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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의 딸 ㅣ 조지 오웰 소설 전집 (무선)
조지 오웰 지음, 이영아 옮김 / 현암사 / 2023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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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준남작 헤어의 작은 아들의 작은 아들로 태어난 찰스 헤어. 영국의 귀족 집안은 장자가 작위를 계승하고, 둘째 아들은 적과 흑, 군문이나 성직의 길을 택하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저低국교회 소속의 신부가 된 찰스 헤어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인간이었다.
지금부터 찰스 헤어 신부의 캘릭터를 설명해야 마땅하지만 이전에 먼저 할 말이 있다. 반anti 볼셰비키 공산주의자인 조지 또는 우물, 즉 “Goerge Or-well”이 “신부”의 딸이라는 소설을 쓰기로 작정을 했으면, 이미 지난 세기에 망치를 든 철학자가 명백하게 아편임을 밝힌 종교 종사자를 그리 바람직하게 봤을 턱이 없다는 건 충분히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 그래서 작품에서 나오는 국교회와 가톨릭 신부들 가운데 제대로 된 인간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을 감안하여 “또는 우물” 씨가 설정한 신부의 면모를 살펴보자.
만일 찰스 헤어 신부가 2백년 전에 태어났더라면 자신은 시를 쓰거나 화석을 수집하며 2백년 전의 화폐가치로 연수입 40파운드로 교구를 운영하는 겸임 성직자로 완벽하게 편안한 인생을 누렸을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부르주아 계급의 전성기를 맞아 소수의 부르주아를 위하여 낮은 임금을 불사했던 노동자 계급은 당장 자기 먹고 살기도 죽을 맛이라 조금씩 종교 알기를 개떡처럼 여겼으며, 성직자 알기도 이젠 지까짓 것 까지는 아닐지언정 예전처럼 신주단지 모시듯 할 것을 바라지도, 요구하지도 못했다. 이 정도면 20세기 신부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적응해야 마땅하거늘, 애초 준남작의 손자이며 귀족에다가 성직자 신분의 위용으로 살아생전 한 번도 “하층계급” 민중을 인간으로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찰스 헤어는, 꼭 봐야 아나, 스스로 만든 끔찍한 결혼생활을 하면서 고객의 대부분인 하층계급 신도 알기를 개밥그릇의 보리알 수준으로 여겨 1908년 37세에 나이프힐의 성 애설스탠 교회에 부임할 때 벌써 묘하게 무뚝뚝하며 얼굴에 경멸에 가까운 초연함을 깃든 겁나게 까탈스런 성격을 굳히고 있었다.
그의 말 한 마디, 손짓 하나하나에 나이프힐 시민들에게 “나는 당신들의 사제이지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마, 인간으로서 나는 당신들을 혐오하고 경멸하니까 말이지.”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원래 이런 건 메시지를 주는 인간 보다 받는 분이 더 정확하고 빠르게 눈치채는 것이거든. 그리하여 당연하게도 하층계급 주민들에게 신부는 그저 증오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면 지역의 유지나 하급 귀족 집안하고라도 잘 지내야 할 텐데 명문가와는 차례로 다투었고, 하급귀족 가문한테는 자신이 준남작의 손자라는 자만심을 도무지 접어주지 않아, 결투에 이은 사망까지 이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을 정도였다. 부르주아 명문가와 향사들은, 잉글랜드에 교회가 성 애설스탠 교회 하나밖에 없니? 하면서 오랜 세월 겉으로만 미소를 교환할 뿐 속으로는 서로 반목하기를 마다하지 않던 부르주아와 향사 계급까지 찰스 헤어 신부 덕에 극적으로 화해를 해 사이좋게 손에 손잡고 이웃 마을에 있는 고교회파 국교회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니 말 다 했지 뭐. 난 집 나간 검은 양이라 이런 방면에 아무것도 모르는데, 신부들은 자신의 교구에서도 활동을 하는 모양이다. 근데 헤어 신부는 자신이 몸소 하찮은 하층계급의 집을 일일이 방문해 그들과 말을 트는 것을 혐오하여 교구의 궂은 일은 죄다 아내에게 맡겨버렸고, 1921년에 아내가 천국의 편안함을 누리기 위하여 굴뚝 꼭대기로 빠져나간 후에는 외동딸 도러시한테 일임했다. 이 도러시가 <신부의 딸>, 주인공.
동부 잉글랜드의 서퍽주 나이프힐로 말하자면 야트막한 언덕 꼭대기에 국교회 성당이 있고 바로 밑에 마을이 있다. 남쪽으로 고상한 분위기의 농경지역이 펼쳐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블라필고든 사탕무 정제소가 자리를 잡았다. 사탕무 정제소 사장 블라필고든 씨 역시 헤어 신부와 거의 완벽하게 척이 지는 바람에 시골 기준으로 다른 고상한 집안 사람들처럼 이웃 교회를 다니면서 헤어 신부는 물론이고 신부의 딸 도러시를 보면서도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리거나 길거리에 가래침이나 뱉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다만 몇 년에 한 번 있는 하원의원 선거철에만 환하게 웃는 얼굴로 도러시에게 모자에 손을 대는 시늉을 했을 뿐. 시민 2천명 가운데 절반이 바로 블라필고든 사탕무 정제소의 직원으로 근무하는 외지인이었고 이들은 거의 대부분, 그러니까 딱 한 가구를 빼놓고 신앙이 없었다. 나머지 절반, 그러니까 1천명에 달하는 농업, 축산업 종사자의 거의 전원이 국교회 신지였건만 찰스 헤어 신부가 1908년에 기어 들어온 이후 23년 동안 6백명이 넘는 신도가 2백명 이하로 급격하게 곤두박질친 데는 다 이런 배경이 있었다. 반 볼셰비키 공산주의자 오웰이 만들 수 있는 최선의 성직자의 모습이었다.
그럼 성직자의 딸 도러시의 일상을 보자.
도러시의 일상은 아침 다섯시 반 자명종에 이은 주기도문 낭송으로 시작한다. 조금 마르긴 했어도 튼튼하고 균형잡힌 몸, 눈가에 잔주름이 있으며 가만히 있으면 피곤해 보이는 입을 가진 28세 이전의 처녀. 몇 년 있으면 확실히 노처녀로 보일 모습이었고, 사실 그게 운명이다. 얼른 시집가면 되지 않느냐고? 그럴 수 없을 걸? 결혼해 교회를 떠나면 누가 교구의 궂은 일을 대신하고, 목사관과 교회를 관리하며, 철없는 아빠 신부를 돌보겠는가 말이지. 도러시가 제일 질색하는 일이 찬물에 목욕하는 건데, 그래서, 이 부사副詞 “그래서”가 중요하다, 자기가 아주 싫어하는 일이기 때문에 4월부터 11월까지 5시 반에 일어나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다.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는 일종의 의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쉬운 얘기로 기독교 환자 정도 아닐까.
이날 아침에 이를 닦다가 도러시는 갑자기 내장으로 무시무시한 통증이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통증을 느껴? 그렇다. 진짜 아픈 게 아니라 마음 속에서 그렇게 크게 걱정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카길스 정육점에 지난 7개월 동안 한 푼도 주지 않고 외상으로 가지고 온 19파운드에서 20파운드에 이르는 외상값 때문이다. 나중에 정확한 금액이 21파운드 9실링 9펜스라고 밝혀지며, 카길스 씨 말고 하여간 사제관에 외상을 준 메인 스트리트의 상점 주인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나 몰려와서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일괄적으로 갚기는 하겠지만, 앞부분에서 도러시가 내장통을 겪을 정도로 끙끙거리고 있을 때만 해도 헤어 신부는 그깟 도살업에 종사하는 하층계급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다 큰 딸이 어이없을 만큼 세상물정을 모르는 철부지로 보였다. 그깟 하찮은 고깃값이라니. 신부 자신은 다 쓰러져가는 교회 오르간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나는 걸 참지 못해 거금을 들여 오르간을 설치하고 날아오는 청구서를 몇 년째 모르쇠로 일관하던 차였는 걸. 원래 귀족들은 그런 식으로 사는 거란다. 하층계급은 그들대로 높으신 분에게 받을 돈이 있다는 걸 위안으로 삼고, 자긍심으로 여겨야 하는 법이란다. 이 만성 분노 상태의 신부가 입은 또 청와대라서 대구, 정어리, 민어 같은 값싸고 널리 먹는 생선은 입에도 대지 않아 밥상머리에 꼭 한우나 홍어가 올라와야 숟가락을 들어 헤어 집안의 엥겔계수는 하늘이 높은 줄 몰랐다. 3분의 1 아래로 떨어진 신도수는 수입의 급격한 하락을 불러, 신부의 먹을 거리만 빼고, 입을 거리, 사제관의 상태 같은 건 끝이 없이 헐벗을 수밖에 없었다.
교회 종루에 모두 여덟 개의 종이 있었지만 지금은 오직 하나의 종만 울리고 나머지 일곱 개는 철사에 온몸이 꽁꽁 묶인 채 그냥 매달려 있기만 했다. 근데 이게 큰 위험을 초래할 재앙의 씨앗이기도 하다. 종의 무게 때문에 종루 건물이 이제는 언제 무너져 내려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는 상태가 되었으니. 그러나 독자여, 걱정마시라. 책을 덮을 때까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터이다. 하지만 다 해진 수단과 거대한 인부용 장화를 신고 다니는 교회 관리인 프로겟 씨는, 하필이면 교회 입구에 위치한 종루가 무너져 언제 신도들이 떨어진 무쇠종에 깔려 토막이 날 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있어서 두 주일에 한 번은 꼭 신부의 딸이 도러시에게 보완공사를 호소해야 했다. 신부한테 얘기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아니 그 딸한테라도 해보는 거다.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소설은 결국 사람 이야기. 이 작품에 등장하는 문제적 인물 두 명을 소개한다. 돈 좀 있고 허리하학적으로 자유분방해 세 명의 사생아를 키우는 50대 대머리 남자 워버턴 씨. 토박이는 아니고 런던으로 보이는 대도시에 살다가 가정부라고 소개한 어여쁜 여인 하나 데리고 이사해 왔다. 그러다 가정부가 덜컥 사내 아이를 낳았고 얼마 후 도무지 정착생활을 견디지 못한 아내이자 가정부가 대책 없이 집을 나가는 바람에 아기를 다른 두 아들을 돌보고 있는 친척한테 보냈다. 1년 가운데 겨우 몇 달만 나이프힐에 머물고 나머지는 유럽 각지를 돌며 최대한 인생을 즐기는 인물이다. 가만 보면 살면서 여성을 사랑해본 적도 없고, 사랑할 마음도 없이 그저 함께 하는 세월과 관계없이 여성과 함께 즐길 수 있기만을 바라는 인간이다. 시절이 20세기 초반이라 마음에 드는 여성이 나타나면 스스럼없음을 강조하며 함부로 몸을 더듬는 습관이 있다. 마음만은 너그러워 자신이 누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약간, 좀 지나치다고 보일 수 있을 정도의 친절은 기꺼이 베푼다. 그래도 썅노무새끼인 건 분명하지만.
사제관 근처에 워버턴 씨 집이 있고,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과부 셈프릴 부인이 산다. 셈프릴 부인은 대단한 나팔꾼이다. 문제는 없는 일을 마치 진짜로 자기 눈으로 봤고, 누가 들어도 그게 틀림없이 안 땐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는 아닐 것이라 믿게 만드는 힘이었다. 블라필고든 씨가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메인 스트리트에서 큰 규모로 유세를 벌일 때 워버턴 씨 눈에 도러시가 띄었고, 그래서 접근했으며, 8월이라 맨살이 드러난 팔뚝을 스스럼없이 슬슬 쓰다듬으며, 오늘 밤에 <양어장과 첩들>이란 작품을 출간한 로널드 뷸리 씨 부부가 자기네 집을 방문하는데 와서 문학적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고 제안한다. 아버지 신부와 교구일에 치어 극도로 스트레스가 쌓인 도러시는 제의를 받아들여 밤 열시에 워버턴 씨 댁 현관을 노크했으며, 로널드 뷸리 씨 부부는 워버턴의 거짓말이었는데, 그래서 빈 집에서 둘만 대화를 하다가 또다시 더듬어대려고 하기도 해, 하던 일이 있기도 있었고, 아직 못한 일을 마저 해야 한다는 핑계로 집에서 나오긴 했지만, 워버턴 씨 댁 현관에서 다시 손목을 잡힌 도러시의 입술에 이 50대 부자 대머리가 키스를 해버리는 데 성공한다. 이때 바로 옆집 셈프릴 부인 댁의 창문에 휘리릭, 커튼이 쳐지는 것을 도러시가 본 듯했으니, 아이고 이걸 어쩌나. 이렇게 해서 20세기 식 주홍글자가 생기는 찰라?
여기에 하나 더 있다. 조지 오웰이 썼으니 오웰 표가 하나 더 나오고 만다. 바로 지독한 가난의 모습. 어떻게 해서 도러시, 제목이 <신부의 딸>이니까 당연히 도러시가 가난의 제단에 오르게 되는 지는, 나는 미리 말할 수 없음. 독후감 길게 쓰긴 했지만 모두 5부 가운데 1부만 “간단하게” 소개했음을 양지하시기 바람. 2부, 명성에 걸맞지 않은 난데없는 장면전환에 당신 턱이 떨어질 지도 모르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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