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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증거
비그디스 요르트 지음, 유소영 옮김 / 구픽 / 2021년 8월
평점 :
작가 비그디스 요르트는 1959년 7월생으로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자랐다. 학교에서 철학, 문학, 정치학을 공부하고 1983년 아동 도서로 데뷔, 이후 성인을 위한 문학으로 자리를 옮겨 약 20편의 장편소설을 출간했다. 이 가운데 <노르웨이의 집>, <의지와 증거>, <경적이여 영원하라> 세 편이 미국에서 영어로 번역되었는데, <의지와 증거>가 2019년, 미국에서 영어로 번역하여 출간한 비 영어권 도서에게 주는 내셔널 북 어워드의 예심에 올랐고, 노르웨이에서는 문학협회상, 비평가상, 서적상협회 문학상 등을 받아 이이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의지와 증거>가 내셔널 북 어워드의 본심이 아니고 예심에 올랐을 뿐임에도 작품이 품고 있는 주제가 워낙 강력하다 보니, 영국의 가디언 지가 런던에서 비그디스 요르트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인터뷰어가 폴란드 작가 체슬라우 밀로즈의 말, “가족에 소설가가 태어나면, 그 가족은 거덜이 난 거다.”를 인용하면서, 기자들 특유의 작가와 주인공을 동일시하려는 의도를 내비치자, 요르트는 “작가가 가정생활을 근사하게 쓰면 가족들은 ‘맞다, 그게 우리 가족 이야기다.’라고 하는 반면에 그러지 않으면 자기네 이야기가 아니라고 부인한다.”면서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자신이 이미 충분하게 말썽을 부렸고, 작품과는 관계가 없다면서.
이 책을 이미 읽은 독자들은 요르트와 기자가 왜 이런 대화를 나누었는지 금방 알아차리겠지만 읽기 전인 분을 위해 서둘러 작품의 스토리를 알아보자.
오슬로의 스카우스 바이 22번가에 뵤나르와 잉가 부부가 살았다. 부부는 둘 다 상당히 잘 생긴 외모와 몸을 가지고 있어서 눈길을 많이 끌었고, 슬하에 차례로 아들 보드, 한 살 아래 딸 베르기요트, 갓난 딸 아스트리드를 두었으며 앞으로 딸 오사가 또 태어날 예정이었다. 최초의 문제는 부모에게, 특히 아버지에게 있다. 소위 말하는 괴물이었던 것. 맏아들 보드에겐 훈육이 목적이었겠지만 가차없는 폭력을 연이어 쏟아부었고, 큰딸이자 이 작품의 화자 ‘나’로 등장하는 베르기요트한테는 다섯 살부터 일곱 살까지 성폭행을 가한다. 딸이 일곱 살이 되어 아버지가 요구하는 짓과 자신한테 저지르는 일에 관해 어렴풋이 알게 되고 동시에 자신의 일을 타인에게 이야기할 수도 있게 되자 각성을 했는지 더 이상 베르기요트에게 접근을 하지는 않았다. 베르기요트에게 가장 치명적인 첫번째 상처는 아버지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저질러진 성폭행이었다.
이후에 어머니 잉가는 유독 베르기요트에게 신경을 쓰며, 자기 눈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히스테리를 보이기도 하는 등,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든 베르기요트가 회상하기에 마치 딸을 시샘, 질투를 하지 않았나 싶었다. 베르기요트 역시 아버지의 성폭행이 중단된 이후에 아버지가 자신을 (죄책감 때문이든, 다른 사람이 자신의 범죄를 알아차릴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든)멀리하기 시작하자 어머니를 조금은 경쟁상대로 생각하기도 한다. 나중에 유년기 부친에 의한 성폭행이란 상처가 트라우마가 되어 정신 상담을 받을 동안 이이는 프로이트 전문가 수준이 되어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애초에 혼자 생활할 수 없는 엄마는 대학교수 롤프 산베르그와 대단한 혼외정사를 벌이면서 이혼을 시도할 때만, 이혼을 위하여 딸의 성폭행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러니까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딸은 이를 부인한다. 그게 정확하게 어떤 행위인지 알지 못했으니까.
엄마의 이혼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결혼생활이 이어지면서 이제 엄마는 가족을 추문으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오히려 아버지는 깊은 침묵과 딸을 지켜보는 시선 저편으로 물러나 가끔 악의적이고 모욕적인 말만 던지는데 그친다. 이후 가족은 두 적대적인 그룹으로 나뉜다. 아버지에 의한 폭력으로 상처를 입은 아들 보드와 베르기요트. 둘은 성인이 되어 가족으로부터 떨어져나와 될 수 있는 대로 부모와의 접촉을 안 하려 노력한다. 특히 딸 베르기요트는 23년 동안 아버지를 전혀 만나지 않았으며, 엄마 역시 아주 간혹, 몇 년에 한 번 꼴로 몇 분 가량 엄마의 요구로 만나, 엄마가 주는 적지 않은 돈을 받고는 했을 뿐이다. 다른 편은 폭행과 성폭력의 주인공 아버지와 가족의 범죄행위를 은폐하려, 좋게 말하면 화해와 용서라는 미명으로 포장된 망각으로 덮으려는 엄마와 두 여동생 아스트리드와 오사가 있다.
아버지를 포함해서 엄마와 여동생들은 만일 그럴 수만 있으면 베르기요트를 평생 정신병원에라도 집어넣고 싶은 심정일 거라는 것이 베르기요트의 심정/짐작이다. 이들은 한 번도 자신의 아픔을 이해하려 한 적이 없으며 자신(들)은 언제나 선한 마음을 가지고 과거의 불행과 화해시키기 위해 열심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너네들이 상처, 아픔을 알아? 이게 주인공이자 화자 베르기요트한테는 두번째 상처를 남긴다.
작품은 딱 부러지게 화해나 용서로 마감하지 않는다. 진정한 화해나 용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서. 여기까지가 <의지와 증거>를 검색하면 흔히 볼 수 있는 작품 소개다. 나도 스토리에 관해서는 더 진도를 나가지 않기로 한다.
베르기요트가 당한 성폭행이 더욱 슬픈 것은, 유년의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하더라도 그들은 부모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비록 그 사랑이라는 것이 오래도록 지속되지는 않지만 자연은 생존을 위해 유년의 아이들을 그렇게 디자인 해 놓았기 때문에, 맏아들 보드와 베르기요트는 폭행을 당하고 돌아서서 부모를 향해 사랑을 구걸했으리라.
주인공 베르기요트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도 힘든, 진짜 함부로 상상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평생을 살아야 한다. 천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미 자신에게 상처를 준 아버지는 다섯 달 전에 죽어버렸고, 그의 유언에 따라 재산이 분배되어 자신의 통장에 생각하지 않은 목돈이 입금된 날, 이 돈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여전히 사나운 말을 던지는 엄마와, 인권단체에서 일하는 전문가 동생 아스트리드는 어제하고 비슷하게 언니의 고통을 이해하지만 증거가 없어서 상처를 믿기 힘들다고 주장하면, ‘나’는 오랜 세월이 흘렀으며 당사자의 한 명이 죽었다는 이유로 40년이 넘게 겪은 마음의 상처로 인한 사고 체계의 오류 또는 비정상적 언행으로 점철되었을지도 모른 또다른 상처가 아물어질 수 있겠는가.
어려운 일이다.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한다, 사는 동안. 베르기요트는 쉰 살이 넘을 때까지 정말 지독하게 잘 버텼다. 그리하여 세 아이들과 손자녀들을 ‘건전하게’ 양육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겠지. 자신은 엄마와 자매들이 포기하지 않고 화해라는 명분으로 내미는 손톱에 여전히 할퀴어가면서도. 하지만 모든 사람이 베르기요트처럼 굳센 삶을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남은 상처, 아픔의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사고에서 빗겨 있어 삶에 적응하는 데 많은 애로를 가지고 산다. 그러니 애초에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한다.
나도 독후감을 쓰는 지금, 가슴이 다 울렁거린다. 큰 아이를 키울 때 나는 언제나 초보였다. 그리하여 지난 세월을 거슬러보면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일이 몇가지 있다. 이럴 때 마다 지금처럼 정말로 가슴 부위가 쓰리고 맥동이 빨라지는 걸 느낀다.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래도 맏이를 보면 참 마음이 아리다. 이걸 옛 어른들은 “첫정”이라고 했는지 모른다. 생각난 김에 맏이한테 전화나 한 통 해야겠다. 내일 대게 사서 며느리, 하을이하고 와서 하루 자고 가겠단다. 이크. 오늘은 하루종일 청소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