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기억들
마리야 스테파노바 지음, 박은정 옮김 / 복복서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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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야 스테파노바는 따로 바이오그라피를 찾아볼 필요가 없을 듯하다. <기억의 기억들> 자체가 자기 가족 이야기다. 스테파노바는 1972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성인이 된 후, 1990년대 러시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자 부모는 독일로 이민을 떠났고, 스테파노바는 모스크바에 남았다. 여기까지 다 책 속에 나온다. 이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벌어지자, 스테파노바는 이에 항의하는 뜻에서 자신도 독일로 이사한다. 울리츠카야도 이때 떠났다. 두 작가가 다 유대인-러시아인이다.

  마리야 스테파노바의 본령은 시인이다. 소설은 아직까지 <기억의 기억들> 하나밖에 없다. 당연히 앞으로 소설도 쓰겠지. 그러나 시인이 쓴 소설임을 감안하시라. 2017년 출간한 작품이며 이 책이 2017~18년도 러시아 최고의 산문에 수여하는 빅-북 상을 받아 2백만 루블(당시 약 3천3백만 원)의 상금을 받았다고 해도 쉽게 읽히지 않는다. 작품은 좋지만 너무 사적인다. 스테파노바 개인의 가계를 그린 듯한데 이름은 전부 애칭, 약칭으로 표기했다. 화자는 당연히 ‘나’ 마샤. 마리야의 애칭/약칭이다. 가계를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사진.

  작품 초반부터 당신은 당황할 것이다. 나는 당황했다.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하여간 조심하는 편이 좋다. 보시라.

  “료냐 할아버지는 기술자여서 후방에서 복무했다. 붉은 별 훈장을 받은 또다른 할아버지 콜랴는 전쟁 중 극동에서 복무했다. 전선에서 전투에 참가한 할아버지는 없다.”

  생각하기를, 기술자 료냐 할아버지가 원래 할아버지고, 이 양반이 불귀의 객이 되어 과부가 된 할머니가 새로 시집을 가 콜랴라는 이름의 남편을 두었구나. 어때? 그럴 듯하지? 근데 이게 오산이었다.

  료냐 할아버지는 엄마 나타샤의 아빠인 외할아버지. 콜랴 할아버지는 아빠 미샤의 아빠인 친할아버지다. 우리나라 족보로 생각해보자. 엄마의 엄마인 외할머니는 룔랴. 여기까지, 외할머니 이름까지는 웬만하면 다 알지? 좋다. 그럼 외할머니의 엄마 이름을 아시는 분, 혹시라도 있으면 거수바람. 좋아, 좋아. 모르는 게 당연하지. 이건 아시나? 외할머니의 엄마를 칭하는 호칭은? 모른다. 검색해보면 외증조모라고 나오는데 웃기는 말씀. 그건 외할아버지의 엄마. 내가 바라는 건 외증조모의 안사돈을 어떻게 부르는지 아느냐는 거. 외할머니의 외가를 외진진外陳陳외가라고 한다면 외진진증조할머니가 정답일 듯. 이게 맞다면 마리야, 마샤의 외진진증조할머니가 사라. 20세기 초에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의학 공부를 한 의사로 그냥 프랑스에서 시집가지 않고 귀국해 혁명 소비에트에서 의사로 일한 신여성이었다. 사라의 부모는 아브람 긴즈부르크와 로쟈 긴즈부르키나. 20세기 초반에 러시아 땅에서 유대인에 대한 대량 학살이 있었던 건 다들 아시지? 당시에 ‘사라 아브라므예브나’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했으니 얼마나 팍팍했을꼬?

  외진진증조할머니 사라 아브라므예브나가 젊었을 때, 어렸을 때 찍은 사진이 있다. 파리 소르본 대학 의학 실습실에서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남학생 사이에서 흰 가운을 입고 찍은 여학생 시절도 있고, 더 어린 사라도 있다. 사라의 시아버지이자 니즈니노브고로드의 의사였던 다비드 프리드만이 찍은 1906년 사진도 있는데 이건 좋은 품종의 주황색 점박이 무늬 사냥개 세터였다. 여기서 조금 놀랐다는 말이지. 1906년에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4백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컬러 사진”을 찍었다고? 아마 채색사진일 듯하다. 당시에 컬러 사진술이 없던 건 아니지만 그게 시장에 나오려면 한참 더 기다려야 했을 터. 1905년에 (화자 미샤가 “또다른 고조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아브람 오시포비치는 열네 자녀를 두었는데 이 가운데 사라 증조할머니의 사진이 있었고, 사진 속에 어린 사라는 손이 얼어서 빨갛게 보였다고 한다. 유명한 1905년 12월 혁명 시절이었다. 이 사진도 컬러는 아니고 채색 사진이었을 것이다. 세월이 오래 흐르면서, 화자 미샤는 엄마 나타샤, 외할머니 룔랴를 비롯한 무수한 여인들과 함께 앨범을 꺼내 많고 많고 또 많은 사진을 보며 사진 속 할머니, 아주머니, 고모, 이모들에 관해 보고, 듣고, 경험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이게 훗날 미샤가 자신의 가계에 대한 책 <기억의 기억들>의 자료가 될 줄은 열 살이었을 때부터 자기 가족에 관한 소설을 쓰기로 작정했던 미샤 말고는 아무도 몰랐으리.


  근데 왜 이 책이 읽기 쉽지 않느냐고?

  작가는 사진을 보고 있다. 그것을 문장으로 설명한다. 시각을 문자로 옮기는 일. 이건 작가가 원했든 아니든 간에 한 번 더 큰 왜곡이 기다리고 있다. 문장을 독자가 뇌 속으로 옮겨 이를 형상화하는데, 이것이 얼마만큼 작가가 직접 보고 있는 사진과 일치할 것인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작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오히려 이 불일치를 의도했을 수도 있다. 의도했다는 건 아니지만. 책의 뒷부분으로 가면 작가는 사진의 현장에 가려 하거나 최소한 가장 가까운 곳까지 접근해 사진의 분위기를 확인 또는 공감하고 싶어한다. 누구 닮았지? W.G. 제발트. 스테파노바도 책 중에서 백 번은 넘게 제발트를 이야기한다. 제발트를 읽은 독자는 누구라도, 작가가 제발트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도, 제발트를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어법이 다르다. 제발트는 자신이 묘사하고 있는 인물이나 풍경을 독자와 공유한다. 그러면서 넓은 벌판을 독자와 함께 걷거나, 외진 도로를 따라 낡은 승용차를 운전하거나, 언덕에 올라 경치를 조망한다.

  스테파노바는 사진에 등장하는 자신의 가계 구성원을 기억하면서 유대인-러시아인이 20세기를 관통/극복하는 스토리를 부각하기도 하고, 그들이 살던 집, 묻힌 무덤을 답사하기도 한다. 작가는 책을 통해 단 한 장의 사진도 독자와 나누어 감정을 공유하기를 거부한다. 한 세기 내내 학살과 공포, 피해의식 속에 살았던 유대인 집단의 트라우마에 독자는 공감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그렇게 오해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근데 이게 맞을까? 제발트는 유대인이 아니다. 2차 세계대전 말기에 태어났다. 학교에서 보여준 홀로코스트 사진에 충격을 받아 전쟁과 박해는 그가 평생에 걸쳐 탐구해야 했던 과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사라진 사람들의 사진을 독자와 공유한 반면, 당사자의 가족일 수도 있으며 적어도 동족의 한 명인 스테파노바는 굳이 그런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걸까? 단정하지 말자. 그랬으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떤가.

  많고 많은 등장인물과 복잡한 가계도 속에서 미로를 헤매는 것과 비슷하게, 스테파노바의 익숙하지 않은 문장에 길들기도 쉽지 않다. 숱한 독자는 이런 문장을 좋아하여 ‘시적詩的 운율’과 비슷한 말로 이를 칭찬한다. 다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 산문은 산문이고 운문은 운문이다. 물론 운문 비슷한 산문이라는 것도 있으며 그걸 좋아하는 독자의 취향을 존중하긴 하지만, 나는 아니다.

  시적 문장이라고 해서 “시적”이 의미하는 것이 감정이 충만하게 밴, 이런 뜻이 아니다. 오히려 문장은 지극히 건조하다. 작가가 영향받은 것이 틀림없는 프루스트, 제발트 풍이다. 작가가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만델스탐 같은 러시아/소비에트 작가/시인과의 유사점은 내가 읽어보지 않아 모르겠다. 이 정도면 대충 어떤 분위기인지 감이 잡히실 듯.


  작품 자체의 서사로 읽으려면, 그러지 마시라. 애초 시작할 때부터 특별히 말재주가 있는 작가와 더불어 앉아 말로만 설명해주는 사진을 연상하면서, 사진 속 사람과 배경이 어떨 것인지 마리야 스테파노바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각오”로 첫 페이지를 넘기시기 바란다.

  근데, 만일 W.G 제발트가 <아우스터리츠>를, <토성의 고리>를, <이민자>를 한 권으로 묶어서 6백 페이지 분량으로 출간했으면 어땠을까? 단언하는데, 다른 건 모르겠고, 읽으면서 간혹 사진을 볼 수 있어서 스테파노바보다 훨씬 읽기 편할 것 같다. 달리 이야기해서, 여차하면 스테파노바의 <기억의 기억들>을 지루한 책이라고 여기기 쉽다는 뜻도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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