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집이 있었을까
예니 에르펜베크 지음, 배수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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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에서 작가의 바이오는 그리 필요한 것 같지 않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면 좀 섭섭하니 위키피디아를 한 번 뒤져봤다. 1967년 동베를린에서 물리학자, 철학자, 작가인 John 에르펜베크의 딸로 태어났다. 독일인 John을 ‘욘’이라 해야 하는지 ‘존’이라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알파벳으로 적었다. 예니의 엄마 도리스 킬리아스는 특이하게도 독일 내 아랍주의자이며 번역가로 우리나라에도 알려진 아기브 마푸즈의 작품 번역에 정성을 쏟았다고 한다. 특이하다는 것이지 아랍주의자라고 해서 나쁘다는 의미는 1도 없다. 괜히 오해하지 마시라. 무슬림은 세계 3대 종교 가운데 하나다. 그렇게 많은 인류가 숭상하는 종교가 나쁠 턱이 없다. 교리를 이상하게 해석한 종교인 몇 몇이 문제일 뿐. 하여간 예니 에르펜베크는 적어도 할아버지 시대부터 상당히 문화적인 가족 분위기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1985년에 베를린 고급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 동안 제본공 견습과정을 마친 후, 수작업으로 책을 만드는 일이 도움이 되었는지 이후 1년 동안 극장에서 소품 및 의상 감독 일을 하다가 1988년에 유명한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 입학해 연극을 전공한다. 이후 과를 바꾸어 한스 아이슬러 음악원에서 음악극 연출을 공부해 벨라 버르톡의 오페라 <푸른 수염 영주의 성>을 졸업기념으로 연출한다. 이후 그라치 오페라하우스 조감독 등의 커리어를 쌓으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주요 오페라하우스에서 경력을 이어 나간다. 위키피디아에서 볼 수 있는 레퍼토리는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핸델의 <아시스와 갈라테아>, 모차르트의 <자이데> 등 주로 바로크 쪽이다. 스무 살 많은 남편 볼프강 보지크도 오페라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레하르의 오페레타 <에파>를 녹음했다.

  1990년부터 작가로도 활동하기 시작해 2015년에 <엔드 오브 데이즈>로 영국 인디펜던트 신문이 영역 문학작품에 주는 상인 독립 외국 소설상을 받았으며, 2024년엔 <카이로스>로 한강이 받았던 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받아 이름을 전세계에 알렸다. 내가 에르펜베크의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를 고른 것도 <카이로스>가 우리말로 번역해 시장에 나와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해놓고 그걸 기다리는 동안 예니 에르페베크의 문장이 어떤지 먼저 읽어보기 위해서였다.

  미리 이야기하건데, 알라딘의 <그곳에…>에 대한 고객 평점은 야박한 편이다. 아마 이이의 작품이 줄기를 이루는 서사가 거의 없이 풍경과 장소가 만들어내는 무형의 감상이 주를 이루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한다. 나는, 이렇게 말하면 팬들한테 얻어 터질 수도 있지만, 배수아의 번역으로는 예외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집중해 읽는, 특별히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 그것 한 가지만 가지고도 만족했다. 배수아 팬께서는 너무 열 받지 마시라. 배수아뿐만 아니라 내가 모든 소설가의 번역을 좋아하지 않는다. 워낙 우리말 사용에 능숙한 이들인지라 (눈치로 봐서) 번역하기 까다로운 지점이 나오면 그럴싸한 우리말로 무질러 놓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특히 배수아는 주로 서사보다 문장과 은유와 함의에 집중하는 사람인지라 조금 더. 그뿐이다. 하여간 나는 이 책을 읽고 희망도서 신청을 한 <카이로스>가 일찍 들어오기를 바라는, 괜히 조급해지는 마음이 생겼다. 이 기분 아시지?


  (역자 해설을 참조하면) “베를린 남동쪽 근교, 폴란드와의 국경에 있는 오더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와 베를린 사이에 위치한 샤르무첼 호숫가의 한 장소. 어쩌면 이 책의 주인공이라고 하기에 가장 적절한 것은 바로 그 땅, 대지, 흙과 공기와 나무가 어우러진 자연, 사람은 가도 언제나 한자리에 남아 있는 그 ‘공간’ 자체일 것이다.” (p.282)


  약 2만4천년 전, 얼음덩어리가 흘러와 뒤덮을 당시 육중한 바위산이었던 완만하게 솟은 지형은 지금은 구릉으로 남아 있으며, 1만8천년 전에 녹기 시작한 이 얼음덩어리, 빙하는 1만3천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물이 되어 녹아내리기 시작해 샤르무첼 호수가 되었다. 이 호수의 풍광이 아름다워 1881년 <에피 브리스트>와 <마틸데 뫼링>을 쓴 독일의 소설가 테오도르 폰타네는 새로이 “메르키슈 해海”라는 별칭을 붙여주어 이후 사람들이 메르키슈 호수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아, 그렇다고 폰타네를 읽어보시라는 말은 아니다. 독일 후기낭만주의, 별로 재미없다. 하여간 이 호수는 메르키슈 언덕 한 가운데 자리잡은 채 하늘을 마주보고 있었는데, 호수 주변을 떡갈나무, 오리나무, 소나무의 숲이 장관으로 둘러싼 채 1만 년을 넘게 지탱해왔다.  이 조용한 야생의 지역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털이 별로 나지 않은 원숭이 무리. 인간들. 처음부터 이들이 이곳에서 터를 잡은 건 아니다.

  사람이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 전은 1650년경. 30년 전쟁이 끝난 바로 직후이니 신성로마제국 대부분의 영토가 거의 황폐화된 시절이었을 터. 당시 브란덴부르크 지역은 스웨덴부터 시작해 보헤미아, 신성로마제국 등의 군대가 거의 거덜을 냈고, 지역의 중심인 베를린과 근교인 메르키슈 호숫가도 예외는 아니었을 터, 그렇게 곤궁한 시절부터 무려 2백년이 넘는 동안 메르키슈에서 촌장의 자리를 이어간 부라흐 집안의 남자들은 마을을 잘 보존해온 공로를 인정받아 마땅할 터였다. 작품은 마지막 부라흐 촌장 시절부터 시작한다. 촌장은 네 딸, 순서대로 그레테, 헤트비히, 에마, 클라라를 두었는데, 아내는 막내 클라라를 낳고 거의 곧바로 숨을 거두었다. 딸만 넷을 두어 이제 부라흐 집안은 촌장을 맡을 일이 없었고, 그저 네 딸이 잘 살기만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부라흐 촌장의 뜻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그레테는 혼인 전날 약혼자가 상속권을 얻는데 실패해 파혼해 버리고, 헤트비히는 탈곡 일꾼과의 사이에 정분이 난 것을 아버지에게 들키는 바람에 핏덩이에 불과한 태아를 사산하며, 농장 일을 관리하는데 큰 몫을 하는 에마는 아들이었으면 당연히 촌장을 이어서 했겠지만 그러지 못했으면서도 누구 한 명 에마의 혼인에 관해 신경쓰는 일이 없었고, 막내 클라라는 젊은 어부와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신이 이탈하며 호숫가에 자신의 땅이 될 것이라 일찌감치 정해진 클라라의 숲을 가져보지도 못하고 생을 접고 말았다. 그리하여 부라흐 촌장은 클라라의 땅을 3등 분할하여 외지인에게 팔아버리고 말았으니 세월은 어느 새 20세기로 접어들었다.


  세월은 흘렀고, 3등 분할한 예전의 클라라의 숲의 한 필지를 구입한 건축가는 드디어 메르키슈 호숫가의 첫번째 집을 짓기 시작한다. 자신이 하는 일이 집을 짓는 것이니 자신과 아내를 위한 최선의 작고 탄탄하고, 젊은 부부의 필요에 따른 다양한 장치가 내장되어 있는 편하고 아늑한 집을, 수도에서 조경업자를 불러와 메르키슈 촌의 정원사와 함께, 누가 봐도 아름다운 집과 정원과 숲이 될 수 있도록 조성한다. 앞에서 역자 배수아는 이 작품의 주인공이 호숫가의 땅, 대지, 흙 (사실 이 세 가지는 서로 같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리고 공기와 나무가 어우러진 자연이라고 했으나, 건축가가 집을 지은 작품의 초기 이후로 진정한 주인공은 자연이 아닌 사람의 구축물인 이 집과 정원, 그리고 부속 숲이라 해야 맞을 듯하다. 결국 작품은 집의 소멸로 대단원을 이루니까.

  그렇다. 지금 나는 아주 예외적으로 작품의 마지막을 이야기하고 있다. 건축가가 집을 짓고 또 시간이 흐른 다음, 3등분한 클라라의 숲 가운데 건축가의 집과 이웃한 필지를 섬유업자 아르투르가 구입한다. 유대인 가족. 그의 아내는 헤르미네. 아들과 며느리는 루트비히와 안나. 딸 엘리자베스와 사위 에른스트. 이들 사이의 외손녀 도리스. 친손자와 손녀 엘리엇과 고모의 이름을 물려받은 엘리자베스. 독일이 낳은 걸작품인 아들러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부유한 아르투르 가족. 아르투르 부부는 베를린에 살면서 여름을 나기 위하여 1년에 한 번씩 독일에 다니러 오는, 남아프리카에 사는 아들 가족과 함께 매년 여름 동안 메르키슈 호수에 머문다. 시간은 여전히 흐른다. 시간은 흘러 1930년대가 되고,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키 작은 퇴역 육군 상병이 집권을 하고, 그가 통치하는 독일이 조국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면서, 독일을 떠나야만 하는 절박한 심정이 된 아르투르는 건축가에게 시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으로 호숫가의 자기 땅을 팔고, 팔았지만, 기대한 것처럼 그 돈을 넣은 계좌는 즉시 동결되어 국경을 넘어가지도 못한 채 종말 수용소로 실려가 2분 동안 가스를 마시면서 죽었으며, 나이든 아내 헤르미네 역시 같은 가스를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2분 동안 마시며 생전 처음 보는 여자의 발목에 푸더덕, 똥을 싸고 말았다는 걸 생전의 마지막 기억으로 남기며, 죽었다. 사위 에른스트는 강제 노역에 징발당해 티푸스에 감염되어 곧 죽었고, 딸 역시 종말 수용소에서 죽었으며, 외손녀 도리스는 게토에서 숨어 있다가 발각이 났으니 이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유대인 가족한테 땅과 별장을 산 건축가는 2차 세계대전 종전을 맞아 소련군과 대 타협 끝에 사업을 연장할 수 있었으나, 자신의 일생일대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하여 자비를 들여 서독에서 놋쇠 나사못 5톤을 사온 것이 문제가 되어 숙청을 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집행 이틀 전에 이 정보를 미리 들은 관계자의 귀뜸을 받아, 마이센 도자기, 주석 맥주잔, 은제 식기 등 귀한 물건들을 정원의 귀퉁이마다 각 한 뭉텅이씩 따로 파묻고 서베를린 행 전철에 오를 것이다. 주말 동안에는 누구도 체포하지 않을 거라는 정보를 들어 적어도 죽임을 당하지 않겠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발적인 추방. 언제 돌아올지 모르지만 하여간 건축가는 자신의 귀중품을 정원에 묻기로 하고,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당연히 대부분은 모습을 드러나게 되고, 건축가는 서베를린에서 숨을 거둔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아내와 아들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그 장벽의 폐허 위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이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을 연주한 후, 독일 정부에 소송을 해 메르키슈 호수의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만, 저 멀리 남아프리카에 아직도 살고 있는 아르투르의 아들 루트비히 역시 소송을 진행해 오래, 오래 끌고 간다.

  이 와중에도 호숫가 집에는 다양한 일이 다양한 사람들한테 벌어졌으며, 벌어지고 있으며, 그것으로 끝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므로. 호숫가와 바람과 나무와 별빛은 영원하겠지만 사람이 만든 집은 언젠가 무너지고, 그렇게 철거하는 것이 보수해 사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라는 판단을 내린다면, 판단을 인간이 내린다면 그걸로 집은 사라질 터이니까.


  책을 읽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인간의 탄생 이전의 거대한 시간, 그리고 절멸 이후에 계속될 무한의 시간을 떠올리며, 겨우 2만4천년 전에 밀려온 빙하가 1만3천년 전에 녹아 생긴 호숫가에 기껏해야 250년 된 마을에서 겨우 백년 전에 지은 사람의 집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허허롭고 허허로웠다. 사람아, 문명아, 너는 얼마나 작으냐. 얼마나 보잘것없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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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2-17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넘 예쁘네요. 제목만 보면 박완서스럽기도하고요. 우리나라 서사가 약하다는 지적을 받아 온터라 서사가 약하면 무조건 박한가 봅니다. ㅎㅎ 암튼 저도 함 읽어 보고 싶은데 이 책은 언제 나와서 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ㅠ

Falstaff 2025-02-17 16:31   좋아요 1 | URL
을유문화사가 광고를 거의 안 하다가 요즘에 와서 조금씩 하는 걸로 보입니다. 좋은 출판사인데 그게 좀 아쉽더라고요.
에르펜베크, 이 작자를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이 팍, 생겼습니다. <카이로스> 말고 다른 책도 계속 번역해 나왔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
 
겨울 여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4
자우메 카브레 지음, 권가람 옮김 / 민음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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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분들, 카브레 작품이 나온 것만 가지고 득달같이 도서관 희망도서 신청했거든요, 부탁인데요, 출판 연도 ˝2024년 1월˝은 바꾸지 말아 주세요. 정보가 달라서 안 사주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뭐 작년 초에 나왔는데 쇤네가 못 봤을 수도 있겠지요. 웃자고 하는 얘기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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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02-14 16: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정보 살펴본 후….) 단편집이라 조금 섭섭하긴 하네요…🤣

Falstaff 2025-02-14 18:42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래도 읽어봐야겠습니닷!

coolcat329 2025-02-14 1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작가 반갑네요!

Falstaff 2025-02-14 18:42   좋아요 1 | URL
저도 보자마자 팍 희망도서 신청했답니다. 뭘 따지겠습니까. ㅋㅋㅋ

페넬로페 2025-02-14 1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반갑네요~^

Falstaff 2025-02-14 19:19   좋아요 2 | URL
ㅎㅎ 먼저 읽으시고 알려주세요! ^^
 
플러드
힐러리 맨틀 지음, 이경아 옮김 / 민음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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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선 놀음. 도서관 개가실 거닐기. 세상에서 가장 여유로운 자세로 800번 서가 사이를 훑는다. 간혹 걸음을 멈추고 책등을 바라보며 쓱, 한 번 미소 짓기. 저 책 정말 재미있는데 어째 사람의 손을 타지 않는 거 같군. 예상외로 이런 책 많아. 언제 날 잡아 몇 권 소개해봐야겠네. 어슬렁어슬렁. 이러다가 갑자기 눈에 띄는 이름 하나. 이런 게 한 번 눈에 들어오면 그것 그냥 둔 채 다른 서가로 옮아가기 쉽지 않다. 이번에도 그랬다. 발정한 잉글랜드 국왕 헨리8세의 바람기를 채우기 위하여 단행한 종교개혁을 그린 <울프 홀>과 앤 불린 최후의 날까지 토머스 크롬웰의 활약을 중심으로 한 <시체들을 끌어내라>로 부커 상을 두 번이나 받은 힐러리 맨틀의 다른 작품 <플러드>. 그래서 읽었다.

  플러드. 로버트 플러드. Robertus de Fluctibus (1574~1637). 피 묻은 늑대 또는 붉은 늑대가 문장인 웨일스 혈통의 귀족 자재. 의사이자, 학자인 동시에 연금술사, 신비주의자, 점성가, 수학자, 우주론자로 당대의 현자 요하네스 케플러와 학문적으로 맞짱을 뜬 적도 있는 장미십자회 회원. 그러나 플러드를 만나기 위하여 힐러리 맨틀은 독자를 16세기 또는 17세기로 초대하지 않는다. 작품의 무대는 1956년, 삼면이 황무지로 둘러싸인 잉글랜드의 가상의 마을 페더호턴. 북쪽으로 유일하게 맨체스터, 위건, 리버풀 행 도로와 철도가 놓인 이곳에 백여 년 전에 면직물 방직공장이 세 곳 들어선 이후 공장에 취직하기 위해 아일랜드 사람들이 모여 들어 이룬 마을. 따라서 마을엔 아일랜드 이민자를 위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당과 수녀원 그리고 수녀원 부속 학교도 들어섰다. 인구의 다수가 로마 가톨릭 쪽이다. 소수의 잉글랜드인들은 영국 국교 교회가 아닌 개신교 감리교 교회에 다닌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당의 늙은 주임 신부 앵윈. 처음엔 잠이 오지 않아 위스키 한두 잔씩 홀짝거리던 것이 이제는 위스키를 장복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한 시절엔 순종, 청빈, 순결의 의무를 수행하며 신앙을 향한 열정을 불살랐지만, 나이 들고, 이 빠지고, 무릎 쑤시는 시절을 맞아 세월의 잽을 한두 대씩 얻어 터지더니 제일 먼저 열정이 식어버리고 이어서 과연 신이 존재하기는 할까? 악마적인 의심에 시달렸으며, 급기야 이제는 더 이상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러면서도 이 저주받은 외진 황무지 성당의 주임 신부의 직을 유지하는 것은 그렇다고 신부의 직을 물리칠 수는 없으니까. 이제까지는 교단이 앵윈 신부를 필요로 했다면, 지금부터는 앵윈 신부가 교단이 필요해 좀 더 깔고 앉아 있겠다는 데 그게 뭐? 이날 이때까지 신부 짓을 했으니 얼마 남지 않은 세월동안 나를 좀 먹여 살려도 크게 문제되지 않잖아? 이런 심사였겠지. 그렇다고 앵윈 신부가 가톨릭까지 저버린 건 아니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데 신앙은 그대로? 그럼 그게 뭐? 뭐긴 뭔가, 미신이지. 미신만 남은 거.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지금부터 발언은 진심으로 가톨릭 또는 개신교를 믿는 분은 마음이 상하실 수 있을 터이지만, 솔직하게 쓸 생각이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승인한 313년의 밀라노 칙령 이후에, 기독교가 전 로마 지역에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이, 질투의 하느님을 위하여 그간 수십 세기 동안 그리스의 뒤를 이어 로만 정신을 유지해온 저 올림푸스 신들의 신전을 박살내는 거였다. 두번째가 당시 황제나 귀족들보다 정치성향이 뛰어난 기독교 수장들의 권력투쟁이었고. 내 의견 아니다. 전부 <로마제국 흥망사>에 나온다. 불만 있으면 나 말고 에드워드 기번에게 항의하시라. 물론 당신 죽은 다음에 천국 가는 길에 일부러 연옥에 들러 그를 만날 기회가 생기면 그렇다는 거다. 아,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 나는 아무리 성서를 뒤져봐도 연옥이라는 단어를 발견하지 못했는데 단테는 어디서 연옥을 주워 와서 오랜 세월 그렇게 재미를 봤을까? 그럴 리가 있느냐고? 성서 다시 한번 읽어 보시라. 연옥이란 말이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에이, 나는 읽어봤다니까. 또 읽기는 싫고.

  하여간 그건 그거고, 정작 이 책을 읽고 내 뇌를 잠식했던 건, 기독교, 특히 로마 가톨릭에 무수하게 등장하는 성인과 성녀들. 그 사람들은 뭐야? 이 책에서 나오는 성인, 성녀 몇 명만 보자. 그냥 눈에 띄는 몇 명만.

  성 던스탄. 대장간에서 일을 하고 있다가 악마가 찾아와 유혹을 하려 들자 벌겋게 달아오른 집게로 악마의 코를 콱 낚아챘다.

  성녀 아폴로니아. 로마인들이 아폴로니아의 이를 뽑는 고문을 견뎌 후에 치과 의사들의 수호성인이 되는 영광을 얻었다.

  성 그레고리우스. 교황관을 쓰고 있다니 대교황이란 칭호를 받은 그레고리우스 1세를 말하는 거 같은데, 교사들의 수호성인이다. 어디서 주워듣기를(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비록 후대의 숱한 사제들이 말을 듣지 않았지만 신부들한테 처음으로 순결을 요구했다지?

  성 아우구스티누스. 화살이 꽂힌 심장을 들고 있다는데 그러면 혹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니라 미남으로도 이름이 높은 성 세바스티아누스 아닌가? 젊은 시절엔 생 양아치 짓만 하고 다니면서 부모 속 깨나 썩이던 아우구스티누스가 맞다면 알제리의 히포 레기우스에서 성직자 생활을 해 많은 아일랜드 인들은 하마Hippo 아우구스티누스인 줄 알걸?

  작은 사자를 데리고 있다는 성 히에로니무스. 돌로 자기 앙가슴을 두드리면서 학자, 서적상, 순례자의 성인이 된 교부 가운데 1인. 이글거리는 눈으로 은둔자의 무릎을 다 드러낸 채 사막에서 도를 닦는 이로, 앵윈 신부가 제일 좋아하는 성인이란다.

  그리고 벌집을 든 암브로시우스. 별명이 성 벌집인.

  자신의 잘린 가슴을 접시에 담아 들고 있는 성녀 아가타는 종 만드는 사람의 수호성인.

  역시 자신의 가죽을 벗기는 데 사용한 칼을 움켜쥐고 있는 성 바로톨로메오와 휴대용 풍금을 들고 있는 성녀 체칠리아. 장미 화환 아래에서 앞을 노려보고 있는 작은 꽃小花 테레사.

  그리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그저 불초한 무식쟁이의 의견임을 감안하시고 내가 생각하는 걸 들어보시라. 이건 기독교가 자기 손으로 없앤 그리스 로마의 여러 신多神을 벤치마킹해 스스로 만든 거 아닌가 싶다. 중세 시대의 일반 대중에게 성서와 성서에 나오는 한정된 진리만 가지고는 암만해도 마땅하지 않아 직접적인 삶의 의지가 되는 성인, 성녀들을 자체 제작 또는 과장해 상징, 우상 기타 등등을 만들어주었던 거 아닌가, 한다는 말씀. 치과의사, 종 만드는 사람의 수호성인은 웃기고, 교사, 나그네, 대장장이의 수호성인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도 몇 번 마주친 거 같지 않으신가? 그래서 줄리언 반스가 말했다니까. “나라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하여는 역사를 오해할 필요가 있다.”고. 한 술 더 떠, 종교를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서 더 풍부한 스토리를 만들 필요가 있는 법이다. 스토리를 만드는 건 소설. 즉 바티칸에서 소설을 썼다는 얘기지, 저 먼 시절에. 기독교라고 뭐 다를 거 같았어?


  이 성당을 점검하기 위하여 통통한 체격에 딱딱한 성격으로 테 없는 안경을 쓴 현대적인 고위 성직자인 주교가 찾아온다. 그는 1950년대가 아닌 다가올 다음 십년은 통합과 화합의 십년이라 규정하고, 통화합을 위해 보편 교회의 정신에 입각해 라틴어 말고 현대 현지어로 미사를 집전하라고 지시한다. 이런 세상에, 이렇게 끔찍한 일이. 어찌 미사를 라틴어가 아닌 언어로 진행할 수 있을까? 미사가 별 거야? 하느님한테 올리는 제사. 그러면 하느님의 언어인 라틴어로 해야 하느님이 더 쉽게 알아들으실 거 아니냐는 거다. 이렇게 망측한 일이.

  그런데 주교는 여기서 한 숟가락을 더 보태,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당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성상을, 코가 깨진 성모 마리아 상은 코를 정상으로 회복시킨다는 전제로, 소화 테레사와 함께 둘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철거하라고 지시한다. 무슨 수호성인. 무슨 수호성인. 이게 미신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취지다. 죽은 후 지옥의 유황불에 던져질 내가 보기엔, 그러면 성체를 모시는 일도? 밀떡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붉은 포도주 한 잔 들어올리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피의 잔이니, 너희는 이 의식을 행함으로써 나를 기념하라?”

  주교의 말을 듣고 삐딱한 우리의 앵윈 신부. 신부가 자기 말을 제대로 들을 거 같지 않으니까 주교가 덧붙인다. 이제 늙어버린 자네한테 조수가 필요할 거 같군. 즉 자기 고자질꾼을 부제로 보내겠다는 거다. 아, 이런 제기랄.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을. 그러나 늦었다.

  며칠 후, 복종의 의무가 있는 앵윈 신부는 주교의 명령을 따르기 위하여 성당 마당 귀퉁이를 넓게 파고 그 속에 성상들을 파묻는다. 그리고 그날 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캄캄한 밤에, 늦은 시간에 사제관을 방문하려면 부엌으로 향하는 옆문을 두드려야 함에도 무례하게 현관을 쾅쾅 두드리는 작자가 나타났으니, 그의 목 둘레에 빳빳하고 흰 로만 칼라를 달고 있다. 누가 봐도 주교가 보낸 새끼 신부, 즉 부제가 드디어 도착한 거였다. 온몸에서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검은 옷의 신부, 그의 이름이 플러드, 알파벳으로 FLUDD이어서, 온몸에서 줄줄 흐르는flood 빗물하고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었다나? 이이가 17세기의 신비론자이자 연금술사, 점성가, 오컬트 주의자인 그 플러드 맞아?

  흠. 그건 알려드릴 수 없지. 한 가지 힌트만 드리자면, 이 플러드는 직접 미사를 집전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악마는 아니라는 말씀? 아, 몰라, 몰라. 그러면 미사를 집전한다니까 사기꾼? 아 모른다니까! 말 나온 김에 한 마디만 보태자면, 저 먼 시절 그레고리우스 1세의 말을 확실하게 거역한 종자라서 순결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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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2-14 0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예니 에르펜베크,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
화요일. 아리엘 도르프만, <체 게바라의 빙산>
목요일. 최은미, 《목련정전目連正傳》
금요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

stella.K 2025-02-14 1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옥은 가톨릭에서 나온 거 아닌가요? 연옥에 가 있는 가족에게 살아있는 사람이 그 사람을 위해 연보하면 천국으로 간다고 믿게해서 엄청난 부를 가톨릭이 쌓게되고 그에 환멸을 느낀 루터나 칼빈이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맞나 모르겠는데 암튼 이책 흥미롭긴 하네요.
스펙터이터란 사람이 쓴 말이 인상적이긴 하네요.
울프 홀을 쓴 작가로군요.

Falstaff 2025-02-14 16:27   좋아요 1 | URL
읏, 기독교면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바탕이 다 그게 그거 아닌가요? 제가 읽은 성서도 신구교 공통번역이었습니다만. 하긴 가톨릭하고 개신교, 지금 봐서 완전히 다른 종교이긴 한 거 같습니다. 앗참. 지금이 아니지요, 둘이 대가리 터지게 싸운 세월이 몇 백년인데 ㅋㅋㅋㅋ
 
목련 전차 창비시선 264
손택수 지음 / 창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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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정초, 스물여덟 살이 채 안 된 청년 손택수가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과하여 시인의 말석에 자리를 깔더니, 5년이 지난 2003년 첫 시집 《호랑이 발자국》을 낸다. 그리고 3년 후, 같은 창비시선 시리즈로 두 번째 시집을 출간한 것이 오늘 독후감을 쓰는 《목련 전차》이며, 또 4년이 지나 이번엔 실천문학사의 실천시집을 통해 찍은 《나무의 수사학》은 5년 전에 읽고 독후감을 올린 적 있다. 이렇게 나는 손택수의 3번, 2번 시집을 읽는다. 《나무의 수사학》의 시인은 이미 정원에 열매가 열리는 실팍한 모과나무가 있는 아파트에 살면서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목련 전차》의 시인으로서는 그것도 꿈 같은 상상일 수도 있었을 터. 이 시집에서 손택수는 어린 시절 태를 묻은 고향 담양의 할머니 집을 바라보고 있고, 머리가 컸어도 기껏해야 생활의 궁상에 전 초짜 시인이자, 아직 신혼의 기색을 털지 못한 젊은 남편이다.

  손택수는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70년 개띠. 소년 시절에 먹고 살기 위해 부모의 손을 잡고 부산으로 이주해 향수병을 단단히 앓았단다.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어린 시절 당시에는 드물게 산부인과를 퇴원하자마자 외갓집에 보내져 경기도 소도시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후,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할아버지 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얼마나 내가 떠난 그곳과 외조부모의 품을 그리워했는지. 부산의 손택수도 딱 그랬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무의 수사학》 122페이지에 실린 <내 시의 저작권에 대해 말씀드리자면>에서 그는 자기 시가


  구름 5%, 먼지 3.5%, 나무 20%, 논 10%

  강 10%, 새 5%, 바람 8%, 나비 2.55%

  돌 15%, 노을 1.99%, 낮잠 11%, 달 2%

  (여기에 끼지 못한 당나귀에게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함)

  (아차, 지렁이도 있음)


  이라고 딱 못을 박았다. 그러니 자기 시(들)의 94%는 당나귀와 지렁이의 소유권을 포함하지 않고도 몽땅 유년시절의 기억 또는 그것을 향한 노스텔지어라는 의미이겠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목련 전차》에 실린 시에서도 내 마음에 차는 시들은 유년시절 시골 생활을 추억하는 시들을 모아 놓은 1부에 집중되어 있다. 예컨데 이런 시.



  강이 날아오른다



  강이 휘어진다 乙, 乙, 乙 강이 휘어지는 아픔으로 등 굽은 아낙 하나 아기를 업고 밭을 맨다


  호밋날 끝에 돌 부딪는 소리, 강이 들을 껴안는다 한 굽이 두 굽이 살이 패는 아픔으로 저문 들을 품는다


  乙, 乙, 乙 물새떼가 강을 들어올린다 천마리 만마리 천리 만리 소쿠라지는 울음소리 ―


  까딱하면, 저 속으로 첨벙 뛰어들겠다    (전문. P.10)



  강이 날아올라? 그럴 리가 있나. 당연히 천적들의 접근을 피하기 위해 밝은 낮 동안 강물 위에 동동 떠 있던 물새떼가 석양을 맞아 천 마리, 만 마리 한 번에 날아오르는 모습을 乙, 乙, 乙 이라고 묘사했을 것이다. 乙 새 ‘을’자가 강 위에 뜬 새의 모습과 이렇게 어울릴 수가. 거 참. 누가 시인 아니랄까봐. 근데, 내가 시를 아는 게 쥐뿔도 없다고 가정을 하고, 그래서 용감하게 한 마디 덧붙이자면, 그저 내 의견일 뿐인데, 위의 시에서 마지막 연, “까딱하면, 저 속으로 첨벙 뛰어들겠다”는 빼버리는 게 더 낫지 않았겠어? 거 새들끼리 소쿠라지게 울어가며 잘 어울리는 걸 뭐하러 시인이라는 사람종이 그 속에 뛰어들어 그림을 망가뜨리냐는 것이지. 뭐 아니면 말고. 이 시의 저작권은 당연히 강, 새, 노을, 그리고 화면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틀림없이 어느 구석에 숨어 있을 지렁이가 가져야겠다.

  <강이 날아오른다>가 시집에서 제일 먼저 실은 시이고, 이어서 <집장구>가 등장한다. 집장구? 그게 뭐냐고? 예전 나 어린 시절에 국한해 말씀드립자면, 봄 가을, 이렇게 일년에 두 번씩 문창호지를 다시 발랐다. 먼저 묵은 창호지를 창살에서 다 떼어내고, 그래도 창살에 붙은 창호지까지 물에 듬뿍 불려 박박, 그러나 창살에 흠이 안 갈 정도로만 박박 긁어낸 다음에, 새 창호지에 풀을 발라, 창살 말고 창호지 전체에 풀을 발라 붙이고, 풀을 붙이던 풀비로 쓱쓱 문질러 닦아 말리면, 창호지와 풀이 마르면서 이게 여간 팽팽해지는 게 아니라서 손가락으로 통통 튀긴다든지 하면 통통통, 마치 장구 칠 때 나는 소리가 난다 하여, 그걸 집장구라 칭하고 있는 거다. 그리하여 노래하기를:



  집장구



  일년에 한 번은 집이

  장구소리를 냈다

  뜯어낸 문에

  풀비로 쓱싹쓱싹

  새 창호지를 바른 날이었다

  한입 가득 머금은 물을

  푸― 푸― 골고루 뿌려준 뒤

  그늘에서 말리면

  빳빳하게 당겨지던 창호문

  너덜너덜 해어진 안팎의 경계가

  탱탱해져서,

  수저 부딪는 소리도

  새소리 닭울음소리도 한결 울림이 좋았다


  대나무 그림자가 장구채처럼 문에 어리던 날이었다

  그런 날이면 코 고는 소리에도 정든 가락이 실려 있었다    (전문. P.11)



  시인의 고향인 담양에는 대나무가 많다. 그게 달 그림자에 비쳐 창호 바른 날 방문에 어렸던 것이 마치 장구채 같았고, 그래서 누군가의, 외할아버지나 외삼촌 또는 외할머니의 코고는 소리마저 울림 좋은 장구 소리처럼 들렸다는 뜻일 터인데, 이 시 또한 무식해서 용감한 의견을 덧붙이자면, 둘째 연을 통째로 없애버렸으면 어땠을까? 아니면 연 구분 없이 윗연에 이어서 쓰던지. 괜히 한 마디 보태 거스러미가 생긴 것 같은데, 시인을 꼭 그걸 이야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시인의 의견이 맞겠지. 손택수가 우리나라에서 시인한테 주는 거의 모든 시 관련 상은 다 쓸어 담은 당대의 시인이다. 예전엔 궁상맞은 청년 시인이었을지언정 지금은 우리나라 유수의 출판사인 실천문학사 대표이사를 지내고 있으니 나 같은 아마추어 나부랭이가 뭐라 의견을 보탤 처지가 아닌 건 안다. 그래도, 내 입도 뚫린 입이니, 뭐 이 정도야 어엿비 봐 주겠지.

  그리고 이 시집에서 제일 인상깊었던 시가 등장한다. <방심>.



  放心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전문. p.14~15)



  시 읽기를 마치자마자 딱 그림이 접수된다. 착한 시다. 시골집이라도 있는 집이다. 대청마루에 배를 내놓고 누워 낮잠을 자고 있는 한낮, 앞뒤로 열어놓은 마루문을 통해 대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관통해 말 그대로 쎤~한 함포고복의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을 때, 누운 내 얼굴 바투 위로 하얗고 하얀 배를 가진 제비 한 마리가 대청마루를 관통해 날아가는 그림. 그게 시인이 “放心방심”이라 하는 순간이었다. 찰나의 숨막히는 간질거림. 그리고 눈썹 한 올 같은 긴장감.

  담양에서 부산으로 간 소년 손택수는 부산에서 웬수 같은 사춘기를 맞는다. 그리하여 이제 슬슬 관능에도 눈을 뜨게 되는데, 이 시절의 순정한 성적 개안을 시인은 참 그럴 듯하게 그려낸다. 아니나 다를까, 손택수의 다른 시집을 검색해보니 예상 외로 청소년 시집도 여러 권 낸 이력이 있다. 그렇군. 그래서 사춘기 소년을 읽는 내 마음도 그리 실감이 났군. 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청소년 시라는 거. 이거 아무나 쓰면 망쳐버리기 일쑤인 것은, 내가 여자였던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여성의 경우는 모르겠고, 험하게 사춘기를 지낸 사내 시절을 겪은 수컷들은 다 아시리라. 이만큼 고급진 수컷의 사춘기 그림을 그리기가 쉽지 않은 것을. 이 시 읽으며 독후감을 마감하자.



 



  챙, 하면 떠오르는 빗소리

  빗소리와 빗소리가

  부딪치는 양철지붕 끝

  처마에 챙을 단 집이 있었다

  집 안을 가리고 남은 여분이 살짝

  대문 밖으로 뻗어나와 만든 품,

  하굣길에 소낙비를 만나선

  급한 마음에 우당탕탕 그 속을 비집고 든 적이 있는데

  책가방 머리에 쓰고 뛰어든 그 속엔 마침

  여고생이 된 옆집 누나가 새치름

  비를 긋고 있었던가, 젖은 누나의

  교복 위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김과

  마악 잔털이 돋기 시작한 내 겨드랑에서 빠져나온 김이

  우리들 허락도 없이 마구 휘감겨들던 챙

  더운 살냄새와 살냄새가 뭉클뭉클 살을 비벼대던 챙

  처마 끝을 따라 뭉긋이 흘러내린 깊어진 마음의 기울기

  챙, 하면 아찔하게 후들거리는 빗줄기

  은빛 스틱이 치는 양철북 소리   (전문.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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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2-13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참, 그런 내용이구먼유. ㅋㅋ 지나놓고 보면 그리운 시절이 있지요. 저도 어린 시절 1년에 두 번 외갓댁 가는 게 그렇게 좋았는데. 불편한데도 거길 다녀와야 만사가 형통한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 시절이 그립네요. ^^

Falstaff 2025-02-13 18:37   좋아요 1 | URL
넹. ㅎㅎㅎ 시간 나면 쫑쫑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아구아 비바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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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라면 그녀의 나이 스물둘에 쓴 <야생의 심장 가까이>를 가장 먼저 읽었다. 주인공 주아나의 친절하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 한 여름의 대낮. 탁-탁, 탁, 탁. 타자기 두드리는 소리. 뎅-그렁. 건조한 공기를 뚫고 들려오는 시계 우는 소리. 타자로 시를 쓰는 아버지를 흉내내, 시를 써서 아버지에게 보여주지만 딸은 그리 큰 관심을 받지 못한다. 남편과 아이를 두고 집을 나가버린 어머니 엘자에 대한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어쩌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몇 안 남은 선량한 선생의 조언. 행복해지면 뭘 얻을 수 있을까? 행복해지면 어떻게 되나? 그 다음엔 뭐가 오지? 무엇을 위해 행복해져야 하나? 같이 뒤를 잇는 의문문들.

  작가의 성장과정을 아는 것은 독자에게 이런 의미에서 필요하다. 어머니의 존재 없음이 딸에게 미치는 영향. 또는 딸을 미칠 수 있게 하는 영향. 글을 쓴다는 일이 일종의 미쳐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말이지만. 유대인 가족의 일원으로 우크라이나에 살 당시, 리스펙토르가 세상에 나오던 시기인 1919년에서 1920년 사이에 벌어진 우크라이나 지역의 반유대주의 폭동과 학대를 일컫는 포그롬 시절, 클라리시의 어머니 마니아가 폭도들에 의하여 강간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일을 클라리시가 직접 목격을 했는지, 아니면 가족 내 깊은 트라우마로 작용해 가족공동체로 절망적이고 궁극적으로 밀실 공포증 적인 상태 속에서 살게 되었는 지, 두 경우 다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여간 이 일로 리스펙토르 가족은 클라리시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브라질로 이민하게 된다. 어머니는 딸이 아홉 살 때 숨을 거둔다.

  그리하여 데뷔작, 놀라운 충격일 수밖에 없는 데뷔작인 <야생의 심장 가까이>는 물론이고 <별의 시간>에서도 죽음과 삶의 흔적에 관한 작가 자신의 내적 갈등을 묘사하는 데 9할, 적어도 8할 이상의 지면을 투여한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글은 수많은 비의, 은유, 미로로 점철되어 있어서, 독자는 작가의 언어를 따라가며 각기 저마다의 오해 또는 오역을 가미할 수밖에 없다. 작가를 오해하지 않고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책, 문장들의 집합. 그것이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이다.

  여태 읽은 세 권의 책 가운데 이것, <아구아 비바>가 제일 그랬다.


  “거기엔 몹시도 심원한 행복이 있다. 할렐루야가 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나는 이별의 고통이 담긴 처절한 인간의 울부짖음과 합쳐진 악마의 환호를, 할렐루야를 외친다. 나는 아직 이성을 잃지 않았지만―이성의 광기라고 할 수 있는 수학을 배웠으므로―그러나 지금 나는 혈장을 원한다:”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런 불경의 할렐루야로. 할렐루야는 주를 찬양하는 할렐루야가 아니라 인간의 울부짖음과 합쳐진 악마의 환호를 말한다. 무엇이 리스펙토르를 기존의 율법에 대하여 극한 도전을 하게 만들었을까? 여기에서도 작가의 바이오그래피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쉰일곱 번째 생일을 불과 얼마 남겨두지 않고 난소암으로 세상을 떴다. 그러나 그녀의 후반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던 고통은 마흔네 살 때 집에서 난 화재로 인한 화상의 상처였다. 인류가 포유 짐승이던 시절부터 수만 년 동안 가까이 할 이유가 없었던 뜨거운 열기로 인한 피해, 화상에 대해 인류는 그걸 대비하고 스스로 치유할 기질을 가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화상은 인류의 모든 외상 가운데 가장 고통스럽고, 돌이킬 수 없는 흉터를 남기며, 치유하기 위하여 제일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리스펙토르는 화재 당시 입은 화상을 거의 치료했지만, 지독한 화상의 후유증, 몸과 특히 마음 속에 도사린 끔찍한 고통의 기억 속에서 쉼없이 흔들리는 영혼으로 <아구아 비바>를 쓰고 있었다. 그렇게 보인다는 뜻이다. 리스펙토르 자신이 직접 그렇다고 말할 작가가 아니라서. 아니면 어떤 식으로도 인간의 울부짖음과 악마의 환호, 그리하여 타인의 피, 혈장을 원하는 상태를 할렐루야, 찬양할 수는 없을 테니까.

  독자는 처음부터 이렇게 큰 펀치 한 방을 맞고 시작한다.

  제목 <아구아 비바 Agua Viva>. 1971년에 쓰고 73년에 발표한 작품. “살아있는 물”이라는 뜻을 가진. 제목을 감안하고 위에 인용한 시작부분을 연상하면 이제 앞으로 뭔가 흐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지난 세기가 시작할 때부터 독자는 글 속에서 뭔가 흐르는 양식을, 쥐뿔도 아는 건 없어도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고 주장할 준비가 되어 있는 족속들이다. 그래서 기대한다. 이제 뭔가 흘러주기를. 게다가 제목 자체가 물이라고 하니까. 하지만 흐름은 시작하자마자 브라질의 열기 속으로 증발해버렸거나 모래땅 속으로 스며들어버렸다.


  바로 다음에 거론하는 주제는 ‘지금-순간’. 즉 현재. 미시적 현재라서 시작하자마자 벌써 과거가 되어버린, 숱하게 많은 작가, 작가 지망생들이 써먹어 식상하기 그지없는 현재의 포착을 말하지만 당연히 실패하고 만다. 현재를 붙잡는 일은 순간의 본질적인 특성 상 금지되어 있지만 유일하게 허공에서 빛나는 순간의 보석을 순간의 떨림 속에서 느낌으로 승화하는 물질, 도파민이 틀림없을 것 같은 물질을 황홀경 속에 반짝이는 기쁨의 순간은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사랑의 행위. 몸의 기이한 영광, 형태가 없는 동시에 너무도 객관적이어서 마치 몸 밖에서 생겨나는 듯한 기쁨, 기쁨, 기쁨의 시간, 순간의 본질.

  아, 이런 식으로 흐르나보다. 독자는 한 번 더 오해한다. 특별한 교육을 받은 평론가는 뭔가 흐르는 것을 감지할 지도 모르지. 그러나 작가는 이 기쁨의 순간에 ‘찬미하는 주께서 계신 하늘’이 아닌 ‘허공’에 대고 새처럼 노래한다. 이 사랑마저, 고통스러운 열정 없이는 할렐루야가 사랑의 뒤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등장한다. ‘당신.’

  이렇게 해서 드디어 소설은 2인칭 소설이 될 수 있을까? 글쎄.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나는 아니라는 쪽으로 손을 든다. 더할 수 없이 개인적인 소설. 오직 자신의 뇌 속에서 벌어지고, 파생되고, 기어 나오는 추상명사들의 열병, 열병에 이어지는 분열행진. 때에 따라 낱말이나 구절의 폭탄을 과시하는 무장행렬.

  명사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추상명사들로 ‘나’는 ‘나’ 자신과 당신, 정말 당신일 수도 있고,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일 수도 있는 당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무언가를 만들 것인데, 그건 죽음에 이르는 나의 자유이다. 죽음까지 도달할 수 있게 하는 건 자유이고, 자유에 이르게 만드는 건 추상명사들인데 추상명사 속에서 중요한 요소 가운데 ‘고통’이 들어있다고 추리한다. 독자는 단정하지 못한다. 다만 추리할 뿐. 작가 자신 스스로 단정하는 건 추상명사 말고 없기 때문에.

  그리하여 독자는 결코 두껍지 않은 책을 읽는데 지쳐버리기 시작한다. 만일 리스펙토르 특유의 강건체와 화려체 문장이 아니라면 이런 추상명사의 군집, 다른 곳에서도 아니고 엄정한 ‘산문’ 형식의 예술형태 속에서 추상명사가 득실거리는 현상에 대하여 “내 상태는 물이 흐르고 있는 정원.”이라 주장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 다른 독자는 모르겠지만 나는 리스펙토르 표 문장이 아니라면 쉽지 않았을 듯하다. 이렇게 많은 상황, 상태, 변용 등을 나열하다가, 그래서 독자가 책을 읽으며 미궁에 빠져들기 바로 직전에, 다행스럽게 책의 분량이 많지 않아서, 어느덧 결말 부근에 도달하면, 놀랍게도 여태 쏟아놓은 추상명사들, 아무렇게나 난삽하게 널려 있는 줄 알았던 추상명사들을 어느 새 넓은 빗자루로 쓸어 모아 적어도 한 군데 소복하게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지복至福 자체는 종교적이지도 세속적이지도 않다. 그리고 신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도 아무런 입장을 가질 필요가 없다. 내 말은, 어떤 사람이 머리로 하는 생각과 이 ‘생각-느낌’은 서로 극도의 불통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아무런 궤변이나 역설 없이 말하건대, 그 불통 지점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훌륭한 소통을 제공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 자신과 소통한 것이다.”


  이렇게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지복에 관하여 독자들과 소통하고자 했던 거였다. 시도가 성공을 했건 실패했건 판단하는 것은 당연히 독자의 몫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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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2-11 0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보니 완전히 꿈보다 해몽이구먼. 인생이 다 그렇지 뭐.

- 2025-02-11 08:35   좋아요 1 | URL
와!!!! 퐐님 특유의 해몽..! 재밌게 읽었어요, 저는 작가의 이력은 이 글 읽기 전에 전혀 몰랐고 책상위에 산문집을 올려두고 종종 읽는데요, 클라리시는 사랑이 많고 꽤 명랑하고 산뜻한 산문을 쓰는 작가였어요. 그래서 아구아 비바 읽을 때랑 뭔가 다른느낌이라 신기하기도…!

Falstaff 2025-02-11 15:30   좋아요 1 | URL
재밌게 읽어주어 고맙습니다! 이이의 작품은 정말 읽기 쉽지 않아요. 그렇다고 막 쓰면 쥐뿔도 없으면서 잘난 척하는 거 같고요. ㅋㅋㅋ 산문집은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 2025-02-11 17:10   좋아요 1 | URL
퐐님 글은 (물론 그냥도 장광설이 좋지만) 책 다 읽고 난 뒤에 보면 더 읽기 좋은 것 같아요. 아. 이런 맥락이 있을 수도 있었겠구나.
제가 느꼈던 아구아 비바는 매우 추상적이면서도 엄청 신체적인 글이었고, 뭔가 읽으면서 대단한 걸 읽고 있다는 느낌을 떨치지 못했어요!!!
작가의 삶 자체에 대해서 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걸 보면... (제가 게으르기도 하지만) 책 자체를 책 자체로 좀 느끼보고 싶었던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요 글 보고 나서는 다른 느낌으로 다시 읽어볼 수도 있을거 같고요? 아무튼 크라리시 리스펙토르 만세!

수이 2025-02-11 2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구아 비바는 별 다섯 개인데!!!

Falstaff 2025-02-12 06:50   좋아요 1 | URL
작품한테 송구하지만 독자가 따라가지도 못하면서 별5를 찍을 수 없었답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