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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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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에르난 디아즈는 1973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두 살 때 군사쿠데타를 피해 스웨덴으로 건너가 열 살까지 살고 다시 귀국해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을 졸업한다. 이후 영국 킹스 칼리지를 졸업하고, 다시 뉴욕으로 점프, 뉴욕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 브루클린에 터를 잡아 결혼도 하고 딸도 낳아 키우며 살고 있다. 지금은 컬럼비아 대학의 히스패닉 연구소 부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는데 2023년에 편집한 위키피디아의 기록이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가자. 이이는 두 권의 소설을 출간했다. 2017년에 발표한 <먼 곳에서>. 데뷔작이 나오자마자 퓰리처상과 펜/포크너상의 최종후보까지 올랐다가 미역국 먹었다. 그럼에도 질스 화이팅Whiting 여사 재단에서 주는 화이팅 상을 수상해 5만 달러의 상금을 받았으니, 으메, 그게 얼마여? 이후 두번째 작품이 2022년에 출간한 <트러스트>이다. 이게 대박. 드디어 미국인의 꿈인 퓰리처 상을 받고, 부커상 최종심에 올라가고,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가 뽑은 2022년 10대 소설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금수강산 옥토낙원의 개 잡아먹는 이야기, 한강이 쓴 <채식주의자>와 더불어 21세기에 발간한 모든 문학 작품 가운데 백 권에도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세상에나. 이렇게 읽기 지겨운 소설이 말이지!
지금 감히 퓰리처상 수상에 빛나는 작품을 “읽기 지겨운 소설”이라고 했느냐고? 그랬다, 어쩔래? 퓰리처상이 아니라 부커상, 노벨상, 책상, 걸상, 밥상, 개근상을 가져와봐라, 눈썹 하나 까딱하는지. 겨우 470쪽밖에 되지 않는 책 한 권 읽는데 3일 걸렸다. 보통 이 정도면 길어야 이틀이면 충분하건만, 이거 진심으로 하는 얘긴데, 소설책이 재미가 없으니까 속도도 나가지 않더라고. 그 정도로 재미없었다. 읽다가 그만 읽을까, 이렇게 많이 망설인 책도 별로 없을 듯. 그러니 당신이 이 책을 정말로 읽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데, 단단히 마음 매조져야 할 것. 뭐,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다. 독자 리뷰 읽어보면 별 다섯 개 만점으로 다섯 개 다 채운 사람들도 많다. 그러니 내 눈알이 삐어서 재미없게 읽었다고 보시면 틀리지 않을 듯하다. 읽든 말든 마음대로 하시라.
책은 모두 네 개의 장part으로 되어있다.
1부 “채권”은 소설가 해럴드 배너가 쓴 소설. 부자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 벤저민 래스크의 한평생을 조망했다. 그러니까 소설 속의 소설인 셈. 이걸 한 번 따라가 보자.
벤저민 래스크의 부계 조상으로 말할 것 같으면, 1662년에 코펜하겐을 떠나 클래스고로 이주했다. 벤저민의 고조 할아버지 대에 와서 식민지에서 생산한 담배 거래를 백 년 이상 점점 크게, 점점 크게 벌이다가 벤저민의 아버지인 솔로몬 벤저민 씨는 담배회사의 지분을 몽땅 사들인 후, 머지않아 미국 동부 연안에서 가장 중요한 담배 무역상으로 등극하기에 이른다. 솔로몬 래스크 씨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품질의 시가와 시가릴로(얇은 시가), 파이프 담배를 공급했고, 이런 성공은 씨의 탁월한 대화술과 정치적 연줄을 제공하는 능력이 밑받침이 된 것이 물론이다. 성공의 정점에서 씨는 뉴욕 웨스트 17번가에 타운하우스를 건설해 그곳에서 벤저민을 낳는다. 최고의 부호로 이름을 높인 솔로몬 래스크 씨는 쿠바에 작은 별장을 짓고 그곳에서 월동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고, 아내 윌헬미나는 허드슨강 동안에 여름 별장, 뉴포트에는 오두막을 지어 그곳에서 아들과 오래 묵었다. 그러니까 부부/가족은 여름과 겨울, 일년의 반 동안은 서로 코빼기 구경도 하기 힘들었다는 말이다.
태도와 지능, 순종적인 성품이 잘 조화된 아이들을 일컫는 단어인 “모범적”인 어린이 밴저민은 단 한 가지, 다른 아이와 어울리기 꺼리는 것만 빼면 어디 한 구석 나무랄 데가 없었다.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들어간 기숙학교에서 벤저민은 여전히 무감각한 태도로 전과목에서 두각을 나타낸 영재였다. 기숙학교 졸업반일 때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한 방에 훅 갔고, 다음 해 졸업 직전인 5월엔 어머니마저 폐기종으로 숟가락 놨다. 그럼에도 벤저민은 대학에 입학했다. 사람들은 래스크가 특유의 혈통이 벤저민 대에서 끊어진 것으로 봤다. 뉴욕으로 돌아간 벤저민은 거의 대부분 성공을 거둔 분야에서 실패하고 있었다. 그는 선대와 다르게 서툰 스포츠맨이었고, 무감각한 사교가였으며, 열정 없는 술꾼에 냉담한 도박사이자 뜨뜻미지근한 연인이었다. 억눌러야만 하는 욕구도 없는 데다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 담배회사의 총수였다. 벤저민한테는 담배사업만큼 재미없는 일이 없어서, 회사 경영을 임원진에 맡겨버린 것도 모자라, 쿠바에 있는 초호화 아버지 별장도 별장 안의 온갖 귀중품과 더불어 현지의 반half 사기꾼 대리인을 통해 홀랑 팔아버렸다.
그러다가 1907년의 불황이 다가왔다. 성격이 이랬으니 벤저민 래스크는 홀랑 거지가 됐을 거 같지? 천만의 말씀. 장기 유럽 여행 스케쥴을 짜던 벤저민이 갑자기 무슨 냄새를 맡았다. 아버지 별장 판 돈을 비롯해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동산current asset을 주식에 투자했었는데, 그걸 한 방에 몽땅 팔아 금채권을 산 거다. 유럽? 거긴 안 가도 돼! 금본위 화폐 시대에 금채권을 확보했으니 이제 기다리는 건 하늘에서 쏟아질 돈벼락뿐이었다. 수많은 은행이 지급불능사태를 맞아 문을 닫건 말건 불황은 벤저민에게 황금알을 쑥쑥 낳아주었고, 그동안 신경쓰지 않은 물려받은 재산도 상당한 규모로 증폭되어 있었다. 자신의 자산을 관리해주고 있던 J.S. 윈슬로 회사의 총수인 윈슬로 2세가 벤저민의 공격적인 투자에 회의를 품자 그동안 불편하지만 긴밀하게 협력해왔던 투자회사를 단박에 해고해버리고 직접 투자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벤저민이 보기에 금융계와 투기는 죽을 수 있지만 균 하나 없는 깨끗한 생물이었다. 생각하고, 말하고, 서명하면 끝나는 일. 쓸데없이 다른 사람들과 긴밀한 관계를 만들 필요가 조금도 없는 유일한 무균질 작업. 완전히 자기 성격에 맞는 일이었다. 1907년에 니커보커 신탁회사의 대표 찰스 바니가 자살하자마자 전세계 증시에 공포의 물결이 출렁이기 시작했고, 벤저민은 민첩하게 탄력성을 확보한 기업의 저평가된 자산을 인수해버리기 시작했다. 돈 놓고 돈 먹기의 귀재 J.P. 모건이 벤저민을 지켜보다가 넋을 잃고 그를 저녁식사에 초대했지만, 벤저민은 싹 잘라 거절했을 정도. 이렇게 일이 커지니 아무리 벤저민이라도 직원을 고용할 수밖에. 심부름꾼부터 시작해 타이피스트, 그러다가 이제 제대로 공부한 회계사가 필요했고, 점점 커져 다양한 종류의 인력을 모았다. 초기에 모인 인재 가운데 벤저민이 혐오하는 금융계의 모습을 다양하게 지니고 있던 셸던이란 작자도 있었는데, 그는 어느새 벤저민의 사업을 위한 완전한 대변인으로 변해 있었다. 1914년 취리히 은행가로 출장을 떠난 셸던은 세계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그곳에서 발이 묶였다. 이때 그곳에서 명성은 있지만 재산은 없는 올버니의 오랜 명문가 브레보트 댁의 외동따님 헬렌을 알게 된다. 이 헬렌이 몇 년 흘러 10대 후반이 되자 벤저민 래스크와 혼인을 해 헬렌 래스크가 된다.
브레보트 씨는 심령술, 연금술, 최면술, 강령술 등 다양한 신비주의에 함몰된 인물로 평소에 딸과 긴밀한 유대를 지니기도 했다. 당연히 상당한 정도로 영향을 미쳤겠지. 그래서 그런지 헬렌은 결혼을 하고 1930년대 대공황을 만나, 벤저민이 1907년 당시의 불황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미친 수준의 천재성을 발휘해 지상 최고의 부자가 된 후, 미국의 문화, 특히 음악과 학교, 전시회 등을 위한 활수한 기부를 이어가다가 아빠 브레보트 씨와 비슷한 정신 질환을 앓는다. 헬렌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반드시 아버지가 입원했다가 행방불명이 된 바로 그 스위스의 병원에 입원하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그곳에서 다양한 치료를 받다가, 별로 효과가 없자, 벤저민이 투자한 독일 제약회사가 제안한 주치의의 처치를 받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독자들이 예상한 바와 같이, 죽는다.
아내의 죽음 이후로 총기가 빠진 벤저민은 이후 그저 그런 투자가 수준으로 급전직하,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삶 속에 머물기 시작한다.
이게 삼류 소설가 해럴드 배너가 쓴 작품 “채권”이다. 근데 당시에 이 책을 읽는 거의 모든 미국사람들은 벤저민과 헬렌 래스크가 실재하는 투자 귀재 앤드루와 밀드레드 베벨 부부의 이야기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책을, 평소엔 거의 책을 읽지 않는 앤드루 베벨도 읽었다. 절대 불같이 화를 내지 않는 베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천문학적인 재산의 힘으로 책을 낸 출판사를 통째로 사버린 후, 작가 배너에게 거액을 주고 평생 저작권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시중에 나도는 책의 전량 회수, 창고에 쌓인 회수품과 재고품 전량 소각. 평생 저작권 계약을 맺을 때 지불한 거액의 계약금은 막강한 변호사 집단에 의한 연속적 소송으로 거덜을 낸다. 소송을 해서 벤저민 측이 져도 상관없다. 배너가 방어하기 위해 변호사를 고용할 것이고 그때마다 거액의 변호사 비용이 들 터이니.
작가는 그렇게 처리하면 끝이다. 그러면 이왕 퍼져 있는 소설은 어떻게 할까? 앤드루 베벨은 직접 자서전을 쓰기로 한다. 그게 2부. 3부로 들어가면, 자서전을 쓰기 위한 도우미, 한 번도 정식 문학 수업을 받아본 적 없는 글 좀 쓰는 여성 타이피스트 아이다 파르텐자를 고용한다.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 노년에 접어든 아이다 파르텐자가 뉴욕 웨스트 17번가의 베벨 박물관에 들어 자료를 다시 찾아보며 당시를 회상하는 장면이다.
마지막 4부는? 투자의 귀재 앤드루 베벨의 아내 밀드레드가 쓴 일기. 이게 “일기”이니 유일하게 사실과 근접한 기록일 터.
정말 재미없게, 지루하게 읽은 책이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별점을 주면 다섯 개 만점에 넷 정도를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왜? 앤드루 베벨은 자신이 가진 무소불위의 능력, 돈의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고, 진짜로 그렇게 행동을 한 인물이다. 삼류작가 해럴드 배너의 책을 읽고 인생을 무참하게 끝내버렸을 수 있고, 남들이 보이게 베벨이 배너의 조종을 울렸다고 “오해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독자 마음이다.
혹시 말이지, 천하 제일의 부자 앤드루 베벨이 뭔가 아내 밀드레드한테 꿀리는 것이 있어서 삼류작가이기는 하지만, 삼류작가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해럴드 배너를 고용해 신경정신 질환으로 숨을 거두는 아내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던 건 아닌가? 재무적으로 거덜을 냈다고 하지만 천문학적인 현금을 가지고 있는 베벨이 그정도 보상을 해주는 건 일도 아니었을 터. 여기저기 내가 그 새끼 손 좀 봤어, 소문이 나게 만드는 건 말 그대로 껌 씹는 수준일 거고. 이미 책을 읽어볼 사람은 다 읽은 다음이니까. 애초에 자서전도 출간할 마음이 없었으면서 그냥 쓰는 흉내만 냈던 거고. 이미 죽은 아내에게 그리도 헌신적인 남편이란 소문만 나게 말이지. 그래서 3류 작가가 쓴 소설 속의 소설 <채권>이 그렇게 재미가 없었던 것일까? 내 생각이 맞다는 건 아니다. 그저 그랬으면 어떨까, 만일 그렇다는 전제로 별점을 주면 네 개 정도이다, 하는 수준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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