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의 변화 - 상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이번에 마라이의 장편소설 세 편을 연달아 읽는다. 몇 년 전에 <열정>과 <성깔 있는 개>를 읽고 마라이 특유의 어법에 빠진 이후로 이이의 작품을 한 번 천착하리라고 작정을 했었다가 그만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친애하는 서재동무 님께서 올 1월에 참 근사하게 읽었지만 귀찮아서 긴말을 적지 않겠다는 걸 보고 나서야 아, 마라이가 있었지, 무릎을 탁, 치고는 세 작품을 읽게 되었으니 순서대로 <유언>, <결혼의 변화> 그리고 <이혼전야>다. 당연히 다 상태 좋은 헌책을 샀다. 마라이 작품 읽기를 중도무이한 건 솔 출판사가 이이의 책들을 전부 품절시킨 채 오늘에 이르기 때문이었다. <이혼 전야>는 아직 읽지 않아 어떤지 모르겠는데(지금은 읽었다. 이것도 대박이다.), <결혼의 변화> 같은 좋은 작품의 출간을 멈춘 건 소위 문화사업이란 출판업을 영위하는 법인으로서는 정말 바람직하지 않다. 솔 출판사는 조속히 쇄를 찍거나 아니면 다른 회사에 판권을 팔았으면 좋겠다. 유독 솔 출판사에 이런 책들이 많다.
  산도르 마라이는 1900년에 지금은 슬로바키아 영토인 카사에서 귀족 작위를 받은 유복한 시민 가문에서 출생했다. 마라이의 선조가 독일 작센에서 이주한 헝가리 인이라 헝가리어와 독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했으며, 중동부 유럽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구사할 줄 알았던 프랑스어에도 능통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스스로 끔찍해 했던 뉴욕에서 십여 년, 캘리포니아에서 몇 년 살면서 의사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만큼 영어도 능숙했다고. <결혼의 변화>를 비추어 본 산도르 마라이는 양차 대전 이전 유럽의 귀족 부르주아 문화를 평생 그리워하며 살지 않았나 싶다. 실제로 그는 나치를 혐오했으며 소비에트 체제에 반대하여 헝가리 안에서 적응하기에 곤란함을 겪었다고 한다. 미국으로 거처를 옮기고서도 1956년 헝가리에서 있었던 반공산주의 시민운동을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가 지원해주지 않은 것에 매우 실망한 마라이는 헝가리에서 소비에트 군사력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나 자신의 작품 출간하게 할 것이라 주장했지만, 결국 1989년 여든아홉 번째 생일을 두 달 앞두고, 사람이 너무 오래 사는 건 분별없는 짓이라는 말을 남기고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당시 마라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60년이 넘게 함께 산 아내도, 양아들도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모두 3부로 되어 있는 <결혼의 변화>는 일롱카와 페터는 친구에게, 그리고 유디트는 젊은 애인에게 한 장소에서 자신의 지난날을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일롱카와 유디트는 페터의 첫 번째, 두 번째 아내이다. 1부에 해당하는 일롱카의 페터에 대한 열정적 사랑만을 이야기해보자.
  일롱카와 친구는 제과점 한쪽 구석에 앉아 삼 년 전에 이혼한 페터가 진열장에 든 설탕에 절인 오렌지 껍질을 사고 갈색 악어가죽 지갑을 열어 돈을 꺼내는 걸 발견한다. 악어가죽 지갑. 그건 십여 년 전에 일롱카가 페터의 마흔 번째 생일에 선물한 것. 일롱카는 이혼 후에도 서로 정중하고 세심하며 관습과 풍습의 요구에 충실하여 좋은 친구 사이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결혼은 결혼이고 이혼은 이혼이니까. 그리하여 일롱카는 이혼 당시 남편으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재산을 받아냈다. 거의 치지 않는 그랜드 피아노까지 실어왔으니.
  일롱카의 친정집은 한 달 수입이 8백이었던 데 비하여 남편은 한 달에 6천5백을 벌었으며, 친정은 임대주택에 살았고 시댁은 빌라를 통째로 빌려 살았다. 친정은 제라늄이 놓은 발코니로 충분했던 반면 시댁은 늙은 호두나무가 심어진 작은 정원과 아담한 꽃밭 두 개가 있었다. 일롱카는 어떤 식으로든 삶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교육을 받았고 남편은 무엇보다 절도 있고, 교양 있고, 우아하게 살아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교육을 받아, 이혼 당시에 일롱카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었고, 하루의 지체도 없이 매달 첫날에 일정한 금액의 생활비를 일롱카의 당좌계좌에 입금하고 있다. 남편은 공장을 운영하며 자주 여행을 떠난다. 예술가들에게 일을 맡기고 남들보다 특별하게 후한 보수를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 번 입 밖을 나온 말은 결코 잊지 않았으며 언젠가는 말한 바를 그대로 행한다. 페터가 아내 외의 다른 여성과의 관계를 발전시킬 수 없는 양식과 도덕과 절제를 지니고 있음을 일롱카는 누구보다 확신하지만, 남편은 내 사람이 아니라 철저하게 비밀을 간직한 낯선 사람이라는 것도 분명하게 알고 있다.
  결혼 3년 반 만에 아들을 낳았으나 두 돌 삼 주 만에 성홍열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2년여를 더 살다가 이혼에 이른다. 결혼 3년 만에 남편과 함께 살 수 없음을 깨달았는데 이때 아이가 생겨 유지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남편이 부유한 귀족인 것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페터와 결혼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그가 슬픔과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는데 아무도 도와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많은 고통을 겪었다. 페터는 결혼을 하고도 마흔 살의 나이에 사막, 결혼과 가정이란 사막에서 은둔자만큼 고독했음을.
  어느 날, 일롱카는 페터가 실수로 두고 출근한 갈색 악어가죽 지갑을 관찰하게 된다. 고액권 지폐, 어음과 수표, 죽은 아이의 사진과 가위로 자른 3센티미터 가량의 보라색 끈. 이게 데스데모나의 손수건이고 토스카의 부채일 줄이야. 보라색은 왕비의 색. 잠깐 반짝이는 한순간의 광채로 사용해야지 조금이라도 과하게 쓰면 전부가 유치해져 버리는 마법의 빛깔인 것을 아는 일롱카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 색. 그러니 페터가 어느 여인에게 정표로 끈의 끄트머리를 잘라 그것을 아들의 사진, 이미 죽어 찬 땅에 묻힌 아들의 사진과 함께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것. 그러니 복장이 뒤집히지 않겠는가. 물론 뒤에 가면 명예를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아는 페터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음을 독자는, 일롱카의 영원한 오해와 별개로 독자만 알게 되지만, 자기 앞에서 바락바락 기어오르는 아내에게 페터는 변명 한마디도 내놓지 않는다. 어쨌든 보라색 끈이 자기 지갑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니까.
  일롱카가 페터의 절친한 친구이자 작품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조연인 작가 라자르에게 힌트를 받아 보라색 끈의 주인을 밝혀낸다. 너무도 가난해 겨울을 나기 위해 고향 트란스다뉴비아에서 땅을 파고 토굴 속에 살다가 하필이면 특별한 한파가 몰아쳐 수천 마리의 들쥐들이 토굴로 몰려들어 쥐들과 겨울을 나야 했던 시절을 겪은 시댁의 하녀 유디트. 일롱카가 알던 하녀들과 달리 솔직하고 당당한 유디트의 목엔 보라색 끈으로 메달이 달려 있었다. 그것을 낚아채 열어보니 남편의 16년 전과 1년 전 사진이 들어있었다. 남편이 자기 집 하녀하고 관계가 있다는 충격. 라자르가 그녀에게 말했듯 현실이 얼마나 단순하고 진부하면서도 불안에 떨게 하는지 일롱카는 격렬한 상실에 빠져들고 만다. 그러나 유디트는 곧바로 영국으로 가버리면서 이들의 결혼생활이 이어질 수 있게 만든다. 일롱카에게 사과를 하고.
  남편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은 정열적인 아내의 사랑과 언제나 품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남편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의사소통의 부재. 다른 독자는 어떻게 읽었는지 모르지만 이 부부의 종말은 의사 불통에 있었다고 믿는다. 물론 마지막 순간까지 파탄을 막아보려는 노력을 계속했으나, 이미 서로가 서로에게 입힌 상처로 돌이킬 수 없었던 이들은, 유디트가 영국에서 귀국하자마자 서로 합의하여 즉각 이혼하고 페터는 바로 다음 날 유디트와 재혼해버린다.


  이 작품의 백미는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다. 어쩌면 그렇게 세심한 문장들로 마음에 저린 이야기들을 만들고 있는지 놀랍다. 1949년 나폴리 포실리포에서 초고를 쓰고 1978년에 나폴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살레르노에서 완성을 한 작품. 두 장소가 그리 멀지 않지만 시간의 흐름은 무려 29년. 산도르 마라이는 이 책에서 제목처럼 결혼이 어떻게 변하는지 만을 관찰하고 있지 않다. 이 속에 먼 시절의 정의와 신뢰 등 귀족 출신의 시민계급이 지녀야 할 미덕을 향한 향수를 농밀하게 그리기도 했고, 사회 구조의 변화에 따른 문화란 무엇인가 하는 예술론에도 집중하고 있다. 즉 자신의 기본이 됐던 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이 소비에트가 무력을 앞세워 진입을 한 새 시절의 격류 속에 느껴야 하는 소외와 우울 등. 그리하여 아름답지만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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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1-03-18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산도르 마라이가 이 작품을 나폴리에서 썼다고 말씀하시니 갑자기 불끈 주먹을 쥐고 읽어야지 하게 되네요. 저는 산도르 마라이 작품 별로 읽지 못했지만 읽는 동안 정신 못차리고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던 그 느낌만 갖고 있어요. 올해 저도 산도르 마라이에게로.

Falstaff 2021-03-18 09:53   좋아요 2 | URL
읽어보니 제일 재밌는 게 <열정>이고요, 대표작은 <결혼의 변화> 같더라고요.
내일도 마라이 다른 책의 독후감 올릴 겁니다. ㅎㅎㅎ (에이, 본문에 써 놨네요, <이혼전야>라고 ㅋㅋㅋ)

수이 2021-03-18 09:55   좋아요 3 | URL
이혼전야_라니 두근두근, 제목만으로도 두근두근거렸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저 이혼할뻔 하다가 아 그때 그 스트레스 갑자기 막 몰려오네요 폴스타프님 ㅋㅋㅋㅋㅋㅋㅋㅋ 일단 책장 어디에 산도르 마라이가 있지 하고 찾아보고 오겠습니다.

Falstaff 2021-03-18 10:03   좋아요 3 | URL
살다가 대판 걷어차고 사네 안 사네 한 번 안해본 인간들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대개의 사람들이 배우자 스트레스 때문에 한 10년 빨리 죽는 거 같습니다. ㅋㅋㅋㅋ

수이 2021-03-18 10:07   좋아요 1 | URL
저는 너무 마음이 평안해서 ㅋㅋㅋㅋㅋㅋㅋㅋ 같이 사는 남자가 그러던데요. 자기는 120세까지 살 거 같아. 왜 그렇게 보여? 하니 무념무상_이라고 이야기하길래 내가 너땜시 속이 썩어 문드러진 상태로 무념무상을 노상 외치구 다니는 것이다 하지만 네 말대로 120세 찍을 거 같다 고 답해줬습니다

coolcat329 2021-03-18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셋 중 아무거나 먼저 읽어도 상관없는거죠?

Falstaff 2021-03-18 11:02   좋아요 2 | URL
걍 두 작품만 읽으셔도.... <열정>하고 <결혼의 변화>,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청아 2021-03-18 12: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팔스타프님 조심스럽게 알베르토 모라비아<경멸>추천드려요.어쩐지 이미 읽으셨을지도 모르겠지만요. 👉👈레삭매냐님 리뷰보고 어제부터 읽고있는데 좋아하실듯해요ㅋㅋ네오리얼리즘의 거장이랍니다.

Falstaff 2021-03-18 12:44   좋아요 3 | URL
음하하하... 이런 추천, 조심 안 하셔도 됩니다!
냉큼 주워와야지요. 6월~7월 정도에 읽을 수 있겠네요.
ㅋㅋㅋㅋ 전 책 읽는 것도 예약제예요. ㅋㅋㅋㅋ

청아 2021-03-18 12:48   좋아요 3 | URL
오 예약제 멋짐요! 고개가 끄덕여집니다👍이 책 한잔 하시면서 서서읽으신다에 500원 걸겠습니다.ㅋㅋㅋ

Falstaff 2021-03-18 13:17   좋아요 3 | URL
예약제 하면 생기는 최대의 미덕이, 사놓고 읽지 않는 책이 없다는 겁니다.
일정 기간에 산 책들을 초간이 빠른 순서대로 읽거든요. 읽는 도중에 산 책은 지금 읽고 있는 책 무더기가 다 끝나야 새롭게, 같은 순서대로 읽으니까, 말 그대로 한 권도 빼지 않고 싹 해치울 수 있습니다. ㅋㅋㅋㅋ

청아 2021-03-18 13:24   좋아요 1 | URL
음..예약제 관련해서 언제 시간되시는대로(간략하게라도요) 페이퍼 한 번 써주심 어떨까요.
놀랍고 솔깃합니다! ‘쌓인 책 읽기‘에 저포함 다른 분들에게도 영감을 줄것 같습니다.🤓👍

페넬로페 2021-03-18 15:24   좋아요 1 | URL
경멸도 예약요~~

청아 2021-03-18 16:21   좋아요 1 | URL
페넬로페님~재밌을 뿐만 아니라 소중해지려고해요.(읽는 중이니 ‘하다‘가 아님요ㅋㅋ)
이것도 커플 이야기예요.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그냥 사려구요! ㅋㅋ

페넬로페 2021-03-18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결혼의 변화인데 이 책의 내용이 결혼에 대한건가요? 아님 어떤 비유적인 의미?

Falstaff 2021-03-18 15:19   좋아요 2 | URL
진짜로 결혼생활을 하는 부부들이 출연합니다.
페터가 마음 속에 유디트를 담아두었음에도 일롱카와 결혼을 해서, 아주아주 충실하게 결혼생활을 이어가지만 마음 속 유디트의 존재를 알게 된 일롱카와 불화를 해 이혼을 하는 과정이 일롱카의 입장에서 고스란히 들어 있고요,
유디트와 재혼한 다음에 유디트와의 만남, 결혼, 1년 후 이혼까지 페터의 입장에 쓴 것이 2부,
이런 모든 것을 저 시골 빈민 출신의 유디트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젊은 애인에게 호텔방에서 밤새 이야기해주는 것이 마지막 3부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결혼에 관한 것입지요. 이 속에 2차대전이 끝나고 소련군이 밀려드는 폐허 헝가리,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마라이의 쓸쓸함, 지나간 신사들의 범절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좌악 깔리고요.
이런 거 다 제쳐두고, 아 글쎄, 재미있다니까요! ㅋㅋㅋㅋ

페넬로페 2021-03-18 15:23   좋아요 2 | URL
넵!
예약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