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유언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산도르 마라이를 읽는 일을 뭐라고 해야 하나. 쓸쓸한 내용을 매우 감성적인 문장으로 엮어 작품을 쓴 소설가. 작품 곳곳에 반짝이는 문장이 박혀 소박한 빛을 내는 작품들. 마라이는 1939년에 <유언>을 발표하고 3년 후인 1942년에 비슷한 플롯의 작품 <열정>을 출간한다. 이후 47년이 흐른 1989년, 이탈리아에서 <열정>을 다시 간행하고는 전 세계적인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고.
<유언>은 이제 젊지도 건강하지도 않은 일인칭 화자 에스터가 삼년 전부터 준비해왔던 자신의 인생 마지막 고백, 45세였던 해의 온화하고 따뜻했던 9월 어느 일요일에 벌어진 일을 이야기하는 형식이다. 토요일 정오 무렵에 에스터는 오페라 가사 같은 전보를 받는다. 과장되고 유치했으며 거짓으로 가득한 동시에 거만하고 허풍스럽고 빤히 들여다보이는 허위로 만든 문장들. 22년 전, 에스터를 비롯한 가족 모두에게 거의 모든 재산과 마음을 훔쳐간 남자. 라요스. 그가 마지막으로 찾아와 에스터에게 남은 나머지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이야기. 시간적 공간을 전보를 받은 정오부터 다음날 자정까지 대략 서른여섯 시간.
<열정>을 함께 쓰지 않을 수 없다. <열정>은 폴란드 출신 가난한 귀족의 자제 콘라드가 헝가리 최고위급 귀족 가문의 장자 헨릭과의 절친한 우정을 깨고 헨릭이 그리도 사랑한 아내 크리스티나와 정분을 맺고 도망한 후 41년 43일 만에 다시 헨릭의 장원을 찾아오는 일을 그렸다. <유언>은 절판 수준의 품절이기 때문에 별 문제 없으나 <열정>은 아직도 절찬리에 판매중이라 깊은 내용은 소개하지 않겠다.
<유언>에는 에스터를 평생 돌보아주고 누구보다 깊이 이해해주는 친척이자 하녀 비슷한 누누가 있고, <열정>의 헨릭에겐 무려 75년간 헨릭의 수발을 들어준 아흔한 살의 유모 니니가 있다. 이들은 나이가 든 만큼 현명하고 언제나 주인공의 편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대상, 그들이 주인공을 만나 하는 행위는 천양지차다. 이제부터 <열정>은 그만 이야기하겠다. 비슷한 플롯이라 당연히 3년 후에 쓴 작품이, 적어도 내가 읽기에 훨씬 좋았다는 정도만 남기고.
<유언>에서 에스터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 22년 전 그토록 사랑하던 에스터 대신, 에스터의 샘 많은 언니 빌마와 결혼해버린 남자. 아이 둘을 낳고 빌마가 세상을 뜬 후에도 자신의 힘이 닿는 한 최대한 처가의 재산을 탕진하고 이제 다시 돌아오겠다고 전보를 보낸 파렴치한. 에스터가 누누에게 내일 그가 온다는 전보를 보여주자 누누는 이렇게 말한다.
“좋아. 그럼 은식기부터 치워야겠네.”
돌아보면 에스터는 이십 년 동안 밝은 달을 쫓는 몽유병자처럼 살았다. 하루하루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한 발 한 발 낭떠러지 끝을 따라 걸었던 기분. 집과 정원을 제외한 집안의 모든 재산은 라요스의 꾀임에 빠진 부모가 설정한 근저당으로 사라져버렸고, 빌마 언니가 죽은 후에 가문의 유일한 유산으로 라요스로부터 넘겨받은 다이아몬드 반지는 세련되게 세공한 유리 모조품인 것으로 판명이 났다. 말과 행동 가운데 유일하게 진실한 것은 숨소리뿐인 라요스. 오직 나만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빌마 언니와 결혼해버린 남자. 그러나 에스터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았다. 상처가 다 나은 것은 아니지만.
지난여름에 쉰 세 번째 생일이 지난 라요스. 오 개새끼, 사랑해. 에스터의 마음 저 속 아주 자그마한 구석에 이렇게 속삭이는 세포가 아직 하나쯤 남아 있음을 에스터는 부정하지 못했다. 마이너스 미다스의 손. 라요스의 손길이 닿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모조리 거짓이 된다. 또다시 마이너스 미다스의 손이 에스터에 닿을 것을 염려한 누누는 내일 라요스와의 점심 때, 한때 라요스와 우정을 쌓았으나 깨끗하게 결별한 오빠 라차, 늘 조용하고 선량하며 슬픔어린 진실이 배어있는 한 때의 구혼자 티보르, 역시 에스터에게 청혼한 적이 있는 냉정한 인내심의 소유자이며 공증인인 앙드레를 부르라 한다. 앙드레는 라요스가 유일하게 겁을 먹는 인물이기도 하니까.
당신이 이 책을 진짜 읽는다면, 물론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겠지만 도서관에서 대출하겠다면 말릴 의사는 없으니까, 하여튼 읽는다면 읽는 내내, 속으로 에스터에게 그러면 안 돼, 안 된다고 숱하게 뜯어 말리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만큼 에스터는 진짜 세상에선 거의 존재하지 않는 심성의 소유자이거나, 멍청이거나, 저 멀리 사라져버린 사랑에 환장을 해버린 저능아 또는 병적인 로맨티스트거나, 하여튼, 미친년이다. 설마? 읽어보시면 안다. 마라이 산도르. 아름다운 문장으로 산뜻하게 독자의 가슴을 쥐어뜯은 작가가 어찌하여 이런 내용으로 글을 썼을까. 1939년 작품임을 감안하라고 해도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다. 저 이십여 년 전에 집안의 거의 모든 부동산을 근저당 설정해 대출을 받으라고 꼬드겨놓고 모든 돈을 삼켜버린 달변의 라요스. 어떤 일이든지 자신이 하고 싶기만 하면, 그것을 하기 위해 순식간에 거짓을 만들어내는 천재적인 사기꾼. 자신이 낳은 딸에게도 에스터 이모가 엄마의 유물인 다이아몬드 반지를 가지고 있으니 그걸 받아 지참금 삼아 결혼을 하라고 한 철면피.
드디어 일요일 오전이 되고 당시 기준으로 어마어마하게 큰 승용차를 빌려 타고 도착한 라요스 무리. 모두 다섯 명. 어떤 부인네 올가와 빨간 머리 젊은이, 그리고 딸 에파와 엑스트라 역할인 아들. 모두 열 명이 점심을 마치고 이제 라요스와 단 둘이 된 에스터에게, 자신 역시 한 때 진실한 사랑을 했던 그녀에게, 그는 첫 마디로 이렇게 묻는다.
“에스터, 말해줄 수 있겠소? 이 집을 담보로 빚을 지지는 않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