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인 악사 대산세계문학총서 164
블라디미르 갈락티오노비치 코롤렌코 지음, 오원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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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블라디미르 코롤렌코의 생몰이 1853~1921, 주요 작품은 1886년 결혼하고 10년간에 집중해 있다. 폴타바에서 출생한 우크라이나 코사크 출신인 아버지는 당시 시각으로는 놀라운 정도로 뇌물을 받지 않는 정직한 지방판사였으며, 어머니 에벨리나 스코레비츠는 폴란드 출신으로, 코롤렌코가 어렸을 때는 도무지 자신이 어느 족속/종족에 속하는지 몰랐다고 한다. 제일 먼저 정식으로 배운 언어가 엄마의 모국어인 폴란드였는데, 1863년 폴란드 독립운동(의 실패) 이후 선택에 대한 강요로 러시아 국적 및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1866년, 코롤렌코가 겨우 열세 살일 때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어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 기술대학에 다니다 혁명 사상을 가진 젊은이가 (당)할 수 있는 많은 일을 다 (당)하고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작가, 언론인, 인권운동가, 그리고 무엇보다 “인도주의자”로 이름을 높인 이다. 진짜로 위키피디아를 검색해보면 아이고, 일단 분량이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앞으로 작품(집)이 나온다 해도 또 읽지는 않을 거 같으니 굳이 이이의 바이오를 더 소개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굳이 아빠가 뇌물을 받지 않아 당대 시각으로는 마치 돈키호테 같은 희한한 지방 판사였다는 거, 엄마 이름이 ‘에벨리나’였다는 것을 밝힌 건, 청렴한 지방판사 아빠는 <나쁜 패거리>의 일찍 홀아비가 된 정의로운 지방판사가 등장하며, 엄마는 이 책의 타이틀 롤인 <맹인 악사>에서 폴란드 귀족 출신 토지 관리인의 딸이자 여주인공 이름으로 나오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작가의 사생활이 작품 속에 슬쩍 나오는 걸 발견하는 게 은근히 재미있지 않으신가? 나는 그런데. 뭐 그렇다는 얘기다.


블라디미르 코롤렌코의 초상.  일리야 레핀 그림


  읽기에 괜찮은 단편소설 셋과 타이틀 롤 중편소설 하나를 실은 작품집이다. 중단편의 스토리를 소개하는 건 조금 위험하다. 그래도 이 책에 실린 <맹인 악사>는 178쪽에 이르며,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 시리즈 구 판형의 편집을 감안하면 웬만한 요즘 한국 장편소설 이상의 분량이라 줄거리 소개에 부담이 크지 않다.


  우크라이나 남서 지방의 부유한 지주 포펠스키 씨 집안 일이다. 작품은 포펠스키 씨의 젊은 아내 안나 미하일로브나 포펠스카야의 출산 장면부터 시작한다. 산고를 치르고 있다. 초산이라 독한 고통 끝에 사내 아이를 낳는데, 엄마는 진통 후의 나른함이 아니라 유난히 그악스러운 울음을 우는 아기가 걱정이다. 저 작은 것이 저렇게 힘들게 우는 건 무슨 이유가 있어서 일 것이라는 본능적인 두려움. 물론 독자는 이미 짐작을 한다. 제목이 ‘맹인 악사’이니 아이는 맹인으로 출생해 훗날 악사,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가 될 것이라 생각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게 맞다. 아이는 세상에 나올 때부터 시신경이 없는 상태로 태어났다. 그게 서러워 유난히 울부짖듯 울었을 것이라고 엄마는 평생 생각했겠지.

  가족의 구성원은 아버지, 어머니, 아기의 외삼촌 막심 미하일로비치, 그리고 아기. 이렇게 네 명이다. 아버지 포펠스키 씨는 우크라이나 남서쪽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착실하고 근면한 농촌 지주이다. 선량하고 친절하고 일꾼들 잘 보살피고, 취미로는 물레방아를 만들거나 다시 개조하는 걸 좋아한다. 쉬운 얘기로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란 얘기다. 아무리 건드려도 성내지 않는 온화한 남성. 그러니 맹인 아들 하나만 딱 낳고 다시는 아이를 만들지도 않았지. 근데 우크라이나 물방앗간은 우리와는 달리 남녀상열지사가 생기지 않는 곳인 모양이다, 그지? 엄마는 세상의 모든 엄마와 비슷하게 하나밖에 없는 아이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도 있는 헌신적 엄마. 그런데 문제는 외삼촌 막심이다.

  외삼촌 막심은 키예프와 키예프의 가장 험한 동네인 시장에서 제일 유명한 싸움꾼으로 악명을 떨쳤다. 우크라이나, 키예프, 그리고 코사크족. 근데 생각을 조금 바꿔보자. 이 동네 출신 가운데 유명한 작가가 몇 있다. 그 가운데 러시아 문학에 가장 큰 자취를 이룬 니콜라이 고골. <타라스 불바>를 봐도 그렇고 《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회》를 읽어도 그렇고, 이 근동의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악마적 폭력성을 (아니겠지, 아니겠지만 휘까닥 바꿔 생각해보면) 약한 미덕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듯도 하다. 하여간 지역의 대표 어깨로 활약해 장바닥에 얼굴을 내미는 것만 가지고도 주민들에게 무한 공포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던 막심은, 당연히 젊은 시절에 그랬다는 건데, 어느 날,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큰 포부를 펼치기 위해 이탈리아로 건너가 가리발디와 한 패를 이루어 대 오스트리아 전쟁에 투신했다. 거대한 몸집과 대단한 완력을 쏟아내는 막심이 가리발디한테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 지는 안 보고도 알 수 있겠지. 그러다가, 한 번은 장창을 꼬나들고, 19세기지만 소총의 연발 사격 속도가 부실해 백병전이 전투를 가름하던 때라 정말 말 위에서 긴 창을 휘두르던 시기인데, 적진을 향해 돌격하다가 꾀바른 오스트리아 군사 하나가 말의 발모가지를 타격하는 바람에 적진 한 가운데에서 낙마를 했고, 이걸 그냥 둘 오스트리아 군사들이 아니어서 자근자근 짓밟아주었고, 조금 시간이 흘러 이탈리아 독립군이 구출을 해 목숨보전을 했으나, 오른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으며, 왼손도 이젠 그냥 시늉으로만 달고 다녀야 했다. 그래서 어떡해? 남의 나라인데. 다시 우크라이나로 와 키예프의 집구석에 들어가기엔 보는 눈이 성가셔, 마침 매제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 여동생 안나의 집에 쳐들어가 함께 살고 있었던 거다.

  이제 장애로 인해 지팡이를 짚어야 하는 늙은 전사는 폭력성 대신 만신창이가 된 몸 속에서 뜨겁고 선량한 심장이 고동치고 덥수룩한 억센 머리털로 뒤덮인 크고 네모난 머리 속에서 지칠 줄 모르는 사고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대로 나이를 먹었다는 말이다. 누이 안나가 앞을 보지 못하는 아이에게 맹목적인 배려를 하는 건 아이의 시각을 대체할 예민한 다른 신경기관이 발달하는 데 오히려 크게 방해할 수 있다고 조언하며 아이가 주어진 상황 아래 자신에게 허용된 (시각을 제외한)외적 인상을 고양시킬 수 있도록 교육을 맡게 된다. 그리하여 막심 외삼촌은 선천적으로 맹인으로 태어난 표트르 포펠스키의 스승으로 아이의 성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맹인 악사>는 선천적 맹인 표트르 포펠스키가 태어나는 것으로 시작해, 유년, 소년, 사춘기, 청년, 혼인 등 연대기 적 서사로 썼다. 주인공이 맹인 표트르이기 때문에 주연급 조연인 막심이 이 가족과 함께 살게 된 내력을 알려주는 것 말고는 철저하게 시간 배열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런 방식은 현대 소설 중에선 아주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간을 10으로 본다면 소위 “현대” 소설은 4, 5, 6 정도, 아니면 7쯤에서 시작해 예컨데 7, 8, 3, 4, 5, 6, 1, 2, 9, 10 이런 식으로 스토리를 섞는 것이 일반이라 이 작품처럼 1, 2, 3… 9, 10 같은 나열은 진짜 오랜만에 읽는다. 아마도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 작품에서는 읽었던 것 같다.

  <맹인 악사>는 1886년에 발표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작가 블라디미르 코롤렌코는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등 선배 작가들보다 한 세대 이상 차이가 나는데, 나는 아무리 좋은 방향으로 읽으려 노력해도 그들을 능가하기는커녕 비슷한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투르게네프야 러시아 토종이라기보다 유럽을 모방한 측면이 강하지만,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물론 더 앞으로 나가면 고골은 확실하게 러시아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작품을 썼고, 이런 면에서 코를렌코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히려 선배 세대 작가들보다 코롤렌코의 스타일은 전혀 진화하지 못한 것으로 읽었다. 하긴, 선배들의 그림자가 워낙 크고 깊기는 하다.


  “그런 영혼을 지닌 사람들은 감정이 결핍되어 흔히 지나치게 냉정하고 지나치게 신중하게 보인다. 그들은 세속적 삶의 열정적 호소에 둔감하며 마치 아주 명백한 개인적 행복의 길을 가듯이 애처로운 본분의 길을 조용히 걸어간다. 그들은 눈 덮인 산봉우리처럼 냉랭하고 장엄하다. 일상의 비속은 그들의 발아래에 널려 있다. 심지어 중상과 험담은 마치 백조의 날개에서 진흙 부스러기가 떨어지듯 눈처럼 하얀 그들의 의복에서 굴러떨어진다….” (p.244)


  18세기 말이나 19세기 초에 출간한 독일 소설에서 볼 듯한 문장과 사유법이다. 이미 서유럽에서는 이런 경향을 졸업하고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를 향유하는 단계였다. 에밀 졸라가 <목로주점>을 출간하고 10년 가까이 흐른 시점이고, <제르미날>이 1년 전에 나왔으니 아쉬울 수밖에.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는 다음으로 하고, 오히려 같은 지역 사람인 니콜라이 고골에 비해서도 한 수 너머 접히는 구성과 문장과 스토리, 이것들을 다 합해 ‘스타일’ 아닐까 싶다. 다만 하는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읽을 만하……지만 추천할 만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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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0-15 1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시간 순서 보는 법 생각 거의 안하고 읽었는데 이런 게 있었네요. 아직 톨스토이와 도끼 옹의 책을 다 떼지 못한 저로선 일단 저 문학의 신들의 작품을 다 읽고 혹시 시간이 남으면 들춰봐야겠네요. ㅋ

Falstaff 2024-10-15 10:24   좋아요 1 | URL
시간 순서, 근데 정말 그런 거 같지 않아요? 아이고, 이거 제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든 거 아닌가 싶어 좀 캥겼었거든요. ㅎㅎㅎ

stella.K 2024-10-15 10:29   좋아요 1 | URL
믿쑵니다! ㅎㅎㅎ

그레이스 2024-10-16 0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믿고 패스!

Falstaff 2024-10-16 20:43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그래도 혹시 도서관에서 발견하시면 읽어보셔요!
 
과도기 - 한설야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40
한설야 지음, 서경석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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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북 작가 한설야가 1925년부터 48년까지 쓴 단편소설 17편을 실은 단편선.

  한설야가 누구야? 학교 다닐 당시에 한설야는커녕 정지용조차 정X용으로 표기해야 했던 시절이라 한설야는 정말 늦게, 아주 늦게야 알게 된 작가이다. 그래서 먼저 한설야에 관해 뒤져봤다. 본명은 한병도韓秉道. 1900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삼수갑산에 가더라도…” 할 때의 ‘삼수’ 군수를 지내고 이후 차례로 의사, 광산업을 경영한 나름대로 부르주아 양반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때도 함흥 하면 제법 큰 도시인데 수재로 이름이 났던지 지금의 경기고등학교, 당시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해 유명한 공산주의자 박헌영과 동기동창이 된다. 이후 함흥고보로 전학해 1919년에 졸업을 했지만 딱 그 해가 기미년.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인생 처음으로 석 달 동안 소위 ‘나랏밥’을 먹었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1년 동안 공부하다 돌아와 이것저것 하다가 마음먹은 바가 있어 1923년에 도일, 니혼대학 사회학과에 들어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사회주의/공산주의에 가담했다. 그러나 1923년의 도쿄라니. 당시 도쿄에 살던 조선 유학생들은 관동대지진에 이은 조선인 학살 사건에 기겁을 해 거의 대부분 귀국선에 올랐는데, 한설야, 아니지 한병도도 불과 몇 개월만에 돌아와, 그것도 유학생이라고 교사 생활을 했다.

  1925년 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그 날 밤>으로 등단, 만주 봉천 등지를 전전하다가 27년에 귀국해 카프에 가입한다. 잡지 편집과 조선일보 기자 등을 하다가 카프 사건에 연루되어 1934년, 이이가 아들만 넷인데 막내 아들이 태어난 해에 전주 감옥에서 1년 동안 두번째 ‘나랏밥’을 먹었다. 만주 봉천에 살다가 귀국하는 이야기, 임신한 아내를 두고 감옥에 들어간 이야기가 이 단편집 《과도기》에 여러 번 나온다. 자식 가운데 쌍둥이 형제가 있다는 얘기도 당연히 나온다. 1943년엔 전쟁이 세 불리하게 되자 발악을 하기 시작한 일본 경찰에 비밀 결사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세번째 ‘나랏밥’을 자시다가 1944년에 병보석으로 석방된다. 해방 후인 1945년 9월엔 잠깐 상경해 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결성하고 좋은 요릿집에서 잘 때려 먹은 뒤에 돌아갔다. 그러니 한설야는 “월북작가”가 아니다. 애초에 생활하고 작가 활동을 북쪽에서 했다. 그냥 살뜰하게 공산주의 작가라고 보면 된다. 1948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잘 나가다가 1962년 12월에 숙청당했다. 1963년에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춥디추운 자강도 협동농장으로 쫓겨가 모진 목숨 이어가다가 1976년에 숟가락 놨다. 세월이 흘러 다시 복권이 되어 지금 한설야는 백골이나마 애국열사릉에서 누워있다.


  이렇게 우리나라 경향문학을 대표하는 문인 가운데 한 명인 한설야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본 것이 《과도기》를 읽은 최대의 수확이다. 열일곱 편의 단편소설 전부, 말 그대로 한 편도 빠짐없이 사회주의적 계몽소설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같은 공산주의 진영의 작가라고 해도 이기영이나 이태준, 일찍 죽은 강경애하고 비교도 못할 만큼 재미(재밋대가리) 없는 소설만 쓴 거 같다.

  게다가 마지막 두 편, <모자>와 <혈로>는 가관이다. <모자>는 우크라이나 출신 소련군 장교가 북조선에 들어와 조선의 가난한 소녀를 보며 대 파시스트 전쟁 당시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학살을 당한 자기 딸을 오버랩 시키는 작품이며, <혈로>는 위대하신 김일성 장군님이 신출귀몰한 전법으로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어) 일본군대를 격멸시키는 영웅위인전 성격이 짙다. 하여튼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이런 짓을 했으니 대부분의 부르주아 출신 문인들이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에 숙청을 당해 골로 간 데 비하여 꽤 오래 잘 먹고 잘 살았겠지만, 나치와 일본 군부보다 더 파시스트 적 독재정권 아래 작가 생활을 하는 자체가, 말을 말자. 이게 무슨 소설이고 문학작품인가 말이지.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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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메시스 현대사상의 모험 28
에리히 아우어바흐 지음, 김우창.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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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2년 11월에 독일 베를린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에리히 아우어바흐를 알게 된 첫 계기는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 <소설>을 통해서였다. 인상깊기는 했지만 아우어바흐라는 비교문학 학자가 있었고 그의 저서 《미메시스》가 명저라는 것만 기억했다. 나는 미치너의 <소설>을 읽고 51개월이 지난 후 튀르키예 작가 쥴퓌 리바넬리가 쓴 명작 <세레나데>를 읽는다. 이 속에서 두 주인공, 유대계 독일인 막시밀리안 바그너 교수와 이스탄불 대학의 계약직 공무원 마야 두란의 대화를 통해 《미메시스》는 꼭 읽을 책으로 구체화되어 <세레나데>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마자 구매 버튼을 클릭했다. 이후 열 달이 또 지났고, 9월 중순이 되었으나 여전히 수은주가 30도 위를 맴도는 뜨거운 초가을에 이 책 읽기를 마쳤다.

  사 두기는 했지만 엄두가 선뜻 나지 않았다. 두 달 이상이 걸렸다. 목차를 보니 각 챕터가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읽을 분량으로 적절하게 나뉘어 있었다. 무릎을 쳤다. 이런 책은 앉은 자리에서 단박에 읽어 치우려면 낭패를 보는 법, 시간이 생길 때마다 한 챕터씩 나누어 읽자. 그리하여 7월부터 근 두 달에 걸쳐서, 하루 가운데 가장 머리가 맑은 시간, 늦어도 새벽 다섯 시쯤 정말로 한 챕터씩, 딱 그 정도만 읽었다. 숙취가 남은 날은 책을 펴지 않았다. 개도 걸리지 않는다는 여름 감기가 들어도 이 책 읽기를 삼갔다. 그렇게 공을 들였다. 그렇게 공을 들일 만했다. 매서운 바람이 횡행하는 튀르키예의 겨울해변에서 파랗게 언 채 바이올린으로 “세레나데”를 연주하던 늙은 유대인 교수 막시밀리안 바그너의 《미메시스》에 대한 찬사는 틀림이 없었다. 다만 서양 문학의 사실적 묘사에 관해 80년 전에 쓴 비교문학이다. 시간이 흘러 아우어바흐의 논점이 올바르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이제는 그의 관점 자체가 조금은 바랬다고 해야 할듯하다. 《미메시스》보다 2,500년 전에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는 여전하건만, 정작 <오디세이>를 논한 《미메시스》는 80년만에 (영락없는 아마추어가 읽기에)조금은 빛이 바랜 것처럼 보인다니 비평의 무상함이란….

  에리히 아우어바흐는 같은 세대의 혈기왕성한 유대계 독일 남성이 그러했듯이 독일 국민의 자격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종전 후 그라이프스발트 대학에서 로망스어를 공부해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929년에 마르부르크 대학의 문헌학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1935년 나치 정권은 그의 교수직을 박탈했고, 신변상 위험을 감지한 아우어바흐는 독일을 탈출해 튀르키예에 정착, 36년부터 이스탄불 대학의 유럽문학 학과장의 자리를 얻는다. 이후 10년간 튀르키예와 이스탄불 대학의 충분하지 못한 자료 때문에 오히려 유럽의 중요한 문학작품을 원본으로 다시 읽어야 했던 아우어바흐는 기존의 수다한 자료와 독립한 내용일 수밖에 없었던 기념비적 작업인 《미메시스》를 1946년에 발표하게 된다. 발표 다음 해인 1947년 미국으로 이주한 아우어바흐는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예일대, 고등연구소 등의 교수를 역임한 후 1957년, 코네티컷에서 삶을 마감한다.


  이 책을 읽는 데 가장 곤란한 점은 극도로 현학적인 우리말이었다. 우리 학계의 원로이자 이름 높은 학자인 김우창, 유종호 공동번역. 주 번역자가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이어서 서문 격인 “『미메시스』 재출간에 부쳐 – 리얼리즘과 리얼리즘 이후”, 초판 “역자 서문”을 써 책의 앞 꼭지에 달았는데, 이 두 서문은 특별한 재능을 갖은 자 가운데 특별한 교육을 받은 소수, 철학적 사유를 적은 글을 읽으며 쾌락을 얻을 수 있는 “탁월한 자”가 아닌 나 같은 범부는 함부로 가까이 갈 수 없는 수준이었다. 김우창 스스로 어떻게 하면 나 정도의 범부들이 책을 읽으며 큰 혼란을 일으킬 수 있을까, 이것을 고민하며 쓴 글 같았는데, 설마 정말 그랬을 리는 없고, 틀림없이 평소 학자 연하던 풍모를 조금도 감하지 않은 채 작품을 번역했을 터이다. 구름 위 아니면 적어도 올림포스에 살며 넥타르를 마시는 고귀한 학자.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문학작품은 거의 다 읽는 대단한 다독과 이름난 비평. 어떤 문장이기에 나 또한 유난을 떠는지 한 번 그의 (번역)문장을 인용해보자. 아래는 프리드리히 실러의 희곡 <루이제 밀러린>에 관한 글 가운데 일부분이다.


  “여러 시대와 사회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바람직한 규범이 된다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각각의 경우에 그 자체의 전제에 의하여 판단되어야 한다고 사람들이 깨닫게 될 때, 그리고 그러한 전제 속에 기후나 토지와 같은 자연 조건뿐만 아니라 지적∙역사적 요인들도 포함시킬 때, 달리 말하여 사람들이 역사 동력학에 대한 감각, 역사 현상과 그 계속적인 내면의 움직임이 서로 비교될 수 없는 것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될 때, 각각의 시대에 살아 있는 일체성이 있어서, 각 시대는 그 여러 표현 속에 스스로의 성격을 드러내면서 한 덩어리로 나타난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우치게 될 때, 드디어 사실의 의미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인식의 형태로서 파악할 수 없다는 의식을 받아들이고 그 이해에 필요한 자료를 전적으로 사회의 상층이나 주요 정치적 사건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여기에서만 유니크한 의미와 내적인 힘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것과 보다 구체적이고 보다 깊은 의미에서 보편 타당성을 가진 것이 파악되기 때문에) 예술과 결제와 물질적, 지적인 문화와 일상적 노동 세계의 깊이에서 또 보통 사람들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믿게 될 때, 이때에 비로소 그러한 통찰이 현재 속으로 옮겨지고 그 결과 현재 또한 비교될 수 없이 유니크하며, 내적인 동력에 의하여 움직여지고 계속적인 발전의 과정에 있는 것으로 보아지게 될 것이다.” (p. 585)


  나는 실러의 <루이제 밀러린>을 읽었다. 주제페 베르디가 이걸 오페라로 만든 <루이제 밀러>도 들었고, 영상도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문장, 단 한 문장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 지 모르겠다. 위 문장의 주어가 무엇인지 아시는 분? 내가 읽기로 “통찰”이 주어다. 그럼 서술어는 뭘까? “보아지다.” 

  이제 문장을 주어, 서술어로 써 보자.


  “통찰이 보아지다.”


  이게 말입니까, 막걸립니까? “보아지다”? 천박해 보이지만 좀 웃자. ㅋㅋㅋㅋㅋ

  우리말 사전에 “보아지다”라는 단어는 없다. “보여지다”로 쓰면 어떨까?

  “통찰이 보여지다.”

  네이버 국어사전을 검색해보면 “보여지다”는 피동사 ‘보이다’와 피동의 뜻인 ‘여지다’가 중복 쓰인 잘못된 단어라고 나온다. 괜히 까탈을 잡는 게 아니다. 이 양반이 영문과 교수를 했는데, 자기 학생이 영어 단어 하나만 잘못 써도 사디즘적으로 F학점 주기를 우습게 알던 양반이다. 그런 높은 학자가 우리말을 이렇게 쓰다니. 그리고 “통찰이 보아지다.”를 서술하기 위한 서술절들의 난해함, 난해를 넘는 “난삽함”은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나는 엄하고(엄했고) 까다롭고(까다로웠고) 높은(높았던) 학자 김우창을 이해할 수 없다.

  곧기가 대쪽같고, 추상이 매화 같은 김우창 선생과 유사한 우리말 번역, 이 가운데 하버드 김박사와 비교할 수 있는 AI가 있으니, 나는 그걸 자주 “구글 번역”이라 한다.

  그러면 번역문만 그러한가? 천만의 말씀, 만만의 땅콩. 내가 이 책 읽기를 가장 어렵게 만든 건, 서너 번 시도하고도 책 읽기를 계속 미루게 하고야 만, 김우창이 쓴 서문 “『미메시스』 재출간에 부쳐 – 리얼리즘과 리얼리즘 이후”이었다. 즉, 서문만 서너 번 읽고 이 책은 나한테 너무 멀리 있어, 라고 포기하게 했으며, 그 책임의 상당한 부분은 쓴 사람, 김우창에게 있다. A가 B에게 이야기하지만 B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럴 때 책임은 말하는 A에게 있나, 우둔해서 알아듣지 못하는 B에게 있나? 단연 A에게 있다. 도대체 서문이 어떠하기에 감히 일개 범부인 주제에 이렇게 떠드느냐고? 분량도 있고, 읽기에 지루할 것도 틀림이 없어 예를 들지는 않겠다. 인터넷 책방에 가시면 미리보기로 조금 맛을 볼 수 있을 터이다.

  나는 지금 시대에, 하여간 지난 시대에는 더 했지만, 함부로 비난을 하면 이민 갈 각오를 해야 할 정도로 막강한 문화적, 학문적 권력을 쥔(쥐었던) 큰 학자 김우창의 우리말 문장 때문에 이 책을 권하지 않겠다.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야 제임스 미치너와 쥴퓌 리바넬리가 극찬할 정도의 명저로, 유럽의 가장 기념적인 작품들에 드러난 현실 묘사, 리얼리즘에 관한 뛰어난 관찰이긴 해도.

  이 독후감을 올릴 생각을 하니 조금 긴장을 할 수밖에 없다. 감히 내가 김우창의 글에 대고 이 따위 허튼 감상을 늘어놨다는 말이지? 하, 나이 좀 먹더니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와버렸네. 아니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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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10-11 04: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한설야, 《과도기》
화요일. 블라디미르 갈락티오노비치 코롤렌코, 《맹인 악사》
목요일. 마키노 신이치, 《마키노 신이치 단편선》
금요일. 김중일, 《아무튼 씨 미안해요》

다음 주는.... 날로 먹겠다는 뜻?

그레이스 2024-10-16 0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보아지다!^^
개정판이 새옷입고 나와서 조금 읽기 편하려나 했는데,,, 바뀐게 없더라구요.
고어체에다가... 말씀하신 그 불편함을 저도 느꼈습니다.
아우어바흐의 단테는 읽을만 했는데,,,,^^

Falstaff 2024-10-16 20:42   좋아요 1 | URL
중판을 찍어도 숱한 책들이 본문은 바뀌지 않더라고요. 저역자는 전부 출판사 편집자한테 맡기고 편집자/교정자는 함부로 교정했다가 나중에 욕이나 한 태배기 얻어 듣지 않을까 싶어 그냥 무질르고... 하여간 에휴.... 최인훈의 <광장>은 중판 찍을 때마다 섬세한 부분을 다 다시 썼거든요. 그런 중판이 이젠 더이상 보이지 않는 거 같더라고요.

젤소민아 2024-10-18 05: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메시스....반도 못 읽고 책꽂이 깊은 곳으로~~~

Falstaff 2024-10-18 07:22   좋아요 1 | URL
저처럼 하루에 한 챕터씩만 읽어보셔요. 어느새 다 읽습니다. ^^
 
알바니아의 사랑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1
수사나 포르테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들녘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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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사나 포르테스는 어제 읽은 <살인청부업자의 청소가이드>를 쓴 하들그리뮈르 헬가손과 같은 돼지띠 1959년생이다. <…청소가이드>를 어제 읽었다고? 그럼 <알바니아의 사랑>은 오늘 하루만에 읽어 치웠겠네? 맞다. 본문이 285페이지에서 끝난다. 글자가 크고 편집도 널널해서 점심에 백제 김치맛 쌀국수 후딱 먹고 빠져서 읽으니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읽으면서 머리 속에서 뱅뱅 돈 생각은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자치구의 폰테베드라에서 태어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학과 바르셀로나 대학에서 지리와 역사를 전공한 여사님이 마흔세 살에 어쩐 일로 저 발칸 반도의 작은 나라 알바니아에서 벌어진 사랑 이야기에 관해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 먹었을꼬? 하는 거였다. 책을 읽으면, 포르테스가 대학에서 지리, 역사를 공부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이렇게 짐작할 수밖에. 1930년대에 에스파냐에서 있었던 2차 세계대전 전초전 성격의 프랑코 내전. 이때 프랑코 파시스트로부터 에스파냐의 공화정을 지키기 위하여 유럽 각지와 (라틴)아메리카, 공산 중국에서 많은 해외 지원병이 쏟아져 들어왔는데, 공산주의 국가 알바니아에서도 대大 자눔이란 젊은 사령관이 ‘알바니아 여단’을 지휘하여 참전했다. 여단을 파병한 것은 맞는데 이때 ①사령관의 이름이 자눔인 것과, 그가 에스파냐에서 한 소녀를 만나 순전히 “구출”의 의미로 프랑스 국경의 친척집에 맡겨 놓았다가 패전에 임박해 ②소녀를 트럭에 태워 함께 시에라 산맥을 넘어 알바니아까지 데려온 건 포르테스의 허구일 것 같다. 그러나 충분히 가능한 허구, 거짓, 혹은 이야기. 이 정도면 소설 한 편이 탄생할 수 있는 충분한 재료는 준비한 셈이다.


  사령관 자눔이 귀환하자마자 전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의 포연에 휩싸이게 된다. 자눔은 또다시 병사들을 이끌고 이번엔 나치 파시스트에 대항하기 위하여 북상,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뛰어들어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전쟁에 승리한 1945년, 영광스럽게 귀환한다. 수도 티라나에 복귀해 며칠 간의 보고와 환영대회 같은 것들을 끝내고 순국선열로street와 엘바산 사이의 보기드문 저택인 빌라는 전쟁 당시에 독일군이 여러 용도로 사용하는 바람에 거의 다시 지어야하는 폐허로 변했지만, 에스파냐에서 데려온 소녀는 키가 훌쩍 큰 스무 살의 미인이자 완벽한 여성이 되어 있었다. 한눈에 반한 자눔은 ‘그 여자’한테 단박에 청혼, 이들은 결혼을 해 아들 둘을 낳는다. 큰 아이는 강건한 체격과 천생 군인체질의 빅토르. 작은 아이 이스마일은 훗날 시를 쓰는 자질이 어린 시절 성격에서 나타난 조금은 병약한 아이. 네 살 차이가 나는 형제 다 엄마를 많이 닮아 그런지 유난스럽게 우애가 깊었다. 공유하지 못하는 장난감 선물은 애초 받지도 않았고, 네 살 먹은 동생이 폐렴(훗날에 늑막염으로 밝혀짐)으로 사흘 동안 고열과 고통에 시달리자, 형 빅토르는 잠 한숨 자지 않고 침대 곁을 지켰다가, 이스마일이 깨어난 넷째 날 새벽, 탈진해버린 여덟 살짜리 빅토르가 혼절해버린 이야기가 오래 전해졌을 정도였다.

  빅토르 못지않게 힘들여 이스마일을 보살핀 가족 주치의 기오르크 박사는, 낫기는 했지만 완전한 것이 아니라서 요양을 권했다. 그리하여 네 가족과 기오르크 박사는 산악지역 페시코피 시에 있는 박사의 고향집에서 몇 달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삶이 끝난 사람은 아팠던 이스마일이 아니었다. 에스파냐에서 알바니아로 이주해 온 ‘그 여자’가 죽었다. 이스마일이 다섯 살 때. 이후 빅토르와 이스마일의 어머니이자 알바니아의 실세 가운데 실세인 대 자눔의 아내인 에스파냐 여인의 이름은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한 것이 ‘그 여자.’ 이제 ‘그 여자’는 초상 속 그림으로 남아 서재 벽에 걸려져, 자신을 테라스에서 책을 읽고 있는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만 기억시키고 있다. 며칠 동안 시름시름 병을 앓다가 숨을 거둔 이스마일의 기억 저편 속 ‘그 여자’가 죽은 다음에도 형제간 우의는 전혀 틀어지지 않았지만,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서, 빅토르가 군사예비 기숙학교에 들어가고 몇 년이 흘러 사춘기에 접어들자, 네 살 차이가 나는 형제는 여전히 우의가 깊기는 하되, 어딘가로부터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용맹한 군인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빅토르와 새롭게 사춘기를 맞이하게 된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이스마일. 이들의 감정적 거리감은 지극히 자연적인 이격이라고 할 수밖에.


  사춘기가 지난 아들들은 다 자기 유전자 속 특징이 발현하는 곳으로 간다. 빅토르는 정통 군인으로 국무회의의 가장 높은 지위를 갖기도 했던 아버지의 길을 따라 국가의 중요한 직책을 준비하고 있고, 이스마일은 대학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국가에 강철 장벽을 친 채 무한정 강권통치를 펼치고 있는 엔베르 호자 정부에 대한 반체제운동에 가담한다. 젊은 시절을 통째로 반 파시즘 전쟁에 투신했던 아버지 대 자눔이 이젠 알바니아의 독한 파시스트가 된 것에 어이없어 하는 것도 세월의 아이러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1930년대 40년대 젊은 자눔은 신념에 의하여 진심으로 그렇게 행동했고, 이젠 호자 정부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하여 스스로 타당하다고 믿는 양심에 의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사물과 역사를 보는 시점이 변했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다 그렇지 뭐. 파쇼타도를 외치던 70년대, 80년대, 90년대 민주투사들이 세월이 변하니까 이젠 스스로를 진보세력이라 굳게 확신하면서도 자기들의 꿈이 강남 건물주라고 서슴없이 말하게 됐잖아? 신진세력은 바로 이 (한 시절엔 옳았던) 늙은 것들을 때려잡아야 하는 거라고. 그래야 진보가 진화한다니까? 그게 변증이다.

  그래도 형제 사이는 여전히 좋았다. 알바니아도 의무 군복무 기간이 있는데, 8개월. 이스마일이 징집을 당해 훈련을 받고 있을 때 빅토르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관습법이 여전했던 북부 지역에 장교로 나가 있다가 그곳 아가씨 헬레나와 연분이 나 북부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이스마일이 결혼식에 가려고 몇 번이나 아버지와 형의 빽을 썼지만, 짧은 복무기간 대신 빡세게 훈련시키는 군대는 형의 결혼식 참석을 위한 휴가를 거절하여 참석하지 못했다. 이스마일은 그게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빅토르의 결혼식 때 혼수로 가져온 헬레나의 북부 알바니아의 전통 옷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고, 딱 하나, 조끼 주머니에 총알 하나를 담아, 장인이 사위에게 직접 주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만일 자신의 딸이 사위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 생기면, 그 불명예가 집안 담벽을 넘어가기 전에 자기 딸에 대한 “명예살인”을 허락한다는 의미란다. 이게 발칸의 회교도다.

  작가가 굳이 이 대목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이상 내비치는 건 틀림없이 복선이겠지? 그렇겠지? 아니면 혹시 독자가 그쪽으로 믿으라는 작가의 짓궂은 의도? 아이고, 소설 읽기도 쉽지 않다. 뭐든 과하게 발전하면 그렇다니까.

  만일 이 총알 하나가 혼수품이라면, 대 자눔 라드지크 가문에서 가까운 시일 안에 헬레나에 의한 불륜이 벌어지고, 그녀의 심장엔 비록 금으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총알 하나가 박히든지 관통해 지나가야 한다. 그리고 또 사건이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불운은 언제나 홀로 오는 것이 아니라서 빅토르와 이스마일의 어머니이자 대 자눔의 젊은 아내인 ‘그 여자’의 불명예도 언젠가는 암시되고, ‘그 여자’의 죽음 역시 단순한 병사가 아니어야 할 터.

  에그머니, 너무 많이 떠들었다. 물론 내가 쓴 줄거리가 진짜 작품에 나오는지 아닌지, 당신은 모르겠지만. 하여간 작품의 발단, 전개 과정을 읽다보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니까. 뒤에 어떤 결론이 날 지는 다음으로 하고 말이지. 하나 더 일러드릴까?

  어느 날 새벽 여섯 시 15분 전. 이스마일은 오르파돌을 한 알 먹고 자는 바람에 잠이 깨기는 했어도 의식이 가물가물한 상태에서 폭발음이 들려 곧바로 일어나지는 못했다. 어디서 불이 난 것도 아니고 단지 폭발음. 흠. 총소리. 집안의 누군가가 총상으로 심장손상을 입어 죽었다. 단 한 발의 총알. 베이지색 파자마 차림으로 침대 위에서 죽은 모습. 생각보다 피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 권총을 가슴에 밀착시키고 발사했고, 총알은 심장과 견갑골을 뜷고 나가 침대 바닥에 변형된 모습으로 발견됐다. 1차 조사에서 검시관은 자살일 것으로 추정했으나 결론으로 맺지는 않았다. 이렇게 작품은 시작한다. 죽은 자가 누구인지, 죽인 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은 상태로. 누굴까? 누구들일까?

  알바니아에서는 누가 누구를, 아니면 둘이 서로 죽음을 각오해가면서 사랑을 할까? 그것도 발칸식 사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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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10-10 0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들녘의 일루셔니스트 시리즈 폴스타프님 덕분에 알게 되었어요. 제목보고 알바니아 작가의 작품일 거라 생각했는데 스페인 사람이군요. 이 책도 마음에 드네요.😊

Falstaff 2024-10-10 16:18   좋아요 0 | URL
이 시리즈가 이미 끝났더라고요. 품절, 절판 책도 수두룩하고요.
이 책 괜찮습니다. 걍 도서관 가셔요. ^^

다락방 2024-10-10 12: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읽은 것 같아서 뭐라고 써놨나 찾아보니 여주인공의 벌어진 치열에 대해서만 써놨네요. -.- 덕분에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는.. ㅠㅠ

Falstaff 2024-10-10 16:22   좋아요 0 | URL
앗, 스페인 아가씨 얘기군요! ㅎㅎㅎ
앞니 치열이 조금 벌어진, 특히 위쪽 앞니 틈이 있는 젊고 예쁜 아가씨들한테 뻑 가는 남자 작가들이 꽤 있더라고요. ㅋㅋㅋ 지금 팍 떠오르는 인물이 만화가 고우영이었습니다.
 
형제 1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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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화, 이 진절머리 날만큼 유쾌한 설레발장이가 마음 독하게 먹고 무려 1,000 쪽의 (위화의 다른 저작과 비교하면) 길고 긴 장편소설을 썼다. 작가 스스로가 후기에서 말했듯이 처음엔 가비얍게 한 200 쪽 정도로 생각하고 시작했지만, 그게 어디 맘대로 되는 거야? 기어이 주인공 이광두와 송강, 이 의붓형제의 일대기 전부를 담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건 이 한없이 슬프고 유쾌한 주인공들이 개같은 가난과 문화혁명의 야만과 개혁개방에 따른 처절한 실패와 성공, 다시 이어지는 자본주의의 천박함까지 온 몸으로 다 겪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식 공중 화장실을 아시는가? 쭈그리고 앉으면 겨우 아랫도리만 가릴 수 있는 낮은 칸막이에 쪼르르 앉아 일을 보는 재래식. 지방에 따라 그놈의 칸막이 마저 없는 경우도 있다. 물론 남녀 사이에는 벽이 쳐져 있지만. 그래도 중국인데 어딜 삼강오륜을 통째로 잊을 수 있겠는가. 여기까진 나도 알고 있었던 그냥 인류학적 지식이다. 자, 그럼, 자유낙하 방식의 재래 화장실에서 고약하기 그지없는 암모니아와 메탄의 숙성 가스, 그리고 똥파리 애벌레의 머리카락 속과 콧구멍, 귓구멍 침공을 굳은 의지로 인내하며 변기 속으로 깊이 고개를 거꾸로 디민 상태에서 고개를 활랑 뒤집어 칸막이 옆 여자 화장실을 올려다본다는, 이런 걸 상상이라도 한 번 해보신 분, 거수하시압!

  주인공 이광두는 실제로 그렇게 해보았으며 그 때 다섯 명의 여인네들의 거대하고 자그마하고 동그랗고 탄탄한 엉덩이를 보게 되었으며, 그 가운데 유난히 예쁜 엉덩이를 발견하고는 한 술 더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이광두의 눈 바로 앞에 놓였던,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았던 그 엉덩이는 다섯 개 가운데 가장 그 모양이 둥글어서 마치 뭔가를 말아놓은 것 같았고, 탱탱한 피부는 조금 위쪽의 꼬리뼈를 살짝 드러나게 했다. 심장이 사납게 콩닥거리는 가운데 꼬리뼈 반대쪽에 난 털을 보고 싶었다. 여자의 거기 털은 어디서부터 자라는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몸을 더 깊숙이 파묻고 머리를 처박아서 여자의 거기 털을 거의 다 보게 되었을 무렵, 뒷덜미가 낚아채져 버렸다." (1권 16쪽)


  근데, 이 못말리는 사건이 우연이 아닌 것은, 이광두가 태어나던 14년 전의 어느날 그의 진짜 아버지이자 날건달 잡종자 역시 똥통에 머리를 박고 거꾸로 물구나무를 선 채 여자들의 엉덩이를 훔쳐보다가 그대로 똥통에 빠져 온갖 건더기에 기도가 막혀 그만 세상 하직했던 바이니 위의 인용은 말 그대로 내리물림이었던 것. 그런 이광두가 나중엔 2,000만 달러 약 220억원을 들여 러시아의 우주선을 타고 가는 패키지 여행을 떠날 정도의 큰 부자가 되는 인생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데, 어떻게 해서?

  자, 난 단연코 줄거리에 관해선 더 이상 입도 벙긋하지 않겠다.


  그러면 이 세권짜리 책이 참 웃기고 재미나기만 한 것 같이 생각하실 수 있을 터이다. 저번에 위화의 <인생>에서도 얘기했듯이 중국의 13억 잠재독자한테 책을 팔아먹기 위해서 그냥 재미만 있으면 절대 안 된다. 13억 인구가 그냥 우습게 보일지 모르는데 그건 우리나라 원화의 인플레이션 때문에 그게 얼마나 큰 숫자인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13억? 얼마나 거대한 인구인지 내가 계산해드리지.

  13억 중국인들이, 원래 점잖은 분들이라서 다른 인종들과 비교해 무척 적은 양인 하루 200 그램 씩의 똥 오줌 슬럿지(좀 쉬운 얘기로 '건더기')를 배설하신다고 가정하면, 하루에 260,000,000 킬로그램이고 이걸 드럼통에 담으면 일년 삼백육십오일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130 만 개의 드럼통이 필요한데, 드럼통의 바깥쪽 높이가 90 센티미터라 130 만 개의 드럼통들을 똑바로 세우면 1,170 킬로미터를 위로 올릴 수 있다. 매일. 이 높이, 실감이 나지 않으시리라. 이해를 돕기 위해, 세계의 지붕 에베레스트 산을 132개 포개 놓은 것보다 더 높이 올라간다는 말씀.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 얘기를 좀 더 천문학적, 우주공학적으로 옮기자면, 그래서 일년도 안 되는 328일 동안 중국인들의 분뇨를 모아 드럼통에 담은 다음 똑바로 높이 세우면, 그걸 타고 올라, 오직 중국인들의 똥 오줌만 부둥켜 안고 드디어 인류는 달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으때, 으시으시하시지? 그러니 이광두의 생부가 똥통에 빠져죽은 거, 그건 지극히 당연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던 거다.

  이 거대한 중국인들한테 책을 팔아먹어야 하는 중국 전업작가의 입장에서 당연히 위화는 정말 터무니 없게 웃겨서 눈물이 앞을 가리는 이 책 속에, 같은 눈물이라도 종류를 달리한 또다른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감동과 슬픔과 염병무지할 분노와 애뜻함과 살뜰, 안타까움 그리고 인정, 사랑, 형제애, 의리 이런 것들도 같이 담아냈다. 그래서 억지스러운데가 있고 분명한 과장과 두드러지게 의도한 역설, 이런 것들에도 불구하고, 연출된 모습임을 뻔히 알면서도 즐거이 감동해줄 수 있었다.


  위화의 고민이 무엇이었을까. 잘 나가는 작가로 현재 자기 수입에 만족하면서 달마다 통장에 꽂히는 인세만 가지고도 남은 세월 편히 즐길 수 있는 위화.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그는 개혁개방 전, 그 너머 문화혁명 전, 비교적 순수했던 공산주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아닌가싶었다. 아, 이 독후감을 쓰면서 어쩔 수 없는 나의 고민. 그건 왜 위화의 고민을 이렇게 생각하는지 밝힌다면, 이 책의 마지막 모습, 즉 결론에 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 그걸 얘기하느니 난 차라리 위화의 고민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관한 내 생각을 취소하는 편을 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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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10-08 20: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ㅋㅋ 이 책 처음부터 참 웃기고 더럽죠 ㅋㅋㅋㅋㅋ 말씀하신대로 인구가 하도 많으니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어요. ㅎㅎ
잊고 있었는데 폴스타프님 덕분에 다시 웃습니다.

Falstaff 2024-10-09 07:28   좋아요 2 | URL
ㅎㅎㅎ 오래 전에 읽고 독후감을 올리지 않았더라고요. 다른 건 모르겠고 이 책을 재미있게 읽지 않은 독자는 없을 듯한, ㅋㅋㅋㅋ 나름대로 그 방면으로 명작입니다!

moonnight 2024-10-08 2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앜 상상해버렸어요ㅠㅠ

Falstaff 2024-10-09 07:28   좋아요 2 | URL
킄! 그러면 어떻습니까. ㅎㅎㅎ 유쾌하게 슬픈 책이잖습니까.

바람돌이 2024-10-08 22: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읽은 책이 나와서 반갑네요. ㅎㅎ
읽은지 오래 돼서 결말이 어쨌는지 생각도 안나긴 하지만요. 그럼에도 저는 문화혁명의 그 황폐함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어서 인상적으로 읽긴했어요.

Falstaff 2024-10-09 07:30   좋아요 2 | URL
아휴 중국의 그 당시는 참. 정말 여러가지로 구질구질하고 망가졌던 시절... 그 때를 넘긴 작가들은 시대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았을 거 같습니다.

케이 2024-10-10 11: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대학시절 친구가 이 소설을 읽고 너무 충격받았다고 읽으면서 미친 듯 울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이게 3권이나 되는 책인진 몰랐네요.
그 친구는 이 책에 반해 그 뒤로 한국에 출판된 모든 위화의 책을 읽어버렸어요.
외국 유학하는 사람이 일본인/중국인 비교에 일본인은 어떻게 저러냐 싶을 정도로 규칙적이고 근면성실한데 중국인은 진짜 망했다고 너 이러다 큰일난다고 아무리 말해도 천하태평이라고 진짜 큰일 닥치기 전엔 눈하나 꿈쩍 안한다고 써놓은 걸 봤거든요.
13억 인구와 살다보면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모양입니다.
세권이나 되서 쉽지 않겠지만 언젠가 도전해보고 싶네요. 길긴 해도 지루하진 않겠죠...

Falstaff 2024-10-10 16:26   좋아요 1 | URL
친구분의 무엇이 스토리하고 맞았던 모양입니다.
이광두처럼 어처구니없는 인간들도 많지만, 걔네들 하는 말이... 서울대 들어갈 수 있는 인재들이 너네 나라 인구 수만큼 있을 거라고.... ㅋㅋㅋ
하여튼 재미난 나라입니다. 도라이들도 많고 천재들도 많은. 하여간 복잡해요.

2024-10-10 16: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0-11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4-10-16 09:33   좋아요 1 | URL
제가 갖고 있는 책은 두권으로 되어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