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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줄리언 반스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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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정사 장면을 처음 보았을 때, 그레이엄 헨드릭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스스로 껄걸 웃기까지 했다. 손을 뻗어 딸의 눈을 가려야 되겠다는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다.”
첫 문단이다. 으, 튄다. 그러니까 아빠와 딸이 보는 앞에서 엄마가 다른 남자와 정사를 벌였다는 얘기 아냐? 근데 그걸 보면서 딸의 시선과 관계없이 껄껄 웃었다는 거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무리 반스라고 해도 이거 쇼킹한 걸, 흠. 당연히 다음 문단에서 의문은 해소된다.
“물론 그 배후에는 바버라가 있었다. 그의 첫 번째 아내 바버라는, 스크린 상에서 정사를 즐기고 있는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앤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러니까 남편과 딸이 극장에 가서 지금의 아내 앤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있는데, 여기에 그레이엄도 모르고 있던 두 번째 아내 앤의 정사 씬이 나왔다는 거다. 알았다.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간다. 당연히 결혼 전이기는 하지만 앤이 한 시절 영화배우였고, 그래서 영락없는 B급 영화에 출연을 했으며, 스타였던 적은 없으니 단역이었는데,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장애인 형사와 약 2분에 걸친 말 그대로 베드 씬을 찍었던 거다. 근데 이상하다. 단역이 2분간? 영화에서 2분이 짧은 시간은 아니다. 2분 동안 앤은 놀라움, 노여움, 경멸, 의심, 뉘우침, 공포, 또다시 노여움을 번갈아 연기했고, 잠깐 벌거벗은 어깨를 보여주는 데 그쳤다. 2분이라?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그냥 넘어가자.
그레이엄과 결혼 전이고, 예술의 한 형태인 영화 속의 한 장면에 불과하니 그가 껄껄 웃을 수 있었다. 심지어 청소년 관람불가인 영화임에도 보호자 동반이란 명목으로 딸 앨리스와 함께 보면서. 근데 더 웃기는 건 전처 바버라가 전남편 그레이엄에게는 영화 속에 딸이 다니는 학교가 나온다고 해서 학교 친구 여럿이 함께 보기로 했다고 하고, 딸 앨리스한테는 아빠 그레이엄이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쓰레기 또는 형편없는 매춘부, 앤이라는 여자의 가장 자신하는 배역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면서 이 사달을 만든 거였다. 바버라는 앤이 예전에 영화배우를 했으며 어떤 영화에 출연했고, 그 영화에 무슨 장면이 있는데, 지금 런던의 빈민구역에 있는 재개봉관인 할레웨이 오데온 극장에서 상영하고 있는 줄 어떻게 알았을까? 정답: 바버라가 스파이를 많이 두고 있었다고, 나중에 자기 입으로 말한다.
1977년 4월 22일. 그레이엄은 바버라와 별 불만 없이 15년의 결혼생활을 보내고 있었으며, 10년 동안 같은 직장에 다니며 직종을 바꿀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런던대학 현대사 교수다. 여전히 바버라를 좋아하지만 적어도 최근 5년간 바버라와의 관계에 대해 긍지를 느끼지는 못했다. 딱 이날, 그의 새로운 사랑의 꿀맛이 스타트 라인을 출발했다. 랩턴 가든스에서 열린 잭 랩턴의 파티에서 호스트가, 낙하산을 타는 여성이라고 앤을 오랜 친구 그레이엄에게 소개했다. 그레이엄이 신경외과 의사이긴 한데 전문의는 아니고 지금 수련의 과정이라면서. 잭 랩턴의 직업은 대중 소설가. 특기는 지금처럼 이야기 만들어내기. 앤의 진짜 직업은 옷을 구매하는 바이어였다. 여섯 단위의 금액, 그러니까 백만 파운드 미만까지 권한이 있는 구매팀 대리였다. 당연히 이전 직업을 이야기해줄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이때 그레이엄의 나이가 서른여덟. 앤은 서른하나. 물론 처음 만나자마자 “사랑의 꿀맛”을 본 건 아니었다. 영국인으로는 믿기지 않게 그레이엄은 결혼 생활 15년 동안 단 한 번도 외도의 경험이 없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며칠 후 그는 자신을 속이고 2973-8013, 전화로 데이트를 신청했으며, 만났고, 저녁밥을 같이 먹었고, 그냥 각자 집에 갔다. 두 번째 만나서 또 밥을 먹고 헤어졌다. 앤은 자연스러웠고, 솔직했지만 어느새 그레이엄은 육체의 통신망을 수선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세 번째 만나서, 했다. 이제 비로소 그레이엄은 쾌락에 눈뜨고, 복잡한 접근법과 얼떨떨한 향락까지 알게 됐다. 다 그런 거다. 늦바람이 무섭다니까.
앤이 생각하기에 (1977년 기준으로) 여자가 서른 살이 넘으면 만날 수 있는 남자라고는 ①유부남, ②동성연애자. ③정신이상자뿐인데, 이 가운데 그래도 유부남이 최선이었다. 그렇게 6개월 동안 커플은 쉬지 않고 섹스를 하더니 이제 자신들의 관계를 바버라에게 알려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당연히 바버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말이 쉽지 어디 이런 말을 꺼내기가 만만하겠어? 그레이엄은 결심 세 번째에 자기한테 애인이 생겼음을 (건조하게) 말하고, 그래서 집을 나가야겠다고 선언했으며, 아내한테 (당연히) 독한 말을 들으면서 최소의 옷가지만 챙겨 그날로 처자식을 집에 두고 떠난다. 바버라는 즉시 이혼, 완전하고도 진부한 간통이혼을 요구해, 그레이엄이 주택 융자금을 계속 내고, 딸의 양육비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집기와 가구와 자동차까지 바버라의 소유로 남긴 채, 바버라가 평생 노동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게 해주는 조건으로 이혼서류에 인감도장을 찍는다. 그리고 곧바로 앤과 결혼식을 올린다.
서양 사람들, 너무 성급해. 뭐가 급해서 이혼하자마자 다시 결혼을 하나 그래. 더 시간을 두고 주민등록부터 시작해 바이오그래피와 건강진단서를 비롯한 제반 조건을 교환하고 토론한 이후에 해도 좋을 것을 말이지. 어차피 할 거 다 하고 살면서. 이렇게 대화가 부족한 상태에서 무턱대고 결혼을 했으니 앤은 자신의 전 직업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영화에 출연했는지,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겠지. 혼인신고서에 지장 찍은 후엔 굳이 얘기해 줄 필요가 없었을 터이고. 근데 그게 비극의 씨앗일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다. 이야기가 필요해요, 이야기가. 아니면 간혹 오셀로로 변신하는 수가 있거든.
오셀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오셀로한테는 원래 이아고의 아내 에밀리아 것이었던 손수건이 있고, 토스카에서는 스카르피아의 부채가 있듯이, 그레이엄한테는 바버라가 보게 만든 영화의 베드씬이 있었던 거였다. 처음에 그레이엄이 장면을 보면서 껄껄 웃었다고 했다. 맞다. 웃었다. 뭐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겠지. 누가 자기 마누라가 훌떡 벗고 영화에 나오는데, 그걸 알지도 못했다가 갑자기 보고나서 거 기분 좋다, 하겠나? 하여튼 그레이엄은 영화를 보고 와서 앤에게 영화 이야기를 했고, 하다가 보니, 베드 씬의 남자와 영화 말고 영화를 찍는 중이나 찍은 후에 정말로 섹스를 하긴 했느냐, 라고 물어봤는데,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앤이 워낙 솔직한 사람이라는 거였다. 저 위에서 앤의 미덕 가운데 하나가 솔직함이라고 했잖여, 그래서 처음엔 줄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전성기에 최고를 즐거운 시절을 보낸 추억의 이야기이기도 했겠지. 이왕 결혼을 했고, 다 지나간 것을 굳이 숨길 이유도 없다. 그런데, 그게 자기 생각이지.
아내의 과거에 집착하는 남자. 그것도 매우 심한 질투심을 느끼면서. 본인도 의아하게 생각한다. 아내의 과거를 질투하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일까?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집착하게 되는 난센스. 아내가 출연했던 모든 영화를, 몇 번씩 보고, 함께 출연해 베드 씬을 찍은 모든 남자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뒤지고, 도서관이나 영화 관련 기관에서 영화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을 복사하면서,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없는, 진짜로 없는 일도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된다.
스토리는 이쯤에서 그만. 이 책이 지금 절판 상태라서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지 아니면 벌써 그쳤을 텐데, 혹시라도 다른 출판사를 통해서 복간될 지 모르니 마지막 장면을 소개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겠다. 그 장면이 내가 좋아하는 쪽은 아니지만 하도 뒤통수를 때려 정신이 다 얼얼하다. 이걸 일러드릴 수는 없겠다.
이렇게 끝을 맺는 줄리언 반스는 또 처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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