은 훗날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탐관오리들에게 모함을 당해 불운한 말년을 보낼 예정이다. 이 책이 올리바레스 백작이 전성기 무렵이라 생각하면 된다.


  종교재판관으로 대변되는 기존 권력자들 입장에서 보면 올리바레스가 눈에 가시이다. 그리하여 멀리 보면 그를 제거하기 위해서, 짧게 보면 포르투갈 금의 국내 유입을 막아 제노바 금에 의한 스페인 지배를 유지하려고 음모를 꾸민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보태는 게 있으니, 바로 얼마 전에 영국 왕실의 왕자 일행의 목숨을 살려준 알라트리스테를 제거하는 일. 이 일은 또 당시에 벌인 칼싸움에서 무승부를 기록한 시칠리아 검객 말라테스타의 협조를 헐한 값으로 얻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꾸민 일. 아도라시온 베니타 수녀원에 들어가 있는 발렌시아 여인 엘비라 델라 크루스를 지목했다. 이 수녀원의 실제적 주인은 후안 코로아도 수사와 훌리안 가르소 수사이다. 후안은 성당 전속 사제로 수녀원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고, 훌리안은 고해 수사. 둘 다 젊고, 키 크고, 멋지게 생겼으며 귀족의 자제. 사실 이 즈음 귀족의 자제들이 수사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전쟁에 나가지 않기 위하여 그랬다는 것이 작가 레베르테의 주장인데, 어려서부터 최고로 좋은 교육을 받아 마음 속에 악마가 들었더라도 입으로는 천사의 말을 나불대는 재주가 있어서, 수녀원의 수녀들을 몽땅 최면에 걸거나, 최면에 빠지지 않는 일부 수녀와 견습수녀한테는 지독한 가스 라이팅을 해, 후안의 경우, 자신과 살을 맞대는 것 자체가 천국에 다가가는 일이라는 환상에 빠지게 했으며, 고해수사 훌리안은 별것도 아닌 죄, 수녀원 안에서 죄를 지으면 얼마나 무거운 죄를 짓는다고 그걸 보속하기 위하여 자기 앞에서 홀랑 누워 있게 만드는데 선수였다.

  발렌시아 귀족의 딸 엘비라 델라 크루스가 이 수녀원의 수녀. 정신이 좀 말짱했는지 수녀원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아버지한테 말했고, 이에 열을 잔뜩 받은 아버지와 오빠, 동생이 칼을 벅벅 갈더니 마드리드로 쫓아와 먼저 궁정시인이자 한 시절 용감한 군인이었으며, 한 시절 칼과 단검과 권총 사용에 도가 튼 절름발이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를 찾아온다. 1부를 읽은 분은 아실 터. 알라트리스테와는 둘도 없는 전우 사이.

  케베도가 억울한 사연을 듣고 이들을 알라트리스테와 연결시켜주고, 비록 많은 보수를 요구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케베도의 부탁이라 성공하기가 매우, 매우 힘든 수녀원 공격을 감행하기로 한다. 하지만 아무리 날고 기는 알라트리스테도 몰랐던 것이 있었으니, 자신한테 원한을 가진 말라데스타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었던 것을.


  쉽게 말해, 말라데스테와 그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적인 종교재판관 보카네그라 신부는 벌써 이들이 수녀원의 담을 넘을 것을 알고 단단한 경비를 구축해 놓고 있었다. 당연히 알라트리스테, 케베도와 델라 크루스의 세 부자에 의한 수녀원 공격은 섬멸되고, 이 와중에 델라 크루스의 열여덟 살 먹은 막내 아들은 심한 상처를 입어 죽고 만다. 그리고 작품의 화자, 열세 살의 이니고 역시 말라데스타에게 포로로 잡혀 톨레도의 종교재판 형무소로 들어가니 이제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화형.

  왜 하형인고 하면, 엘비라 델라 크루스 수녀의 조상이 개종 유대인. 게다가 포르투갈 은행의 중요한 핵심인물이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순정하지 못한 피, 즉 유대인, 아랍인들을 극도로 박해하던 시절이라 유대인이 수녀원에 들어갈 수 없었고, 종교재판관은 이를 당연히 유대교에 의한 기독교 오염 의도로 해석해버렸다. 이니고를 잡아야 이니고를 미끼로 알라트리스테를 엮을 수 있을 거 같아서 몇 달 동안 톨리도 형무소에 잡아두고, 결국 화형대에 묶어 태워 죽이려 했던 것.

  근데 시리즈에서 주인공 급 화자가 설마 도중에 불에 타 죽기야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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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6-03-18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 책 있어요. 시리즈 3권인가 있는데, 아직 읽지 않았습니다만...별 3개면 읽지 말고 처분해야 겠습니다.ㅎㅎ 진짜 너무 읽을 책이 많아요..ㅜㅜ

Falstaff 2026-03-18 15:11   좋아요 0 | URL
집에 책이 있으면 1부 <루시퍼>만 읽고 어떤 책인지 감만 잡으셔요. 그냥 처분하기는 아깝잖습니까. ㅎㅎ
 
악어를 조심하라고? 문학과지성 시인선 53
황동규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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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장 속 30여 년 전에 사 놓은 시집 가운데 한 권. 즉 두고두고 읽는 시집이라는 뜻이다. 황동규는 뭐 말이 필요 없는 시인. 문학과지성 시인선 1번에 빛나는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부터 이 시인이 낸 시집의 오랜 독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근데 사실 요즘에 이이를 잘 읽지 않는다. 해서, 새삼스레 옛 시집을 꺼내게 된 것.

  지금은 같은 서울대 영문과 명예교수 처지이자 황시인보다 3년 선배인 유종호가 쓴 해설의 제목이 “낭만적 우울의 변모와 성숙”이다. 그러니까 이 시집의 주된 서정은 시인의 우울에서 시작한다고 봐도 괜찮을 듯하다. 평론가의 의견에 따르면 그 우울이 모습을 바꿔가며 성숙해지는 과정을 발견할 수 있는 시집인데, 우울 자체가 낭만적 우울에서 시작한다. 시집에서 낭만적 우울의 시작점은 2부에 실린 “풍장風葬” 열여섯 수에서 극점을 달한다. 많은 사람들이 황동규의 대표 시로 뽑는 연작인 <풍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길더라도 전문을 인용한다.



  풍장(風葬) 1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튀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전문. p.43~44)



  풍장의 매력은 사실 황동규가 가고 싶어하는 서해의 한 작고 버려진 작은 섬이 아니다. 건조한 고원이나 사막지대에 놓여 햇빛과 바람과 달과 별의 광선에 의하여 육신이 바싹 말라 비틀어진 미라 상태로 있다가 결국 하얀 백골만 남기게 되는 장례. 백골마저 가능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결국 풍화되어 모래로 돌아가는 길고 긴 과정이다. 사실 황시인이 바라는 것은 그가 평생동안 좋아하던 여행길을 나서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 바람과 놀게 해” 달라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풍장>의 우울은 이후 2, 3, 4… 계속 농도가 진해지기도 하지만 시인은 함께 놀 바람에 실려 우리 국토의 방방곡곡을 떠다닌다. “소주가 소주에 취해 술의 숨길 되듯 / 바싹 마른 몸이 마름에 취해 색깔의 바람 속에 둥실 떠…” (<풍장 2> 부분 p.45) 가면서 인왕산, 남산, 낙산 그리고 밀주를 파는 도시의 골목을 배회하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 루카치를 만나면 루카칠 / 바슐라르 만나면 바슐라를 / 놀부 만나면 흥부를…”(<풍장 4> 부분. P.48) 죽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시집이 다 우울한 건 아니다. 그러면 황동규가 아니지. 1부의 시작은 오히려 생기에 충만하다. 제일 앞에 배치한 시를 읽어보자.



 



  나는 나무들이 꽃을 잔뜩 피워놓고

  열매가 생기기를

  우두커니 서서 기다린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사방에서 벌이 잉잉거릴 때

  꽃들은 먼발치서 달려오는 벌을 맞으러

  하나씩 문을 열 것이다.

  꽃송이 하나하나가

  마침 파고든 벌을 힘껏 껴안는

  이 팽팽함!


  배나무나 벚나무 상공(上空)에서

  새들은 땅 위에서 환한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잠시 천상(天上)과 지상(地上)을 잊을 것이다.  (전문. P.11)



  이 시에서 읽을 수 있는 생기와 발랄함은 두번째, 세번째 시 <삶에 취해>, <별>에서도 계속된다. 그런데 이 시들은 1982년부터 85년까지 <풍장> 시리즈를 쓰고 난 다음인 1985년~86년에 지은 노래들이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도 가장 폭력적이었던 5공화국 시절. <풍장>은 시가 갖고 있는 우울 때문에 그렇다고 쳐도, 이 시절에 <꽃>처럼 생명 가득하고 발랄한 시를 발표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때이다. 참여와 저항과 외침의 노래 아니면 백안시 당하던 비극의 시기였으니. 세월이 한참 지나 과거의 한 페이지가 된 지금 생각해보면, 그나마 황시인 같은 모더니스트가 그 당시에도 노래하고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마음도 들게 된다. 이게 다 세월의 힘이겠지. 그걸 방에 틀어박혀 숨죽여 읽고 키득대며 좋아하는 독자들도 있었겠지. 내놓고 모더니즘 시를 읽는다는 말도 못하면서. 그러면서.

  모더니스트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더 없는 서정시를 쓴 시인 가운데 한 명인 김종삼 시인이 죽었다. 1984년 겨울이다. 길음성당에서 있었던 장례미사에 황동규가 참석했다. 그날 하늘에서 점박이 눈이 내렸다.


  점박이 눈이 내렸다.

  가늘게 검정테 두르고

  가운데 흰 점 박힌 눈송이들

  머리와 어깨에 쌓였다.

  성당 정문에서 천상병(千祥炳)씨 부인과 인사 나눴을 뿐

  문학판 사람들은 하나도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그때 어디 있었는가, 오버?”

  “프라이버시 침해하지 말라, 오버.”)

  낯선 문학청년 하나가

  눈 맞은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사진에서 뵌 선생님이시죠?

  저는 김종삼 시인을 사랑한 놈입니다.

  발자국 따르다보니 예서 그만 끝이군요.

  앞으로 무슨 맛에 살죠?”

  내 장례식에 혹시

  이런 허황되고 멋진 청년이 올까?

  (온다면 깊이 잠들기 힘들리.)  (<점박이 눈> 부분. p27~28)


  84년 겨울. 제대하고 그동안 집구석은 한층 더 폭삭 망해버려 이부망천이라, 서울 사람이 이혼하면 부천가고, 쫄딱 망하면 가는 곳이라는 인천의 작고 작은 집으로 밀려간 시절이었구나. 그새 졸업해 병원 약사 일을 하던 사랑은 당연히 나를 철퍼덕 밟고 지나가버리고, 복학하려니 등록금 구하기가 죽을 맛이던 시절. 그래도 경애하는 김종삼 선생, 전화라도 한 통 하고 가시지. 나 졸업한 서라벌중학교, 대일고등학교에서 세느강만 건너면 바로 길음성당이었을 텐데. 혹시 알아? 잘 하면 내가 그 허황되고 멋진 청년이었을 지도?

  (정말 이것까지 생각하고 쓴 독후감 아닌데, 오늘이 “나를 철퍼덕 밟고 지나가버”린 사랑의 꽤 묵은 생일이구나. 좋다, 해피 버스데이 투유. 우리, 다시는 기억도 하지 말자.)


그건 그거고, 황시인은 이렇게 서정시인, 모더니스트들에게 편지도 보내고(김정웅, 유평근, 마종기) 애도하기도 한다(김현). 그러나 딱 한 명 예외가 있으니 니힐의 아나키스트 김수영(金洙暎). 표제시 <악어를 조심하라고?>의 3부 “종묘 앞 싸락눈”에서다. <악어를 조심하라고?>가 워낙 길어 딱 이 부분만 따와보자.



  《악어를 조심하라고?》


  3. 종묘 앞 싸락눈



  싸락눈 솔솔 뿌리는

  종묘 앞 숯불돼지갈비집


  단성사서 영화 보고 싸락눈 맞으며 걸어가

  잠긴 문틈으로 저 낮고 긴 지붕의 집 종묘가

  곱게 눈 맞으며 서 있는 것을 보고

  동양의 파르테논 어쩌구 헛소리를 하며

  겁먹은 듯 서 있는 조랑말들 사이를 지나

  김수영(金洙暎)씨와 몇 번 들른 집

  잘 모르는 소리 지껄이는 건

  지금도 매양 마찬가지

  “탈[mask] 이론은?”

  (베아트리체를 사랑한 불한당 단테를 보라.)

  “객관 상관물이란?”

  (兩人對酌山花開 <李白>―둘이 서로 술 따르니 막 산꽃이 핀다,

  혹은 OB잔 부딪칠 때 배호의 노랫소리)

  모를 듯 알 듯 모를 순간

  기도(氣道) 조이는 그 쾌감


  가만!

  지금 내 정신 상태 제대로 보여줄 객관 상관물은?

  (아파트 계단을 도로 기어 내려가는 악어?)


  하긴 텔레비나 영화에 등장하는 동물 가운데

  그래도 제일 길 안 드는 게 악어더군

  성(聖)타잔도 길들일 수 없는……


  “황형, 혼자 술 드는 폼

  여직 생생하군요.”

  귀익은 목소리에 얼핏 뒤돌아보니

  민음사판 전집 사진 속에서처럼

  티셔츠에 앙상한 몰골로

  김수영이 앉아 있다,

  양복 윗도리를 술상에 걸쳐놓고

  3센티쯤 자란 머리카락에

  입웃음을 웃으며.

  (하략)  (<악어를 조심하라고?> “3. 종묘 앞 싸락눈”의 부분. p.22~24.  2연의"겁먹은 듯 서있는 조랑말들"은 당시 우리나라 수도 서울을 종횡무진 날아다니던 택시, 현대 포니 자동차를 말하고 있다.)



  이 시집 중에서도 긴 시들을 소개하는 바람에 독후감이 한없이 길어진다. 더 이상 쓰다가는 욕 먹겠다. 별로 한 말도 없이 이거 영 모양 안 나오는군. 하여간 하고 싶은 말은, 황동규, 이 양반을 괜히 대접하는 게 아니었다는 거. 어떻게 시편들이 길면서도 깔끔하고, 서늘하고, 공감이 가는지 말이지. 황동규 선생은 모르겠고, 나 사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황선생의 부친, 황순원 선생의 산소라도 한 번 가볼까? 아냐, 아니다. 내 부모 산소에도 자주 가지 않으면서 남의 부모 산소까지 들먹이기는 좀 그렇지.

  아참. 잊고 따오지 않은 시 한 수가 있다. 그거 소개하면서 긴 독후감 끝내자.



  풍장 9



  바람이 어디로나 제 갈 데로 불 듯

  서산 마애불을 만나러 갔다.

  마을마다 댓잎 가장자리는

  늦겨울 가뭄에 백동(白銅)색으로 익고

  얼었던 길은 처음으로 녹으며

  춤추는 봄눈을 대숲으로 날려주었다.

  마른 오징어와 함께 가서

  오징어는 먹고 소주는 몸 속에 뿌리고 왔다.  (전문. p.56)



  재미있지? 서산 마애불 기행도 인터넷 어느 한 곳에 쓴 적 있는데, 혹시 검색해보면 나올지 몰라? “그 미소 천년을 이어가시라”로 검색하니까 뜨네. 근데 그거보다 마지막 행, “오징어는 먹고 소주는 몸 속에 뿌리고 왔다.” 이 중에서도 “소주는 몸 속에 뿌리고 왔다.”가 얼마나 감개무량한지. 소주를 왜 뿌려? 죽은 사람한테나 뿌리는 게 술이다. 그래서 ‘나’가 이미 죽은 ‘나’한테 대한 풍장이 완성되는 것. 으아. 이러니 내가 황동규, 황동규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지. 물론 소주 이야기 나오니까 더 환장을 하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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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6-03-17 05: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종묘앞에 싸락눈 내릴 때 시인이 읊은 한시가 李白이 쓴 술 마시자는 시인데, 어떻게 모두 쉬운 한자로만 되어 있어 심지어 나도 외우고 다닌다. 어디가서 잘난 척하기 좋~다. 전문 읊어보겠다.

兩人對酌山花開 둘이 권커니 잣커니 하니 산에 꽃 피네
一杯一杯復一杯 한 잔, 한 잔, 또 한 잔
我醉欲眠卿且去 나는 취해 이제 자려 하니 자네는 이만 가서
明朝有意抱琴來 내일 아침에 또 생각이 있거든 거문고 품고 오게나

Falstaff 2026-03-17 0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훈수를 조금 더 두어야할 거 같다.
악어. 1980년대 초중반에 뉴욕 하수구에서 누군가가 애완용으로 키우던 다 큰 악어가 탈출해 하수도에서 살았던 적이 세계만방에 알려졌다. 이리하여 도심 한 가운데의 맹수....라는 썸뜩함 때문에 여러 장르의 예술이 이 악어를 차용했다. 당연히 할리우드의 악어 시리즈도 이 때 나왔고,

곰돌이 2026-03-17 07: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30년이라는 폴스타프님의 시간까지 더해져,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읽혔어요. 다음 상영도 기다립니다. (좀 더 길게 담아주셔도 괜찮은데 말이죠, 쿨럭)

Falstaff 2026-03-17 07:48   좋아요 2 | URL
이이 이후에 읽은 시집이 장석남 한 권밖에 없어요. 너무 시를 안 읽는 거 같아서 김선우의 시집을 예약해놓았고요.
황선생의 시와 비견하려면 또다른 황인 황지우 정도는 데려와야 이야기가 될 텐데, 황지우 뜨면 또 이성복, 최승자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안 불러주면 승질낼 거 같아요. 흑흑...

잠자냥 2026-03-17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읏- 제가 소싯적에 읽은 시집이라 참 반갑네요.
제가 몰운대행 읽고 정선까지 갔었다는 거 아닙니까. ㅋㅋㅋㅋ
황동규 황지우 이성복 최승자....다 소환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ㅋㅋㅋㅋ

Falstaff 2026-03-17 09:54   좋아요 1 | URL
앗, 몰운대! 나도 갔다왔어요! 비록 작은 정자 하나 말고 볼 거 없어도 크, 드디어 왔군, 언덕 아래 내려다봤습지요. 근데 거긴 공중화장실도 없고, 가락국수도 올챙이국수도 파는 집이 없더라고요. ㅋㅋㅋ 더 반갑네요. 몰운대 정말 다녀온 분 만나니 말입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