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 하이웨이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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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모 토울스. 당연히 <모스크바의 신사>. 읽을 때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읽은 다음에는 신세계 백화점 앞 보도에 서서 <모스크바의 신사> 읽어보세요, 대박입니다, 재미없으면 책값 물어드리겠습니다, 오두방정을 떨 만큼 열광했다가, 날이 가고, 주가 가고, 달이 가기가 무섭게 휘리릭, 감동이 사라져버렸던 책이다. 처음엔 깊게 생각했다. 조금 지나도 깊게 생각했다. 그래서 결론 내리기를, 미국인이 쓴 전형적인 미국식 이야기. 러시아가 후세에 남긴 불멸의 세가지 예술품. <호두까기 인형>, <전쟁과 평화> 그리고 캐비어. 이게 왜 러시아가 남긴 3대 불멸인지를 미국인 관광객에게 설명하는 메트로폴 호텔 레스토랑의 웨이터 로스토프 백작의 언변도 그렇거니와 할머니한테 물려받은 책상 다리 속에 숨긴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금화 세트.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을 수도 있는 비밀경찰 우두머리한테 비아냥 섞인 농담을 흘리는 장면 등등이 시간이 가면서 느끼했던 거다. 끓는 버터를 잔뜩 퍼부은 미디엄 레어 스테이크를 포식한 직후 같은 느낌. 동치미 한 사발이나 잘 익힌 배추김치 한 쪽 씹었으면 하는 기분.

  오늘 오전에 <링컨 하이웨이> 다 읽었고, 지금 기분도 딱 그렇다. 집에 와서 배추김치 말고 총각김치 한 입 베어 물었다. <링컨 하이웨이>는 무대가 미국이고 등장인물 전원이 미국인이며, 주인공(또는 조연) 가운데 한 명이 WASP 귀족 중의 귀족이라 <모스크바의 신사>에 비할 수 없이 미국적이다. 저 멀리 독립전쟁, 남북전쟁, 게티스버그 연설 같은 애국주의, 미대륙을 횡단하는 화물열차 무단 승차, 악당과 정의파 흑인, 악당을 달리는 열차에서 밀어 떨어뜨리는 미국식 권선징악, 모험에 나선 형제 등등. 역시 이 작품에서도 열쇠를 푸는 가장 중요한 소도구는 돈. 최근에 읽은 소설책 중에서 폴 오스터의 <4 3 2 1>에서도 그랬고, 셀리 리드가 쓴 <흐르는 강물처럼>에서도 그랬는데 <링컨 하이웨이>에서는 무려 두 번이나 사람이 죽어 하늘에서 쾅, 쾅, 돈벼락이 떨어진다. 오스터의 말대로 누군가의 죽음이 누군가한테는 행운을 주기도 한단다. 좋겠다. 나는 주변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죽어도 라면 국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더라. 그러니 내 친지들은 죽지 말았으면 좋겠다.


  작품은 1954년 6월 12일에서 시작해 열흘 동안 벌어진 사건의 기록이다. 윌리엄스 원장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에 도착한 열여덟 살의 에밋 왓슨. 15개월 전 모건 시내의 풍물장터에서 자기보다 한 학년 위이자 소도시의 이름난 개고기 지미 스나이더가 에밋의 아버지를 모욕하는 몰상식한 발언을 하는 걸 한 번 참고, 두 번 참고, 세 번을 참을 수 없어 딱 한 방, 잽을 날렸는데 한 방으로 코뼈가 부러진 지미가 뒷걸음질 치다가 마침 늘어진 케이블에 발모가지가 걸리는 바람에 자빠지면서 벽돌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그날부터 62일 후에 기어이 숟가락 놓고 말았다. 에밋은 재판을 포기하고 자신의 실수와 상해치사를 인정해 설라이나 소년원에서 18개월 노동교화형을 받았다. 그러나 그동안 20년 간 한 번도 농사에 성공해본 적이 없는 아버지가 숨을 거두어 이제 혼자 남은 동생 빌리를 부양해야 하는 입장을 고려한 당국이 3개월을 감해 15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8백쪽이 넘는 거대 모험담을 시작한다. 에밋도 집에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직 모건에는 지미 스나이더의 가족과 친척, 친구들이 워낙 많이 살고, 그 외에도 아직 분노를 거두지 않은 사업상 거래인, 교회 신자들이 널려 있어 아버지가 죽은 집에 눌러 살기 힘들다는 것을. 그리고 몰랐던 것도 있다. 윌리엄스 소년원 원장의 차 트렁크에는 유랑극단의 셰익스피어 전문배우라고 주장하는 아버지의 범죄를 뒤집어쓰고 소년원에 들어온 더치스와, WASP 중의 WASP이며 미국 최고의 귀족 집안의 자재로, 길가에 방치된 소방차를 돌려주려고 소방차를 운전해 소방서로 가는 도중에 진짜로 불이 나 소방차를 출동시키지 못하게 한 소년, 그래서 건물이 홀랑 타버린 바람에 소년원 행을 막지 못한 울리가 타고 있었다. 소방대원은 소방차를 세워두고 바로 앞에 있는 밥집에서 순대국을 먹고 있었다나.

  에밋의 아버지는 토담대, 토지담보대출을 받아 농기계를 구입하려 했지만 알고 보니 전에 진 빚을 갚기 위해 대출을 받은 것이고, 매년 점점 소출이 줄었다가 작년엔 아예 제로로 떨어져 이제 아버지의 재산, 토지와 주택, 기타 동산과 부동산 모두를 집행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다만 헛간에 놓인 담청색 4도어 하드톱, 1948년형 스튜드베이커 랜드크루저는 에밋이 직접 노동해 번 돈으로 산 것이기 때문에 집행대상에서 제외했고. 그리하여 에밋은 똑똑한, 똑똑하다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어서, 영낙없이 작가 에이미 토울스가 메타모르포젠, 변신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는 동생 빌리와 함께 48시간 이내에 엄마를 찾아 링컨 하이웨이를 타고 1,500km를 달려 샌프란시스코로 갈 예정이었다. 엄마는 8년 전에 아버지와 두 아들 곁을 떠나 서쪽으로 가면서 매일 한 통씩 엽서를 보냈다. 아버지가 이를 감추고 있다가 죽은 다음에 빌리가 발견한 것이, 링컨 하이웨이를 타고 네브래스카 오갈랄라, 와이오밍 샤이엔, 롤린스, 옥스프링, 유타의 솔트레이크시티, 네바다 일리, 리노와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를 거쳐 7월 4일 샌프란시스코 링컨 공원의 리전오브아너 미술관에 도착 일정. 엽서의 소인이 말해줬다.

  이 똑똑한 빌리는 나중에 형 에밋의 목숨을 두 번 정도 살려주는데, 얼마나 침착하고 똑똑하고, 기억력 좋은 지, 진짜로 무서워지기까지 한다니까. 울리의 증조부가 금고에 걸어놓은 네 자리의 비밀번호를 울리가 평소에 했던 이야기를 기억해 단 여섯 번만에 풀어버리는 신공이라니. 형 살리는 건 한 번만 이야기하겠다. 에밋이 소년원에 들어갈 때, 빌리는 형에게 말한 적이 있다. “형, 분노가 솟구칠 때 상대를 때리지 말고 숫자를 열까지 세겠다고 약속해.” 이 한마디로. 그 후 에밋의 분노 게이지가 9이상으로 오르는 기회가 있을 예정이면, 때마침 빌리가 눈앞에 나타나 당시 얼굴표정으로 약속을 떠올리게 만든다. 다른 한 번은 직접 확인하시고. 그래서 에밋, 빌리 형제는 중고차이긴 하지만 상태가 나쁘지 않은 스튜드베이커를 타고 7월 4일 밤에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리전오브아너 미술관에 올 엄마를 만나러 캘리포니아로 향……하려다가 생각지도 못한 소년원 동기생 더치스와 울리 때문에 오히려 캘리포니아의 반대 방향, 업스테이트 뉴욕, 정식명칭 에드론댁 산맥의 할아버지 별장으로 떠나게 된다.

  하필이면 왜 에드론댁? 거대한 부를 누리던 울리의 할아버지는 자신이 죽을 때 울리를 위해 신탁자금 형태로 조금의 돈을 남겨두었는데 1954년 현재가치로 15만 달러에 달했다. 문맥상 지금 우리 돈으로 치면 20억원이 넘는 돈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근데 이건 울리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매형이 관리를 하고 있는데, 울리가 소년원에 가게 되자 도무지 정상적인 성인으로 성장할 싹수가 없다고 매우 올바른 판단을 한 매형은, 울리가 성인이 되도 이것을 빼서 쓰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울리가 여러모로 궁리를 해보니 에드론댁 별장에 있는 할아버지 방의 비밀금고에 딱 15만 달러의 현금이 있는 게 생각이 나서, 울리, 더치스, 에밋이 함께 가 금고를 열어 셋이 사이좋게 5만 달러씩 갖자고 제의해버렸다. 에밋은 앞으로 착하게 살자고 굳게 마음먹어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착한 천성을 가지고 있으나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크게 사고를 칠 수도 있는 성격의 더치스가 울리만 태운 채 에밋의 스튜드베이커를 몰고 뉴욕으로 날아가버리는 바람에 에밋과 빌리도, 돈이 없어 화물열차를 훔쳐 타고 뉴욕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에밋은 더치스의 성격이 이렇다고 빌리에게 이야기한다.

  “더치스는 에너지와 열정뿐 아니라 선의로도 가득 차 있어. 그러나 때때로 그의 에너지와 열정이 그의 선의에 장애가 되고, 그럴 경우 그 결과는 종종 다른 사람에게 떨어진다는 점이야.”  (p.217)


  스튜드베이커의 트렁크에 든 스페어 타이어 아래 깊숙한 곳에는 아버지가 남긴 봉투가 있어서, 평생 운 없는 슐레밀로 살았으나 어긋난 행위를 한 적이 없는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법을 어기고 에밋에게 남긴 20달러짜리 빳빳한 신권 150장, 합해서 3천 달러, 지금 우리 돈으로 5천만원을 넘어갈 것 같은 현금이 들어 있었다. 캘리포니아에 도착하면, 목수일을 배운 에밋이 허름한 집을 사서 수리해 비싸게 파는 사업을 할 종잣돈으로 쓸 것이라 결코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 에밋과 빌리의 20세기 미국판 오딧세이아는 시작한다. 결말이 어떠할지 상상이 가시지? 미국의 대중예술에서 모험에 나선 이들을 걱정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건 맞는데, 나머지도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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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5-22 10: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스크바의 신사> 저도 진짜 재미나게 읽고 와우! 했는데.... 폴스타프 님처럼 좀 지나니까 완전 휘발되더라고요? 재미도 감동도 다 휘발 ㅋㅋㅋㅋㅋ 그 후로 이 작가 책은 그냥 손이 안 가더라고요; 처음 만난 작품이 아주 좋았는데도 더는 안 읽고 싶어지는 참 신기한 작가.

Falstaff 2024-05-23 05:35   좋아요 0 | URL
그죠, ㅎㅎㅎ 그게 다 ˝버터의 힘˝입니다.

케이 2024-05-23 13:17   좋아요 3 | URL
저도 <모스크바의 신사> 는 이상하게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안드는데, 왜 그런지 생각해보니 주인공이 너무 나이스한 남자라서 그런 것같아요 ㅋㅋㅋ
너무 별로인 주인공도 읽기 괴롭지만, 또 어느 정도는 찌질하고 덜 떨어져야 정이가고 또 읽고 싶고 그렇더라고요. (예) 미성년의 아르까지 같은 ㅎㅎㅎ (저만 그런가요?)
오랜만에 와서 별 것아닌 글만 남기고 갑니다.
저는 요즘 책이고 글이고 아무 것도 못하고 애만 키워요.
그런데 팔스타프님이 예전에 하셨던 책은 언제든지 읽을 수 있다. 지금은 애를 키울 때니 애만 키우면 된다고 하셨던 말씀이 묘하게 위안이 된답니다.
저희 애들은 이제 40개월 되갑니다. 힘들지만 최고로 귀여운 시절이 가는 게 좀 아쉽기도 한 요즘입니다.
언제나 건강하세요!

Falstaff 2024-05-23 16:17   좋아요 1 | URL
케이 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
벌써 40개월이군요! 쌍둥이라고 기억하는데 제일 예쁠 때네요. 저도 그새 손자가 하나 생겨서 14개월이 넘었답니다. 눈에 넣고 다니느라 요즘 눈꺼풀이 무거워요. ㅋㅋㅋㅋ
책은 언제든지 읽을 수 있더라고요. 저도 먹고 사느라 몇 십 년 안 읽다가 다시 시작한 거거든요. 인생 뭐 있습니까? 지금 제일 중요한 거에 집중하면 그게 제일이지요. 이제 저는 몇 안 남은 취미만 열나게 즐기며 산답니다. 책 읽는 거, 음악 듣는 거. 인생에서 지금만큼 행복한 시절이 없었지 싶습니다.
내내 가족 모두 건강하세요!

stella.K 2024-05-24 1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유가 참! 버터에 동치미나 총각김치. 사실은 환상의 조합아니겠습니까?
이 사람의 책은 모스크바 하나면 되겠군요. ㅋ

Falstaff 2024-05-25 13:16   좋아요 1 | URL
아이구 머리야..... 어제 오랜만에 꽐라 itself가 되는 바람에 얼굴이 땡땡 부었습니다. ㅋㅋㅋㅋ 이제야 답글을 다는군요.
옙. 토울스는 <모스크바의 신사> 한 편 정도면 뭐...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요, 도서관 서가에 있으면 저절로 손이 가기는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