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메시스 현대사상의 모험 28
에리히 아우어바흐 지음, 김우창.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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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2년 11월에 독일 베를린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에리히 아우어바흐를 알게 된 첫 계기는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 <소설>을 통해서였다. 인상깊기는 했지만 아우어바흐라는 비교문학 학자가 있었고 그의 저서 《미메시스》가 명저라는 것만 기억했다. 나는 미치너의 <소설>을 읽고 51개월이 지난 후 튀르키예 작가 쥴퓌 리바넬리가 쓴 명작 <세레나데>를 읽는다. 이 속에서 두 주인공, 유대계 독일인 막시밀리안 바그너 교수와 이스탄불 대학의 계약직 공무원 마야 두란의 대화를 통해 《미메시스》는 꼭 읽을 책으로 구체화되어 <세레나데>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마자 구매 버튼을 클릭했다. 이후 열 달이 또 지났고, 9월 중순이 되었으나 여전히 수은주가 30도 위를 맴도는 뜨거운 초가을에 이 책 읽기를 마쳤다.

  사 두기는 했지만 엄두가 선뜻 나지 않았다. 두 달 이상이 걸렸다. 목차를 보니 각 챕터가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읽을 분량으로 적절하게 나뉘어 있었다. 무릎을 쳤다. 이런 책은 앉은 자리에서 단박에 읽어 치우려면 낭패를 보는 법, 시간이 생길 때마다 한 챕터씩 나누어 읽자. 그리하여 7월부터 근 두 달에 걸쳐서, 하루 가운데 가장 머리가 맑은 시간, 늦어도 새벽 다섯 시쯤 정말로 한 챕터씩, 딱 그 정도만 읽었다. 숙취가 남은 날은 책을 펴지 않았다. 개도 걸리지 않는다는 여름 감기가 들어도 이 책 읽기를 삼갔다. 그렇게 공을 들였다. 그렇게 공을 들일 만했다. 매서운 바람이 횡행하는 튀르키예의 겨울해변에서 파랗게 언 채 바이올린으로 “세레나데”를 연주하던 늙은 유대인 교수 막시밀리안 바그너의 《미메시스》에 대한 찬사는 틀림이 없었다. 다만 서양 문학의 사실적 묘사에 관해 80년 전에 쓴 비교문학이다. 시간이 흘러 아우어바흐의 논점이 올바르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이제는 그의 관점 자체가 조금은 바랬다고 해야 할듯하다. 《미메시스》보다 2,500년 전에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는 여전하건만, 정작 <오디세이>를 논한 《미메시스》는 80년만에 (영락없는 아마추어가 읽기에)조금은 빛이 바랜 것처럼 보인다니 비평의 무상함이란….

  에리히 아우어바흐는 같은 세대의 혈기왕성한 유대계 독일 남성이 그러했듯이 독일 국민의 자격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종전 후 그라이프스발트 대학에서 로망스어를 공부해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929년에 마르부르크 대학의 문헌학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1935년 나치 정권은 그의 교수직을 박탈했고, 신변상 위험을 감지한 아우어바흐는 독일을 탈출해 튀르키예에 정착, 36년부터 이스탄불 대학의 유럽문학 학과장의 자리를 얻는다. 이후 10년간 튀르키예와 이스탄불 대학의 충분하지 못한 자료 때문에 오히려 유럽의 중요한 문학작품을 원본으로 다시 읽어야 했던 아우어바흐는 기존의 수다한 자료와 독립한 내용일 수밖에 없었던 기념비적 작업인 《미메시스》를 1946년에 발표하게 된다. 발표 다음 해인 1947년 미국으로 이주한 아우어바흐는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예일대, 고등연구소 등의 교수를 역임한 후 1957년, 코네티컷에서 삶을 마감한다.


  이 책을 읽는 데 가장 곤란한 점은 극도로 현학적인 우리말이었다. 우리 학계의 원로이자 이름 높은 학자인 김우창, 유종호 공동번역. 주 번역자가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이어서 서문 격인 “『미메시스』 재출간에 부쳐 – 리얼리즘과 리얼리즘 이후”, 초판 “역자 서문”을 써 책의 앞 꼭지에 달았는데, 이 두 서문은 특별한 재능을 갖은 자 가운데 특별한 교육을 받은 소수, 철학적 사유를 적은 글을 읽으며 쾌락을 얻을 수 있는 “탁월한 자”가 아닌 나 같은 범부는 함부로 가까이 갈 수 없는 수준이었다. 김우창 스스로 어떻게 하면 나 정도의 범부들이 책을 읽으며 큰 혼란을 일으킬 수 있을까, 이것을 고민하며 쓴 글 같았는데, 설마 정말 그랬을 리는 없고, 틀림없이 평소 학자 연하던 풍모를 조금도 감하지 않은 채 작품을 번역했을 터이다. 구름 위 아니면 적어도 올림포스에 살며 넥타르를 마시는 고귀한 학자.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문학작품은 거의 다 읽는 대단한 다독과 이름난 비평. 어떤 문장이기에 나 또한 유난을 떠는지 한 번 그의 (번역)문장을 인용해보자. 아래는 프리드리히 실러의 희곡 <루이제 밀러린>에 관한 글 가운데 일부분이다.


  “여러 시대와 사회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바람직한 규범이 된다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각각의 경우에 그 자체의 전제에 의하여 판단되어야 한다고 사람들이 깨닫게 될 때, 그리고 그러한 전제 속에 기후나 토지와 같은 자연 조건뿐만 아니라 지적∙역사적 요인들도 포함시킬 때, 달리 말하여 사람들이 역사 동력학에 대한 감각, 역사 현상과 그 계속적인 내면의 움직임이 서로 비교될 수 없는 것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될 때, 각각의 시대에 살아 있는 일체성이 있어서, 각 시대는 그 여러 표현 속에 스스로의 성격을 드러내면서 한 덩어리로 나타난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우치게 될 때, 드디어 사실의 의미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인식의 형태로서 파악할 수 없다는 의식을 받아들이고 그 이해에 필요한 자료를 전적으로 사회의 상층이나 주요 정치적 사건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여기에서만 유니크한 의미와 내적인 힘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것과 보다 구체적이고 보다 깊은 의미에서 보편 타당성을 가진 것이 파악되기 때문에) 예술과 결제와 물질적, 지적인 문화와 일상적 노동 세계의 깊이에서 또 보통 사람들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믿게 될 때, 이때에 비로소 그러한 통찰이 현재 속으로 옮겨지고 그 결과 현재 또한 비교될 수 없이 유니크하며, 내적인 동력에 의하여 움직여지고 계속적인 발전의 과정에 있는 것으로 보아지게 될 것이다.” (p. 585)


  나는 실러의 <루이제 밀러린>을 읽었다. 주제페 베르디가 이걸 오페라로 만든 <루이제 밀러>도 들었고, 영상도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문장, 단 한 문장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 지 모르겠다. 위 문장의 주어가 무엇인지 아시는 분? 내가 읽기로 “통찰”이 주어다. 그럼 서술어는 뭘까? “보아지다.” 

  이제 문장을 주어, 서술어로 써 보자.


  “통찰이 보아지다.”


  이게 말입니까, 막걸립니까? “보아지다”? 천박해 보이지만 좀 웃자. ㅋㅋㅋㅋㅋ

  우리말 사전에 “보아지다”라는 단어는 없다. “보여지다”로 쓰면 어떨까?

  “통찰이 보여지다.”

  네이버 국어사전을 검색해보면 “보여지다”는 피동사 ‘보이다’와 피동의 뜻인 ‘여지다’가 중복 쓰인 잘못된 단어라고 나온다. 괜히 까탈을 잡는 게 아니다. 이 양반이 영문과 교수를 했는데, 자기 학생이 영어 단어 하나만 잘못 써도 사디즘적으로 F학점 주기를 우습게 알던 양반이다. 그런 높은 학자가 우리말을 이렇게 쓰다니. 그리고 “통찰이 보아지다.”를 서술하기 위한 서술절들의 난해함, 난해를 넘는 “난삽함”은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나는 엄하고(엄했고) 까다롭고(까다로웠고) 높은(높았던) 학자 김우창을 이해할 수 없다.

  곧기가 대쪽같고, 추상이 매화 같은 김우창 선생과 유사한 우리말 번역, 이 가운데 하버드 김박사와 비교할 수 있는 AI가 있으니, 나는 그걸 자주 “구글 번역”이라 한다.

  그러면 번역문만 그러한가? 천만의 말씀, 만만의 땅콩. 내가 이 책 읽기를 가장 어렵게 만든 건, 서너 번 시도하고도 책 읽기를 계속 미루게 하고야 만, 김우창이 쓴 서문 “『미메시스』 재출간에 부쳐 – 리얼리즘과 리얼리즘 이후”이었다. 즉, 서문만 서너 번 읽고 이 책은 나한테 너무 멀리 있어, 라고 포기하게 했으며, 그 책임의 상당한 부분은 쓴 사람, 김우창에게 있다. A가 B에게 이야기하지만 B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럴 때 책임은 말하는 A에게 있나, 우둔해서 알아듣지 못하는 B에게 있나? 단연 A에게 있다. 도대체 서문이 어떠하기에 감히 일개 범부인 주제에 이렇게 떠드느냐고? 분량도 있고, 읽기에 지루할 것도 틀림이 없어 예를 들지는 않겠다. 인터넷 책방에 가시면 미리보기로 조금 맛을 볼 수 있을 터이다.

  나는 지금 시대에, 하여간 지난 시대에는 더 했지만, 함부로 비난을 하면 이민 갈 각오를 해야 할 정도로 막강한 문화적, 학문적 권력을 쥔(쥐었던) 큰 학자 김우창의 우리말 문장 때문에 이 책을 권하지 않겠다.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야 제임스 미치너와 쥴퓌 리바넬리가 극찬할 정도의 명저로, 유럽의 가장 기념적인 작품들에 드러난 현실 묘사, 리얼리즘에 관한 뛰어난 관찰이긴 해도.

  이 독후감을 올릴 생각을 하니 조금 긴장을 할 수밖에 없다. 감히 내가 김우창의 글에 대고 이 따위 허튼 감상을 늘어놨다는 말이지? 하, 나이 좀 먹더니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와버렸네. 아니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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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10-11 04: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한설야, 《과도기》
화요일. 블라디미르 갈락티오노비치 코롤렌코, 《맹인 악사》
목요일. 마키노 신이치, 《마키노 신이치 단편선》
금요일. 김중일, 《아무튼 씨 미안해요》

다음 주는.... 날로 먹겠다는 뜻?

그레이스 2024-10-16 0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보아지다!^^
개정판이 새옷입고 나와서 조금 읽기 편하려나 했는데,,, 바뀐게 없더라구요.
고어체에다가... 말씀하신 그 불편함을 저도 느꼈습니다.
아우어바흐의 단테는 읽을만 했는데,,,,^^

Falstaff 2024-10-16 20:42   좋아요 1 | URL
중판을 찍어도 숱한 책들이 본문은 바뀌지 않더라고요. 저역자는 전부 출판사 편집자한테 맡기고 편집자/교정자는 함부로 교정했다가 나중에 욕이나 한 태배기 얻어 듣지 않을까 싶어 그냥 무질르고... 하여간 에휴.... 최인훈의 <광장>은 중판 찍을 때마다 섬세한 부분을 다 다시 썼거든요. 그런 중판이 이젠 더이상 보이지 않는 거 같더라고요.

젤소민아 2024-10-18 05: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메시스....반도 못 읽고 책꽂이 깊은 곳으로~~~

Falstaff 2024-10-18 07:22   좋아요 1 | URL
저처럼 하루에 한 챕터씩만 읽어보셔요. 어느새 다 읽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