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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이상우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평점 :
이상우. 1988년 인천에서 아빠는 모르겠고 동네 도서관 사서 일을 하는 엄마의 외동아들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하고, 2011년 <중추완월>로 문학동네 신인상 단편소설 당선으로 등단해, 2015년 소설집 《프리즘》을 낸 소설가. 2015년 초에 83년생 정지돈, 85년생 오한기, 85년생 박솔뫼 등의 형, 누나와 함께 소설가 자격으로 소위 후장사실주의 멤버로 활약한다. 이게 인터넷으로 검색해 추리한 이상우다. 현재 사서 읽어볼 수 있는 이상우의 단행본으로는 《프리즘》하고, 단편집으로 워크룸프레스에서 낸 《warp》(2017)과 문학과지성사에서 찍은 《두 사람이 걸어가》(2020), 이렇게 세 권이 있다. 장편소설은 안 쓰냐고? 그렇다. 아직까지 안 썼다. 혹시 모른다. 쓰긴 썼는데 아직 발표하고 싶은 마음을 먹지 못했는지도. 나중에 쓰거나 출간할 수도 있지만 이이의 소설 방식으로 장편을 쓰면, 작가 입장은 모르겠고 《프리즘》을 읽어본 독자 입장에서 말하자면, 과연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아 오해하지 마시라. 이이의 작품을 폄훼하고자 하는 의도는 하나도 없다. 나는 《프리즘》을 즐겁게 읽었다. 작품 뒤에 실린 정지돈의 “우리가 미래다”라는 제목의 서평이자 극단의 잘난 척까지 다 재미있었다. (그리고, 비밀인데, 귀여웠다.) 정지돈은 자신의 서평을 혼자 책임지기 싫었을 지 모른다. 구태여 알라딘 인문 MD 출신이자 이현우와 더불어 대표적인 서평 전문가로 활약중인 금정연과 함께 이상우에 대해 논의한 것임을 강조했으니. 아하, 지금 다시 검색해보니 21세기 들어 새롭게 생긴 직업인 서평가 금정연도 후장사실주의 멤버다. 그러니 서평의 제목을 “우리가 미래다.”라고 호기롭게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몰라서 묻는데, 서평가≠평론가 맞지? 근데 무슨 차이야? 가방끈? 등단 여부, 즉 면허증?)
그런데 《프리즘》을 읽어보면, 이게 비록 앞에다가 “후장” 즉 항문이라는 뜻의 비속어를 달긴 했지만 당연히 사실주의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다. 로베르토 알라냐가 쓴 <야만스러운 탐정들>에서 내장사실주의자들이 추구해온 예술행위, 전위와 초현실주의에 딱 들어맞는 작품들이다. 그리하여 소설 속에는, 억지로 얘기하자면 데뷔작인 <중추완월>을 빼고, 모든 작품에 서사는 완전히 증발해버리고 오직 단어의 배열과, 단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이미지를 나열하고 있다. 그리고 그게 다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읽었는지는 별개로 하고, 나는 이상우, 이 작가에게 크게 흥미를 갖게 됐다.
정지돈은 서평가 금정연과의 대화에서 앞 부분에 금정연의 말을 빌어 위상수학에 관해 이야기한다. 대표적인 비유클리드 수학의 한 분야로 지금은 모르겠으나 전엔 수학과 학부과정에는 전공 선택으로 한 학기 정도 수강할 수 있고 심화과정은 전부 대학원에 진학해야 본격적 전공을 시작하는 고난도 수학이(었)다. 정지돈과 금정연 두 명 다 국문과 졸업생으로 그들이 참고해 인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작가 이상우와 같이 극히 초보적인 입문서에서 소개한 개념 정도다. 그런데 위상수학이라기보다 ‘위상수학적’ 사고 행위에 국한한다면 정과 금은 놀랄 정도로 적절하게 변용했다. 솔직히 말해 문학이라는 것, 이 가운데서도 특히 전위나 초현실주의 행위는 꿈보다 해몽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거 아닌가.
이상우가 《프리즘》을 통해 독자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했을까? 모르겠다.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를 꼭 알아야 할 필요도 없는 거 같다. 그는 하여간 어떤 이야기를 했고, 그건 마치 오선지에 음표를 그리는 행위가 같아서 청자가 음표의 해석을 어떻게 듣고 받아들일지 작곡가는 책임이 없는 것처럼 이상우 역시 자신의 작품을 독자들이 어떻게 이해를 하는지 관심을 쏟을 필요가 없어 보인다.
음악 이야기가 나와서, 독자가 《프리즘》의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언어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음악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어쨌든 음악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프리즘》 후반 두 편 정도와 문학동네 신인상 수상이란 목표를 (조금은)염두에 두고 쓴 데뷔작 <중추완월>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을 읽을 때, 분명하게 문장 속의 운율韻律을 체감할 수 있다. 이런 음률감 또는 단어들 간의 리듬은 이상우가 던지는 특유의 오리무중 적 서정을 조금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향으로 이바지한다. 특별히 인용하기 위해 따온 것이 아니라 독후감을 쓰다가 그냥 아무 페이지나 열고 가져온 부분을 소개해본다.
“나는 홀로 비를 추적했다. 좇으면 좇을수록 무수해지는 무력감의 중독자처럼, 연약한 척 휘날리고 있는 이 심연의 투명한 암살자들만이, 내가 이 세계에서 말을 섞을 수 있는 유일한 동행자인 것마냥. 놀랍게도 짝꿍은 나를 눈치채고 있었다. 내가 나 몰래 나를 소외시키려 드는 비의 꼬리를 붙잡기 위해 애쓰듯, 짝꿍의 눈길 또한 집요하게 나의 모서리에 닿아지고 있었고, 결국 나의 귀퉁이와 이어져버린 그 길 위로, 낡은 나룻배 한 척이 빗물을 양 갈래로 갈라놓으며 짝꿍을 나의 세계로 마중해오고야 말았는데, 짝꿍은 불타오르지 않는 어선 위에 서서,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똑같지는 않지만 조선시대의 가장 위대한 연애문학(이 말을 진짜로 믿을까 걱정입네다만) 정철의 <사미인곡> 같은 가사歌辭처럼 문장을 읽으면 머리 속에서 저절로 비트를 타는 음조를 느낄 수 있지 않나? 뒤의 어떤 작품 속에는 마치 이상의 <오감도>를 읽는 듯한 교차 진술을 무차별로 난사하기도 한다. 스토리? 없다 개가 물어갔다. 완벽하게 배제된 이야기들. 여기서도 당연히 조금은 데뷔 목적으로 썼을 <중추완월>은 제외한다.
책은 데뷔작부터 시작해 발표 순서로 실렸다. 2011년부터 2015년까지. 2013년엔 한 편도 발표하지 않은 모양이다. 뭐 그럴 수 있지. 그런데, 2014년 『21세기문학』 겨울호에 실린 <벨보이의 햄버거에 손대지 마라>와 『문학과 사회』 2015년 여름호에 실린 표제작 <프리즘>에서는 갑자기 문장의 운율이 사라졌거나, 연달아 비슷한 작품을 읽느라 피곤해진 내가 문장의 운율을 발견하지 못했다. 단편소설을 묶은 단편집이 장편소설보다 유리한 것 가운데 하나는 같은 분량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펼칠 수 있어서 독자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이상우의 경우에, 자신의 작품세계, 또는 아직까지 ‘작품세계’라고 하기엔 뭐하다면, 하여튼 주요 관심사를 표현하는 양식이 상당히 흡사해(위상학적으로 도형이나 면체와 구체를 해석하는 방법과 유사하게 말이지), 문장의 음률이 갑자기 사라져버리니까(작품활동이 없었던 2013년에 분명히 뭔가가 있긴 있었던 거야), 작품 자체를 읽기가 쉽지 않았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읽기 힘든 방향으로 전환했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독자는 이것에 관해서 더는 이야기하지 말자. 어떻게 쓰느냐는 전적으로 작가 마음이다.
하여간 재미있고, 특히 흥미있게 읽었다. 윤해서의 발칙한 단편집 《코러스 크로노스》 이후 오랜만에 (내용과 관련없이)유쾌한 기분으로 맹랑한 책 한 권을 읽은 기분이다. 그러나 지금은 과찬하지 않겠다. 그의 작품집을 한 권 더 읽어본 다음에 이상우의 팬이 됐느니 어쨌느니 해도 늦지는 않을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