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의 변화 - 상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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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마라이의 장편소설 세 편을 연달아 읽는다. 몇 년 전에 <열정>과 <성깔 있는 개>를 읽고 마라이 특유의 어법에 빠진 이후로 이이의 작품을 한 번 천착하리라고 작정을 했었다가 그만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친애하는 서재동무 님께서 올 1월에 참 근사하게 읽었지만 귀찮아서 긴말을 적지 않겠다는 걸 보고 나서야 아, 마라이가 있었지, 무릎을 탁, 치고는 세 작품을 읽게 되었으니 순서대로 <유언>, <결혼의 변화> 그리고 <이혼전야>다. 당연히 다 상태 좋은 헌책을 샀다. 마라이 작품 읽기를 중도무이한 건 솔 출판사가 이이의 책들을 전부 품절시킨 채 오늘에 이르기 때문이었다. <이혼 전야>는 아직 읽지 않아 어떤지 모르겠는데(지금은 읽었다. 이것도 대박이다.), <결혼의 변화> 같은 좋은 작품의 출간을 멈춘 건 소위 문화사업이란 출판업을 영위하는 법인으로서는 정말 바람직하지 않다. 솔 출판사는 조속히 쇄를 찍거나 아니면 다른 회사에 판권을 팔았으면 좋겠다. 유독 솔 출판사에 이런 책들이 많다.
  산도르 마라이는 1900년에 지금은 슬로바키아 영토인 카사에서 귀족 작위를 받은 유복한 시민 가문에서 출생했다. 마라이의 선조가 독일 작센에서 이주한 헝가리 인이라 헝가리어와 독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했으며, 중동부 유럽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구사할 줄 알았던 프랑스어에도 능통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스스로 끔찍해 했던 뉴욕에서 십여 년, 캘리포니아에서 몇 년 살면서 의사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만큼 영어도 능숙했다고. <결혼의 변화>를 비추어 본 산도르 마라이는 양차 대전 이전 유럽의 귀족 부르주아 문화를 평생 그리워하며 살지 않았나 싶다. 실제로 그는 나치를 혐오했으며 소비에트 체제에 반대하여 헝가리 안에서 적응하기에 곤란함을 겪었다고 한다. 미국으로 거처를 옮기고서도 1956년 헝가리에서 있었던 반공산주의 시민운동을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가 지원해주지 않은 것에 매우 실망한 마라이는 헝가리에서 소비에트 군사력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나 자신의 작품 출간하게 할 것이라 주장했지만, 결국 1989년 여든아홉 번째 생일을 두 달 앞두고, 사람이 너무 오래 사는 건 분별없는 짓이라는 말을 남기고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당시 마라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60년이 넘게 함께 산 아내도, 양아들도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모두 3부로 되어 있는 <결혼의 변화>는 일롱카와 페터는 친구에게, 그리고 유디트는 젊은 애인에게 한 장소에서 자신의 지난날을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일롱카와 유디트는 페터의 첫 번째, 두 번째 아내이다. 1부에 해당하는 일롱카의 페터에 대한 열정적 사랑만을 이야기해보자.
  일롱카와 친구는 제과점 한쪽 구석에 앉아 삼 년 전에 이혼한 페터가 진열장에 든 설탕에 절인 오렌지 껍질을 사고 갈색 악어가죽 지갑을 열어 돈을 꺼내는 걸 발견한다. 악어가죽 지갑. 그건 십여 년 전에 일롱카가 페터의 마흔 번째 생일에 선물한 것. 일롱카는 이혼 후에도 서로 정중하고 세심하며 관습과 풍습의 요구에 충실하여 좋은 친구 사이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결혼은 결혼이고 이혼은 이혼이니까. 그리하여 일롱카는 이혼 당시 남편으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재산을 받아냈다. 거의 치지 않는 그랜드 피아노까지 실어왔으니.
  일롱카의 친정집은 한 달 수입이 8백이었던 데 비하여 남편은 한 달에 6천5백을 벌었으며, 친정은 임대주택에 살았고 시댁은 빌라를 통째로 빌려 살았다. 친정은 제라늄이 놓은 발코니로 충분했던 반면 시댁은 늙은 호두나무가 심어진 작은 정원과 아담한 꽃밭 두 개가 있었다. 일롱카는 어떤 식으로든 삶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교육을 받았고 남편은 무엇보다 절도 있고, 교양 있고, 우아하게 살아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교육을 받아, 이혼 당시에 일롱카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었고, 하루의 지체도 없이 매달 첫날에 일정한 금액의 생활비를 일롱카의 당좌계좌에 입금하고 있다. 남편은 공장을 운영하며 자주 여행을 떠난다. 예술가들에게 일을 맡기고 남들보다 특별하게 후한 보수를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 번 입 밖을 나온 말은 결코 잊지 않았으며 언젠가는 말한 바를 그대로 행한다. 페터가 아내 외의 다른 여성과의 관계를 발전시킬 수 없는 양식과 도덕과 절제를 지니고 있음을 일롱카는 누구보다 확신하지만, 남편은 내 사람이 아니라 철저하게 비밀을 간직한 낯선 사람이라는 것도 분명하게 알고 있다.
  결혼 3년 반 만에 아들을 낳았으나 두 돌 삼 주 만에 성홍열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2년여를 더 살다가 이혼에 이른다. 결혼 3년 만에 남편과 함께 살 수 없음을 깨달았는데 이때 아이가 생겨 유지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남편이 부유한 귀족인 것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페터와 결혼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그가 슬픔과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는데 아무도 도와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많은 고통을 겪었다. 페터는 결혼을 하고도 마흔 살의 나이에 사막, 결혼과 가정이란 사막에서 은둔자만큼 고독했음을.
  어느 날, 일롱카는 페터가 실수로 두고 출근한 갈색 악어가죽 지갑을 관찰하게 된다. 고액권 지폐, 어음과 수표, 죽은 아이의 사진과 가위로 자른 3센티미터 가량의 보라색 끈. 이게 데스데모나의 손수건이고 토스카의 부채일 줄이야. 보라색은 왕비의 색. 잠깐 반짝이는 한순간의 광채로 사용해야지 조금이라도 과하게 쓰면 전부가 유치해져 버리는 마법의 빛깔인 것을 아는 일롱카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 색. 그러니 페터가 어느 여인에게 정표로 끈의 끄트머리를 잘라 그것을 아들의 사진, 이미 죽어 찬 땅에 묻힌 아들의 사진과 함께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것. 그러니 복장이 뒤집히지 않겠는가. 물론 뒤에 가면 명예를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아는 페터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음을 독자는, 일롱카의 영원한 오해와 별개로 독자만 알게 되지만, 자기 앞에서 바락바락 기어오르는 아내에게 페터는 변명 한마디도 내놓지 않는다. 어쨌든 보라색 끈이 자기 지갑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니까.
  일롱카가 페터의 절친한 친구이자 작품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조연인 작가 라자르에게 힌트를 받아 보라색 끈의 주인을 밝혀낸다. 너무도 가난해 겨울을 나기 위해 고향 트란스다뉴비아에서 땅을 파고 토굴 속에 살다가 하필이면 특별한 한파가 몰아쳐 수천 마리의 들쥐들이 토굴로 몰려들어 쥐들과 겨울을 나야 했던 시절을 겪은 시댁의 하녀 유디트. 일롱카가 알던 하녀들과 달리 솔직하고 당당한 유디트의 목엔 보라색 끈으로 메달이 달려 있었다. 그것을 낚아채 열어보니 남편의 16년 전과 1년 전 사진이 들어있었다. 남편이 자기 집 하녀하고 관계가 있다는 충격. 라자르가 그녀에게 말했듯 현실이 얼마나 단순하고 진부하면서도 불안에 떨게 하는지 일롱카는 격렬한 상실에 빠져들고 만다. 그러나 유디트는 곧바로 영국으로 가버리면서 이들의 결혼생활이 이어질 수 있게 만든다. 일롱카에게 사과를 하고.
  남편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은 정열적인 아내의 사랑과 언제나 품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남편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의사소통의 부재. 다른 독자는 어떻게 읽었는지 모르지만 이 부부의 종말은 의사 불통에 있었다고 믿는다. 물론 마지막 순간까지 파탄을 막아보려는 노력을 계속했으나, 이미 서로가 서로에게 입힌 상처로 돌이킬 수 없었던 이들은, 유디트가 영국에서 귀국하자마자 서로 합의하여 즉각 이혼하고 페터는 바로 다음 날 유디트와 재혼해버린다.


  이 작품의 백미는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다. 어쩌면 그렇게 세심한 문장들로 마음에 저린 이야기들을 만들고 있는지 놀랍다. 1949년 나폴리 포실리포에서 초고를 쓰고 1978년에 나폴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살레르노에서 완성을 한 작품. 두 장소가 그리 멀지 않지만 시간의 흐름은 무려 29년. 산도르 마라이는 이 책에서 제목처럼 결혼이 어떻게 변하는지 만을 관찰하고 있지 않다. 이 속에 먼 시절의 정의와 신뢰 등 귀족 출신의 시민계급이 지녀야 할 미덕을 향한 향수를 농밀하게 그리기도 했고, 사회 구조의 변화에 따른 문화란 무엇인가 하는 예술론에도 집중하고 있다. 즉 자신의 기본이 됐던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이 소비에트가 무력을 앞세워 진입을 한 새 시절의 격류 속에 느껴야 하는 소외와 우울 등. 그리하여 아름답지만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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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1-03-18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산도르 마라이가 이 작품을 나폴리에서 썼다고 말씀하시니 갑자기 불끈 주먹을 쥐고 읽어야지 하게 되네요. 저는 산도르 마라이 작품 별로 읽지 못했지만 읽는 동안 정신 못차리고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던 그 느낌만 갖고 있어요. 올해 저도 산도르 마라이에게로.

Falstaff 2021-03-18 09:53   좋아요 2 | URL
읽어보니 제일 재밌는 게 <열정>이고요, 대표작은 <결혼의 변화> 같더라고요.
내일도 마라이 다른 책의 독후감 올릴 겁니다. ㅎㅎㅎ (에이, 본문에 써 놨네요, <이혼전야>라고 ㅋㅋㅋ)

수이 2021-03-18 09:55   좋아요 3 | URL
이혼전야_라니 두근두근, 제목만으로도 두근두근거렸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저 이혼할뻔 하다가 아 그때 그 스트레스 갑자기 막 몰려오네요 폴스타프님 ㅋㅋㅋㅋㅋㅋㅋㅋ 일단 책장 어디에 산도르 마라이가 있지 하고 찾아보고 오겠습니다.

Falstaff 2021-03-18 10:03   좋아요 3 | URL
살다가 대판 걷어차고 사네 안 사네 한 번 안해본 인간들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대개의 사람들이 배우자 스트레스 때문에 한 10년 빨리 죽는 거 같습니다. ㅋㅋㅋㅋ

수이 2021-03-18 10:07   좋아요 1 | URL
저는 너무 마음이 평안해서 ㅋㅋㅋㅋㅋㅋㅋㅋ 같이 사는 남자가 그러던데요. 자기는 120세까지 살 거 같아. 왜 그렇게 보여? 하니 무념무상_이라고 이야기하길래 내가 너땜시 속이 썩어 문드러진 상태로 무념무상을 노상 외치구 다니는 것이다 하지만 네 말대로 120세 찍을 거 같다 고 답해줬습니다

coolcat329 2021-03-18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셋 중 아무거나 먼저 읽어도 상관없는거죠?

Falstaff 2021-03-18 11:02   좋아요 2 | URL
걍 두 작품만 읽으셔도.... <열정>하고 <결혼의 변화>,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청아 2021-03-18 12: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팔스타프님 조심스럽게 알베르토 모라비아<경멸>추천드려요.어쩐지 이미 읽으셨을지도 모르겠지만요. 👉👈레삭매냐님 리뷰보고 어제부터 읽고있는데 좋아하실듯해요ㅋㅋ네오리얼리즘의 거장이랍니다.

Falstaff 2021-03-18 12:44   좋아요 3 | URL
음하하하... 이런 추천, 조심 안 하셔도 됩니다!
냉큼 주워와야지요. 6월~7월 정도에 읽을 수 있겠네요.
ㅋㅋㅋㅋ 전 책 읽는 것도 예약제예요. ㅋㅋㅋㅋ

청아 2021-03-18 12:48   좋아요 3 | URL
오 예약제 멋짐요! 고개가 끄덕여집니다👍이 책 한잔 하시면서 서서읽으신다에 500원 걸겠습니다.ㅋㅋㅋ

Falstaff 2021-03-18 13:17   좋아요 3 | URL
예약제 하면 생기는 최대의 미덕이, 사놓고 읽지 않는 책이 없다는 겁니다.
일정 기간에 산 책들을 초간이 빠른 순서대로 읽거든요. 읽는 도중에 산 책은 지금 읽고 있는 책 무더기가 다 끝나야 새롭게, 같은 순서대로 읽으니까, 말 그대로 한 권도 빼지 않고 싹 해치울 수 있습니다. ㅋㅋㅋㅋ

청아 2021-03-18 13:24   좋아요 1 | URL
음..예약제 관련해서 언제 시간되시는대로(간략하게라도요) 페이퍼 한 번 써주심 어떨까요.
놀랍고 솔깃합니다! ‘쌓인 책 읽기‘에 저포함 다른 분들에게도 영감을 줄것 같습니다.🤓👍

페넬로페 2021-03-18 15:24   좋아요 1 | URL
경멸도 예약요~~

청아 2021-03-18 16:21   좋아요 1 | URL
페넬로페님~재밌을 뿐만 아니라 소중해지려고해요.(읽는 중이니 ‘하다‘가 아님요ㅋㅋ)
이것도 커플 이야기예요.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그냥 사려구요! ㅋㅋ

페넬로페 2021-03-18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결혼의 변화인데 이 책의 내용이 결혼에 대한건가요? 아님 어떤 비유적인 의미?

Falstaff 2021-03-18 15:19   좋아요 2 | URL
진짜로 결혼생활을 하는 부부들이 출연합니다.
페터가 마음 속에 유디트를 담아두었음에도 일롱카와 결혼을 해서, 아주아주 충실하게 결혼생활을 이어가지만 마음 속 유디트의 존재를 알게 된 일롱카와 불화를 해 이혼을 하는 과정이 일롱카의 입장에서 고스란히 들어 있고요,
유디트와 재혼한 다음에 유디트와의 만남, 결혼, 1년 후 이혼까지 페터의 입장에 쓴 것이 2부,
이런 모든 것을 저 시골 빈민 출신의 유디트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젊은 애인에게 호텔방에서 밤새 이야기해주는 것이 마지막 3부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결혼에 관한 것입지요. 이 속에 2차대전이 끝나고 소련군이 밀려드는 폐허 헝가리,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마라이의 쓸쓸함, 지나간 신사들의 범절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좌악 깔리고요.
이런 거 다 제쳐두고, 아 글쎄, 재미있다니까요! ㅋㅋㅋㅋ

페넬로페 2021-03-18 15:23   좋아요 2 | URL
넵!
예약했습니다^^
 
햇빛 속에 호랑이 아침달 시집 12
최정례 지음 / 아침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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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1월에 세상을 뜬 시인. 1955년생이니 기대수명보다 한참 덜 살았다. 아쉽지만 그게 인생인데 어쩌랴. 편히 잠들기를.


  이이의 두 번째 시집. 살아생전 세 권의 시집을 남겼다. 첫 시집 《붉은 밭》과 세 번째 시집 《빛그물》은 창비에서 냈고, 이 시집은 1998년에 세계사에서 출간했다가 절판된 것을 ‘아침달’이란 귀여운 이름의 출판사에서 2019년에 복간했다.
  1990년, 만 35세에 등단. 1990년이면 시의 파편화가 본격적으로는 진행되지 않았을 시기. 최정례의 시가 비록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지독한 자기감정의 특화 현상이 두드러지지는 않아 요즘 시들과 비교하면 무슨 뜻인지 짐작은 하겠다. 나는 이번 세기에 활발하게 시작을 하고 있는 시인들의 작품은 그리 많이 읽어보지 않아 선뜻 입에 올리기 쉽지 않다. 그러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아니면 적어도 허풍이라도. 그래서 조금의 용기와 많은 허풍을 섞어 말을 해보자면, 최정례는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중심으로 잡고 시인이 보는 해당 사물의 감각을 덧칠하고 있는 거 같다. 쉽게 얘기해 시의 개별화 현상이 이미 최시인의 시에 시작하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시에 따라 사물의 정형에, 또는 감각으로 조금씩 치우치는 것이 정상이리라. 세상의 딱 가운데란 건 없으니까. 예를 들어 시집에 제일 먼저 실은 시를 보자.



  드디어


  그를 나무 속으로
  밀어 넣어버렸다
  나무가 둥글게 부풀었다
  바람이 부니
  느낌표가 되었다가
  물음표가 되었다가
  흔들렸다


  아주 멀리
  나도 이제 여행을 간다
  쓱
  나무 속으로 들어가
  아무것도 아닌 표정으로
  손바닥 내밀고
  아니야 아니야
  흔들리는 것이다  (전문)



  나무 속? 어디긴 어딘가, 죽어야 들어가는 관 속이지. 단 내가 들어가 멀리 여행을 가는 나무의 속이 관 속이고, 그를 밀어버린 나무의 속은 내 가슴 속, 또는 내 마음의 속이겠지. 그러니 1연에서는 그를 나의 나무, 내 가슴이나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것이고, 그걸 간직한 채 이제 아주 멀리 나도 여행을 떠난다는 시. 물론 독자의 독법에 따라 의미가 바뀌겠지만 내가 읽은 <드디어>는 그렇다. 사실관계야 어떻든 간에 독자가 이리 쉽게 이해 또는 오해할 수 있는 건 시어들이 아직 본격적으로 파편화, 즉 극도로 개별화한 심상을 노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생각은 자유다. 오해할 자유도 있으니 절대 이 말은 믿지 마시라. 난 아마추어다.
  이 시도 그렇거니와 최정례의 시는 곱상하지 않다. 사물을 표현하는데 에둘러 가지도 않는다. 나무속으로도 그냥 쑥, 여행을 가는 것처럼 들어가 버리고 만다. 그건 이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끝 장면



  한참을 걷다가 집 한 채를 만났습니다 울타리 가득 붉은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불타는 거 같앴습니다 울타리 너머로 두 남자가 보였습니다 하나는 아이고 하나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장독대 옆에도 칸나가 다알리아가 붉은 꽃대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꽃을 좀 줄 수 있냐고 했습니다 안 된다고 했습니다 두 말 않고 돌아서 걸었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한 줄 불더니 나뭇잎들 쏟아지고 벌판이 삽시간에 잿빛으로 변했습니다 오래 걸었습니다 아이가 달려오며 부르는 소리 들은 것도 같습니다 꽃을 내미는 것도 같았습니다 받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릅니다 뒤돌아 안 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돌아본 듯도 합니다 그 집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아니 착각인지도 모릅니다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오래전의 꿈입니다 무슨 뜻일까 무슨 뜻일까 수년을 생각했습니다 어디 먼 다른 생의 알 수 없는 끝 장면이 내 몸에 찍혀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후로 길은 길이란 길은 다 멀고 캄캄했습니다  (전문)



  띄어쓰기, 구두점과 맞춤법은 전부 시 원문에 따랐다. 한 번 다시 읽어보시라. 무슨 뜻인지 이거야말로 애매모호. (근데 ‘애매모호’가 독일어 ‘애매모흐’에서 온 거라며? 프랑스에선 같은 뜻으로 ‘아리숑’을 쓴다던가 그렇지 아마!) 나도 읽다가 중간에서 멈추길 세 번 정도 한 거 같다. 그러다가 마음먹고 끝까지 읽었더니 뒷부분에 “오래전의 꿈입니다.” 하는 거다. 꿈속에서 걷다가 집을 만나고 집 울 안에 붉은 꽃이 있고 남자 둘이 있었는데 뭐 전형적인 개꿈이다. 그냥 꿈 이야기. 사람은 누구나 잊혀지지 않는 꿈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야망이나 뭐 그런 게 아니고 진짜 꿈. 나도 있다. 아주 밝은 여름날, 내가 조금은 관능적인 여자로 변해 남자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주황색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재떨이로 쓰는 중간 크기의 항아리에 하이힐 신은 오른쪽 발을 올리고 몸을 조금 숙인 채 깊숙이 담배 한 모금을 피우는 장면. 담배 끊기 전이었다. 시인은 하여튼 자기가 오래 잊지 않았던 꿈을 혹시 살았을지도 모를 다른 생의 끝 장면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듯하다.
  최정례는 하여튼 돌아가지 않는다. <끝 장면>에서도 보라. 별다른 수사법의 구사 없이 ~했다, ~이었다, 로 끝나는 문장들이, 비록 처음 읽으면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일지라도, 줄줄이 나와 적어도 어떤 그림인지는 눈에 보인다. 꿈 이야기가 나왔다가, 독자가 매우 혼돈스러울 때 쯤해서 이게 예전에 꾼 꿈이라고 말하고, 이어서 다른 생의 끝 장면으로 이어가는 스토리텔링 비슷하게 최정례는 시를 쓰고 있다.
  이이의 시가 거의 내가 감상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단계 정도 아닐까 싶다. 솔직히 요즘 젊은 시인들이 쓰는 개별적 감수성의 시, 사변의 파편화가 상당부분 진행된 시들은 내 수준에서 이해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앞으로 그런 시들을 더 읽음으로 해서 먼저 익숙해지고 조금 더 있으면 이해하는 단계에까지 이를지도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그렇다. 시를 읽는 일은 사물이 시인이란 반사경을 통해 드러나는 모습을 감상하는 것과 비슷하다. 요즘엔 도로나 인도가 좋아져 별로 이런 경우가 없지만 예전엔 길이 자주 푹 패여 비가 오면 웅덩이가 생기고, 웅덩이를 표면에 내 모습도, 간판 글씨와 그림도, 동무들의 옷깃도 보이고 그랬다. 웅덩이에 비친 내 모습과 간판 글씨와 그림과 동무들의 옷깃을 보는 일도 시를 쓰거나 감상하는 것하고 비슷할까? 그럼, 당연하다.



  길이 움푹 파이다


  빗물이 고여 있다 네가 거기 가만히 있다 얕고 투명하다 잠깐뿐이다 네가 빗물에 담겨 있는 동안 구름이 나뭇잎이 들어섰다 갔다 택시가 비켜 갔다 노랗게 흔들렸다


  너는 거꾸로 말하는구나 추악하다는 아름답다로 사랑하다는 끔찍하다로 거꾸로 서서 훌쩍이는구나 누가 네 말을 알아들을까 네가 길바닥에 엎어졌을 땐 자는 줄 알았다 자동차가 지나가고 다시는 읽어나지 않는구나


  길바닥에 빗물이 고여 있다 햇빛이 났다 새 떼가 높이 날았다 새들은 웅덩이를 끌고 어디로 날아갔나 길이 움푹 파였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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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3-16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똑같은 개꿈을 꾸고도 저렇게 생각 할 수 있다니... 다른 생의 끝 장면이 내 몸에 찍혀버린게 아닐까...시인은 왜 저 꿈에 그토록 집착했던 걸까요. 꽃을 받을걸 한 번쯤 후회도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근데 폴스타프님 주황원피스 관능녀꿈ㅋㅋㅋ 어쩔까요 ㅋㅋ 항아리 재떨이ㅋㅋㅋ

Falstaff 2021-03-16 09:53   좋아요 1 | URL
주황원피스 입고 무릎 높이의 항아리에 한쪽 다리 올린 채 담배 피우는 거.... 그게 혹시 제 다른 생의 끝 장면 부근이 아니었을까요? ㅋㅋㅋㅋ
 
유언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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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산도르 마라이를 읽는 일을 뭐라고 해야 하나. 쓸쓸한 내용을 매우 감성적인 문장으로 엮어 작품을 쓴 소설가. 작품 곳곳에 반짝이는 문장이 박혀 소박한 빛을 내는 작품들. 마라이는 1939년에 <유언>을 발표하고 3년 후인 1942년에 비슷한 플롯의 작품 <열정>을 출간한다. 이후 47년이 흐른 1989년, 이탈리아에서 <열정>을 다시 간행하고는 전 세계적인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고.
  <유언>은 이제 젊지도 건강하지도 않은 일인칭 화자 에스터가 삼년 전부터 준비해왔던 자신의 인생 마지막 고백, 45세였던 해의 온화하고 따뜻했던 9월 어느 일요일에 벌어진 일을 이야기하는 형식이다. 토요일 정오 무렵에 에스터는 오페라 가사 같은 전보를 받는다. 과장되고 유치했으며 거짓으로 가득한 동시에 거만하고 허풍스럽고 빤히 들여다보이는 허위로 만든 문장들. 22년 전, 에스터를 비롯한 가족 모두에게 거의 모든 재산과 마음을 훔쳐간 남자. 라요스. 그가 마지막으로 찾아와 에스터에게 남은 나머지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이야기. 시간적 공간을 전보를 받은 정오부터 다음날 자정까지 대략 서른여섯 시간.
  <열정>을 함께 쓰지 않을 수 없다. <열정>은 폴란드 출신 가난한 귀족의 자제 콘라드가 헝가리 최고위급 귀족 가문의 장자 헨릭과의 절친한 우정을 깨고 헨릭이 그리도 사랑한 아내 크리스티나와 정분을 맺고 도망한 후 41년 43일 만에 다시 헨릭의 장원을 찾아오는 일을 그렸다. <유언>은 절판 수준의 품절이기 때문에 별 문제 없으나 <열정>은 아직도 절찬리에 판매중이라 깊은 내용은 소개하지 않겠다.
  <유언>에는 에스터를 평생 돌보아주고 누구보다 깊이 이해해주는 친척이자 하녀 비슷한 누누가 있고, <열정>의 헨릭에겐 무려 75년간 헨릭의 수발을 들어준 아흔한 살의 유모 니니가 있다. 이들은 나이가 든 만큼 현명하고 언제나 주인공의 편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대상, 그들이 주인공을 만나 하는 행위는 천양지차다. 이제부터 <열정>은 그만 이야기하겠다. 비슷한 플롯이라 당연히 3년 후에 쓴 작품이, 적어도 내가 읽기에 훨씬 좋았다는 정도만 남기고.
  <유언>에서 에스터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 22년 전 그토록 사랑하던 에스터 대신, 에스터의 샘 많은 언니 빌마와 결혼해버린 남자. 아이 둘을 낳고 빌마가 세상을 뜬 후에도 자신의 힘이 닿는 한 최대한 처가의 재산을 탕진하고 이제 다시 돌아오겠다고 전보를 보낸 파렴치한. 에스터가 누누에게 내일 그가 온다는 전보를 보여주자 누누는 이렇게 말한다.
  “좋아. 그럼 은식기부터 치워야겠네.”
  돌아보면 에스터는 이십 년 동안 밝은 달을 쫓는 몽유병자처럼 살았다. 하루하루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한 발 한 발 낭떠러지 끝을 따라 걸었던 기분. 집과 정원을 제외한 집안의 모든 재산은 라요스의 꾀임에 빠진 부모가 설정한 근저당으로 사라져버렸고, 빌마 언니가 죽은 후에 가문의 유일한 유산으로 라요스로부터 넘겨받은 다이아몬드 반지는 세련되게 세공한 유리 모조품인 것으로 판명이 났다. 말과 행동 가운데 유일하게 진실한 것은 숨소리뿐인 라요스. 오직 나만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빌마 언니와 결혼해버린 남자. 그러나 에스터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았다. 상처가 다 나은 것은 아니지만.
  지난여름에 쉰 세 번째 생일이 지난 라요스. 오 개새끼, 사랑해1. 에스터의 마음 저 속 아주 자그마한 구석에 이렇게 속삭이는 세포가 아직 하나쯤 남아 있음을 에스터는 부정하지 못했다. 마이너스 미다스의 손. 라요스의 손길이 닿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모조리 거짓이 된다. 또다시 마이너스 미다스의 손이 에스터에 닿을 것을 염려한 누누는 내일 라요스와의 점심 때, 한때 라요스와 우정을 쌓았으나 깨끗하게 결별한 오빠 라차, 늘 조용하고 선량하며 슬픔어린 진실이 배어있는 한 때의 구혼자 티보르, 역시 에스터에게 청혼한 적이 있는 냉정한 인내심의 소유자이며 공증인인 앙드레를 부르라 한다. 앙드레는 라요스가 유일하게 겁을 먹는 인물이기도 하니까.
  당신이 이 책을 진짜 읽는다면, 물론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겠지만 도서관에서 대출하겠다면 말릴 의사는 없으니까, 하여튼 읽는다면 읽는 내내, 속으로 에스터에게 그러면 안 돼, 안 된다고 숱하게 뜯어 말리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만큼 에스터는 진짜 세상에선 거의 존재하지 않는 심성의 소유자이거나, 멍청이거나, 저 멀리 사라져버린 사랑에 환장을 해버린 저능아 또는 병적인 로맨티스트거나, 하여튼, 미친년이다. 설마? 읽어보시면 안다. 마라이 산도르. 아름다운 문장으로 산뜻하게 독자의 가슴을 쥐어뜯은 작가가 어찌하여 이런 내용으로 글을 썼을까. 1939년 작품임을 감안하라고 해도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다. 저 이십여 년 전에 집안의 거의 모든 부동산을 근저당 설정해 대출을 받으라고 꼬드겨놓고 모든 돈을 삼켜버린 달변의 라요스. 어떤 일이든지 자신이 하고 싶기만 하면, 그것을 하기 위해 순식간에 거짓을 만들어내는 천재적인 사기꾼. 자신이 낳은 딸에게도 에스터 이모가 엄마의 유물인 다이아몬드 반지를 가지고 있으니 그걸 받아 지참금 삼아 결혼을 하라고 한 철면피.
  드디어 일요일 오전이 되고 당시 기준으로 어마어마하게 큰 승용차를 빌려 타고 도착한 라요스 무리. 모두 다섯 명. 어떤 부인네 올가와 빨간 머리 젊은이, 그리고 딸 에파와 엑스트라 역할인 아들. 모두 열 명이 점심을 마치고 이제 라요스와 단 둘이 된 에스터에게, 자신 역시 한 때 진실한 사랑을 했던 그녀에게, 그는 첫 마디로 이렇게 묻는다.
  “에스터, 말해줄 수 있겠소? 이 집을 담보로 빚을 지지는 않았소?”

 

_____________

 

1. "개새끼, 사랑해"는 어느 시에서 읽은 귀절이다. 유감스럽게 어떤 시인지는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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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1-03-15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이것 읽으려고 했는데... 도서관에서 대출할게요.^^;;;

Falstaff 2021-03-15 12:15   좋아요 1 | URL
윽, 조심하세요.
착하고 적극적인 성격이신 분들은 책 읽다가 속 터져 돌아가십니다. ㅋㅋㅋㅋ
 
에티오피아 구지 지게사 - 5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1년 10월
평점 :
품절


또 주문해서 오늘 도착. 1킬로그램 완료. 이 커피 하나로 스탬프만 스무 개. 산뜻한 향. 진하게 마시는 것이 좋을 듯. 또 내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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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3-13 0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아 스무개 진심 부럽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킬로그램 사면 스무개주는군요! @_@

Falstaff 2021-03-13 10:13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전 귀찮아서 한 번에 500그램씩 사는 겁니다.

새파랑 2021-03-13 1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시고싶어집니다 ㅎ

Falstaff 2021-03-13 17:35   좋아요 2 | URL
가격에 비해서 착합니다. 추천! ^^
 
제복의 소녀 쏜살 문고
크리스타 빈슬로 지음, 박광자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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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 쏜살문고에서 출간했다. 280쪽에 문고판이지만, 문고판이라고 얕잡아보면 큰 코 다친다. 한 페이지에 스물여섯 줄, 한 줄에 원고지로 서른세 자 남짓. 세계문학전집 가운에 이 책보다 더 빽빽하게 갈피를 채우는 시리즈는 거의 없다.
  작가 크리스타 빈슬로는 동성애 성향을 가진 독일 여성으로 어머니가 죽은 뒤 포츠담에 있는 여자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 경험이 <제복의 소녀>를 쓸 수 있게 했다고 본다. 빈슬로는 단지 기숙학교에서의 에피소드를 그린 것이 아니고 자신의 분신이랄 수도 있는 주인공 마누엘라, 애칭 렐라의 출생에서 시작해 어린 시절부터 나타난 여성을 사랑하게 되는 성향의 순간을 포착한다.
  렐라는 성탄절에 태어났는데 이때 가족으로 아버지 폰 마인하르디스 중령, 엄마 케테 부인, 알리라고 부르는 열 살의 큰 오빠 알프레트와 베르티란 애칭을 갖고 있는 다섯 살 작은 오빠 베르드람이 있었고, 나중에 렐라의 가정교사 안나 선생과 곰 인형, 렐라의 비둘기 라우라가 합세한다. 전형적인 프러시아의 군인가족.
  처음으로 렐라가 의아했던 것은 집에서 아메리카 인디언 놀이를 하면 베르티 오빠와 오빠 친구 게르하르크는 인디언이 되어 양쪽으로 술이 늘어진 바지를 입고 도끼를 흔들며 뛰어다니는데, 자신은 언제나 여성 인디언 스쿠아 역할만 해야 했던 것. 왜 여자는 멋있는 인디언 바지를 입으면 안 되는지, 체조할 때만 바지를 입게 하는지 불만이었다. 안나 선생이 답을 해주기를, 바지는 여자한테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서 그렇단다.
  렐라는 집에서도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가슴에 파묻히는 것을 더욱 좋아했고, 심지어 베르티 오빠가 병이 들어 엄마와 함께 요양을 가야 했던 일을, 오빠가 엄마를 독점한다고 생각해 엄마를 만나러 가는 순간까지 온갖 심통을 부리기도 한다.
  프랑스와의 국경 요새도시인 뮐베르크로 이사를 하고 새로 생긴 학교 친구들 중에서도 때가 꼬질꼬질하고 집에서도 냉대를 받는 아멜리와 자주 어울린다. 본격적인 사춘기가 시작된 오빠 베르티가 렐라의 상급생 에바 폰 마르스도르프에게 관심을 가져 렐라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이때 에바의 반응을 말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학교에서 많은 학생들로부터 숭앙을 받는 에바를 만나게 된 렐라는, 자신도 오빠처럼 바지를 입고 활기차게 에바와 대화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포함해, 오빠는 다음으로 하고 렐라 자신이 자꾸 에바를 연상하게 되는 것을 발견한다. 뮐베르크의 작지 않은 행사에서 바이올린 독주를 하고 능숙하게 스케이팅을 하는 프리츠가 렐라에게 호감을 느끼고 렐라를 어머니에게 소개하는 자리에서, 렐라는 프리츠가 아닌 그의 어머니 레나르츠 부인에게 더 큰 호감을 갖게 된다.
  이런 바지에 대한 경도와 자신보다 더 나이든 여성을 향한 애정은, 어머니가 죽고 호흐도르프의 기숙학교에 들어가 만나게 되는 자애로운 교사 엘리자베트 폰 베른부르크를 대상으로 최고조에 이른다. 더 이상의 스토리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생략하겠으나, 마누엘라는 엄숙하고 고지식하고 까탈스런 여자 기숙학교에서 예상 외로 처음 바지를 입고 자유롭게 활보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을 경험하지만 이어서 곧바로 결말로 치닫는다는 정도는 밝혀도 좋겠다.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소녀 마누엘라 Das Maedchen Manuela>였는데 우리말 제목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유명한 영화 <제복의 처녀>를 본따 <제복의 소녀>로 지었다고 한다. 제복이란 중의적 단어의 선택은, 역자 해설에 의하면, 책의 판매를 위해 널리 사용되어 좀 더 익숙한 것으로 바꾸었겠지만, 정작 이 책을 읽고나면, 청소년 마누엘라가 여자 기숙학교에 입학해 입게 되는 제복만을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좁게 얘기해서 바지를 입지 못하는 모든 여성의 옷이며, 넓은 의미로 여성이란 젠더에게 가해진 당대의 모든 율법과 제재를 포함한 일체의 ‘여성답지 못한 행위’를 의미한다고 봐야하겠다. 물론 여성이 여성을 사랑하는 행위를 포함시켜도 무방하다.
  작가 크리스타 빈슬로는 책에 실은 사진처럼 모직으로 만든 남성 수트에 넥타이까지 맨 복장을 하고 다녔다. 사십대 정도로 보이는 빈슬로의 외모는 여자로 봐도, 남자로 봐도 잘 생긴 얼굴이다. 빈슬로 자신은 비록 고통스럽고 외로웠겠지만 겉으로는 이렇게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며 살았으면서 <제복의 소녀>의 결말을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빈슬로가 이 책의 주인공 마누엘라의 청소년시절까지만 그렸기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이 점이 많이 아쉽다. 마누엘라가 끝까지 마누엘라라는 이름으로 크리스타 빈슬로처럼 당당하게 세상에 자신을 알리며, 무소의 뿔처럼 뚜벅뚜벅 살아가는 모습이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8년 선배 레드클리프 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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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3-12 10: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복의 소녀> 결말은 저도 참 씁쓸했던 거 같아요. 시대적 한계였을까요. 그나저나 <고독의 우물>의 스티븐은 제가 예전에 읽을 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주인공은 레즈비언(동성애자)이 아닌 거 같은데.... 싶었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이는 트랜스젠더라고 명명하는 게 올바를 거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래드클리프 홀 참 여러 가지로 대단한 작가.

Falstaff 2021-03-12 10:20   좋아요 1 | URL
아, 댓글 읽자마자 팍 떠오르네요. 스티븐은 동성애자가 아니라 트랜스젠더... 그렇군요. 그게 더 맞겠습니다.
당시에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를 구분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할머니(1901년~10년 사이 생)한테 들은 이야기들 중에 여자들끼리 연애하면 그 질투가 남녀 사이보다 훨씬 어마어마 하답니다. 여자들은 무조건 혼인을 해야 했던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는가본데, 아하, 그런 이들도 트랜스젠더 쪽이 아니었나 싶군요.

잠자냥 2021-03-12 10: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 책 표지가 참 말랑말랑해서 폴스타프 님이 전철에서 이 표지에, 이 제목에, 이 크기의 책을 읽고 있다고 상상하니(책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상상하니) 웃음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물론 전철에서 읽으시지는 않았겠지만 말입니다.)

Falstaff 2021-03-12 10:20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 저도 될 수 있는대로 표지가 안 보이게 몸 비틀고 막 그랬습지요.ㅋㅋ

새파랑 2021-03-12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보니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ㅎㅎ 북커버 사용을 추천드립니다~!

Falstaff 2021-03-12 11:07   좋아요 2 | URL
걍 내놓고 읽는 거지요 뭐. ㅋㅋㅋㅋ 저도 알고보면 마음은 말랑말랑합니다. ^^

잠자냥 2021-03-12 11:16   좋아요 1 | URL
새파랑 님께 추천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