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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사람들
헨리 제임스 지음, 김윤하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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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가 19세기 미국 페미니즘 운동가 사회에 틈입했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올리브 챈설러라는 여성. 이이는 여성 자코뱅 당원, 즉 니힐리스트 과격파로 분류할 수 있다. “거센 파도에 시달리는 작은 배 같은 성격”이라고 제임스는 묘사하고 있는데, 이게 어떤 성격을 말하는지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성격이 올바르거나 삐딱하거나, 진실되거나 위선적이거나, 품위가 있거나 천박하거나를 막론하고 거센 파도에 시달리면 일단 살기위해 온갖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근데 이 문장 앞뒤로 무어라고 나오는가 하면, “낮고 기분 좋은, 교양있는 목소리는 불안해 하고 있고 그것을 숨기려 애쓰는 눈치”이며, “’수줍음 발작 증상’이 있어서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조차 바라보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작품의 결말 부분에 이르러 올리브 챈설리가 행한 행동이 올리브의 성격으로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했던 것인지 독자들은 즉각 알아차려야 하는데, 문제는 이걸 읽는 순간부터 결말까지 무려 7백 페이지 분량의 길고 장황한 세밀묘사의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다는 거다. 아마 백 명의 독자 가운데 아흔여덟 명은 챈설러의 성격을 새까맣게 잊고 있을 터. 장황하다고? 그렇다. 이이와 필적할 만한 작가는 프랑스 소설시대를 연 오노레 드 발자크, 그리고 21세기에 헨리 제임스를 공부해 박사학위를 딴 영국 작가 앨런 홀링허스트를 들 수 있지 않을까? 무슨 말씀인고 하면, 만일 헨리 제임스가 21세기의 우리나라에서 활동했다면 데뷔도 하지 못했을 거란 말씀. 아, 물론 과장 좀 해서 그렇다. 지금 시대에 어떤 독자가 이렇게 장황하고 세밀한 묘사를 찾아 읽느냐고. 조금 미쳤거나 나처럼 가진 거라고는 시간밖에 없는 백수/백조 아니면.
작품의 시대는 남북전쟁이 끝나고 몇 년 되지 않았을 때이니 1860년대 후반이나 70년대 초반. 남부군으로 참전했다가 패전의 쓴 맛을 보고 돌아온 미시시피 출신의 매력적인 변호사 베이질 랜섬이 보스턴에 사는 먼 친척 올리브 첸설러를 찾아온다. 멋진 용모와 아름다운 눈, 고상한 느낌의 두상에 곧고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이 전체적으로 다소 딱딱하고 답답한 느낌이 나는 남자. 가뜩이나 인구가 적은데 노예까지 전부 해방되어 거의 황폐해진 남부를 떠나 뉴욕에서 변호사로 새 삶을 찾고자 하는 인물이다. 베이질이 올리브에게 편지를 했고, 올리브가 이애 답장을 하자 뉴욕 가는 김에 보스턴 친척에게 들른 것. 여기까지 보면 베이질과 올리브 사이에 뭔가 일이 생기겠구나 싶지만 베이질이 좋아하는 여성상으로 말하자면 올리브하고는 아예 인연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고 정치문제에 어떤 책임도 느끼지 않는 여성”이며 “사사로이 살아가고 수동적이며 반대인 것에 무감해서 공공의 일은 더 강인한 성gender”인 남자한테 맡기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부류다. 그러니 여성 자코뱅 당원하고 맞기를 바라면 완전히 오산일 수밖에. 엉뚱하게도 베이질 선생에게 눈독을 들이는 여성은 남편이 죽고 수년간 유럽에서 체류한 경험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는 속물이자 아들 하나 딸린 과부이며 올리브의 언니인 아델라인 여사. 아델라인이 마침 뉴욕에 살며 인생을 새로 시작해야 하지만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골몰하면서 한 달 전부터 방문차 와 있던 거다.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헨리 제임스가 주인공 올리브 첸설러의 성격을 위에 쓴 것처럼 간단하게 몇 줄 끼적였을 따름이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지? 올리브의 가장 중요한 점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지극한 소명은 자비를 베푸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였다. 부르주아, 미혼, 독신이며 사교에 능한 “진짜 노처녀”가 이 여자의 본질이고 운명 그 자체라고 작가는 웅변한다. 뼛속까지 독신주의자인 올리브는 헨리 제임스가 확 말해버리지 않아서 그렇지 상당한 정도로 레즈비언이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한다. 크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진짜 노처녀”의 뜻이 늙은 처녀일까, 아니면 처녀가 아니라는(No) 말일까? 하여간 레즈비언 성향이라 했으니 상대가 있어야 할 터. 이제부터 소개해 올리겠다.
부모와 딸 하나로 구성된 테런트 가족이 있다. 외동딸 버리나 테런트가 위에서 말한 올리브의 상대역. 19세기 소설의 여자 주인공답게 무척 젊고, 날씬하고 예쁘다. 십대 후반의 나이에 벌써 나라의 서쪽에서는 일류 연설가로 소문이 날 정도로 신선하고 시적인 연설을 자랑한다. 좀 웃기는 것이 “자신이 하는 연설이 아니라 ‘부름받아’ 하는 연설”이라고 주장한다는 거. 실제로 교양있고 고상한 청중 앞에서 더욱 수월하게 연설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부름받아’ 하는 연설이 말이 좋아 부름을 받는 것이지 혹시 누군가의 주장을 받아써서 기가 막히게 윤색을 한 다음에 타고난 말재주로 청중들에게 쏟아 붓는 거 아닌가 싶은 마음이 팍 든다. 버리나는… 자꾸 ‘버리나’ ‘버리나’ 하다가 진짜로 책 속에서 “버릴 것은 다 버린 버리나는” 이 비슷한 말이 나오자 나는 미칠 거 같았는데, 하여간 버리나는 모든 종류의 속박으로부터 여성의 해방에 공감하고 추종하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스스로 자신의 연설이 내부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 영감이 찾아오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베이질 랜섬은 버리나의 여성 해방에 대한 공감, 추종, 관심 자체를 의심하기도 한다.
버리나의 아버지 셀라 태런트 씨는 한 마디로 사기꾼이다. 젊은 시절에 방문 판매원으로 일하다가 어떻게 왕년에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던 배운 집안의 따님을 꼬드겨 결혼에 성공해 버리나를 낳고 키웠다. 그동안 자신은 최면술을 배워 최면을 걸어 질환을 치료하는 최면술 치료사로 활동하고 자기 이름 앞에 스스로 닥터를 붙여 “닥터 테런트”로 활약하고 있다. 잘 사는 건 아니지만 먹고 사는 데 큰 불편은 없을 정도이다. 그렇게 근근이라도 살아가면 문제가 없을 텐데 진짜 부르주아로 살고 싶은 허망한 희망사항이 스스로를 사기꾼으로 만들고 있다는 걸 아마 본인은 몰랐을 걸? 베이질 랜섬은 한눈에 닥터 테런트를 보고 떠돌아다니며 한탕 잡아보려는 역겨운 부류라고 단정한다. 거짓말쟁이에 교활하고 속물이며 비열한으로 가히 최하위의 인물이라 저런 딸이 있다는 것이 짜증나고 당황스러운 사실일 정도라니 뭐 말 다했지.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딸한테마저 더없이 사랑스럽고 속세를 초월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사기꾼 무리 같은 인상을 받았다. 뭔가 전시품 같고 공연단에 속한 것 같고, 항상 가스등 불빛 속에 사는 사람 같은 분위기.
베이질 랜섬이 미스 첸설러 집에서 특별하지 않은 저녁식사를 한 다음에 올리브, 아델라인과 함께 ‘새로운 사상’을 가진 몇몇 친구들이 금욕주의자 미스 버즈아이의 집 연설회에 동참하며 올리브-버리나-베이질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미스 버즈아이는 노예제 폐지 운동에 앞장서고 가장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이제는 나이가 많아 현역에서는 거의 은퇴를 한 상태였다. 이날 공식적인 연설자는 여성해방운동의 위대한 주창자로 알려진 퍼린더 여사였다. 255쪽에 가면 퍼린더 여사의 여성해방에 관한 입장이 “역설적”으로 나오는 바, 소개하면:
“그들이(올리브와 버린다) 여성의 역사적 불행에 역점을 두는 데 반해, 퍼린더 여사는 그런 일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역사에 관한 지식조차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여사는 모든 것이 바로 오늘 시작된 듯, 여성이 불행한가 아닌가와는 상관없이 여성의 권리를 요구했다.”
작품 속에서 퍼린더 여사는 적극적으로 연설을 하지 않는다. 위대한 페미니즘 주창자의 연설을 헨리 제임스도 “창작”하기엔 버거웠던 것 같다. 내용이 어떠했는지는 몰라도 올리브와 버린다는 여사의 연설에 그리 큰 공감을 하지 않은 것 같다. 퍼린더 여사가 연설 비슷하게 하고, 이어서 버린다가 연단에 올라 열정적인 웅변을 한다. 당연히 청중들은 열광을 하며 올리브는 이 모습에 반해 그 자리에서 당장 올리브를 후원하기로 결심해버렸다. 그러나 베이질 랜섬은 연설 말고 연설의 내용을 꼼꼼하게 들었다. 이후 랜섬은 버린다의 연설에 관해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연설가로서의 자질을 확인했고, 토론 분야와 개혁의 대의에서 그녀의 존재가 갖는 중요성도 판별했다. 그녀의 연설은 그 자체로는 기껏해야 ‘학교’ 토론회에서 머리 좋은 소녀가 암기해서 낭송하는 재치 있는 에세이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다. 논지가 얄팍하고 횡설수설인 데다 일반론의 범벅에 불과한데, 단지 버레지 부인 집의 베일에 씌운 램프 불빛을 받아 그럴듯하게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p.418)
그리하여 결국 버리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유창하게 재치있는 말을 늘어놓는 삼류 장광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럴듯하게 꾸미는 협잡 같은 것에 대한) 수요는 요즘 날로 높아지고 있으며, 귀가 얇고 군중심리에 휩쓸리기 좋아하는 우둔한 대중, 그의 조국의 계몽된 민주주의는 그러한 헛소리를 얼마든지 삼켜줄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그녀가 앞으로도 몇 년 동안은 (중략)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러는 와중에 평생 풍족하게 살 만한 재산을 마련하게 될 터였다.” (p.500)
이렇게 아버지 닥터 테러트의 꿈을 달성하게 해줄 착한 딸? 에이, 그거야 두고 봐야 알지.
나는 이 책을 페미니스트가 읽어봤으면 좋겠다. 내가 읽기에 헨리 제임스가 여성해방을 주창하는 인물들을 등장시켜 활발하게 논의를 진전시켰지만 작품은 페미니즘 적이 아니다, 오히려 반 페미니즘 입장에 가깝다, 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게 19세기 중후반 시절의 생각을 21세기 초반에 읽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낀 것인지, 즉 시대를 감안하면 페미니즘이 맞기는 하지만 지금 시각으로 보아서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헨리 제임스가 페미니즘을 정말로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비꼰 것인지 지금의 페미니스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 알고 싶다. 이건 정말 궁금해서 하는 말이다. 참고로 나는 내놓고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남자들은 믿지 않는 족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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