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부들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23
치고지에 오비오마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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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 남서부 나이지리아의 아쿠레에서 이보족 가정의 열두 자녀 가운데 n번째로 태어났다. 이보족,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작가가 역시 비아프라 공화국의 대외협력 장관을 지내기도 한 치누아 아체베. 그리고 아체베의 문학적 딸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한 나이지리아의 전형적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인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이 두 명은 1960년대 나이지리아 독립 초기에 발발했던 이보족 분리독립을 위한 소위 비아프라 내전을 심각하게 다루어, 내가 읽기로는, 문학적으로 성공했다. 나는 이보족의 분리독립 내전을 좀 고깝게 보는 인종이지만, 그렇다고 하우사족과 요르바족이 잘했다고도 절대 여기지 않는다. 아체베와 아디치에의 비아프라는 1960년대 초 이야기이고, 오비오마의 <어부들>은 이후 30여년이 흐른 1996년 3월에 욜라에서 발생한 유혈 분파주의 폭동 시절을 지나고 있다.

  그저 작품이 그 시절을 지나고 있다 뿐이지 이 책이 분파주의 유혈 폭동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치고지에 오비오마는 열두 자녀 전부 비슷한 과정을 거쳤는지는 모르지만 자라면서 키프로스, 튀르키예를 경유해 미국의 미시간 대학에서 문예창작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니 물론 부모의 헌신적인 교육열과 나이지리아의 부정부패와 군부에 반대하는 의식이 있어서 가능했겠지만, 수도도 아니고 지방도시인 아쿠레에서 외국으로 공부하러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중산층 가족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는 전 세계적으로 산아제한을 적극 권장하던 시기임에도 무려 열두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었으니 말이지. 오비오마는 첫 작품 <어부들>에 이어 <마이너리티 오케스트라>, <시골로 가는 길> 등을 연달아 발표해 첫 두 작품으로 2015년과 2019년에 부커상 최종심까지 올라 유명세를 탔다. 네브래스카-링컨 대학의 영문과 교수를 하다가 지금은 조지아 대학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오비오마에게 일곱 형제와 네 누이가 있었다고 하니 부모는 8남4녀를 두었다. 오비오마가 어린 시절에 여덟 명의 형제 가운데 두 명이 지독하게 싸운 적이 있었단다. 당시 치고지에는 이 싸움의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상상했고 그게 아마도 나이 들어서까지 머리에 남았던 모양이다. 이후 튀르키예를 거쳐 미국에서 공부하던 2012년에 자신이 상상하던 형제간 싸움의 최악의 결과와 그것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제목을 <어부들>이라고 했다.

  미리 말해두는 바, 나는 독후감에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다섯 형제 가운데 맏이와 둘째가 싸운다는 것까지 만 입에 올릴 뿐, 가장 비극적 결과와 사건 후에 벌어질 또다른 이야기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작품을 읽고 채점을 한다면 비록 만점은 주지 못하겠지만 읽는 재미가 있어서 뒤에 읽을 분들에게 조금의 힌트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스포일러는 아무리 작아도 없느니 못하다. 나도 책을 읽으며 내용이 궁금해 책을 제일 뒤 페이지로 넘겨 미리 결말을 읽어버릴까, 하던 때가 있었음에랴.


  아구 가족. 나이지리아 중앙은행 아쿠레 지점에 근무하는 아버지 제임스, 어머니는 가정주부 파울리나 아구. 작가 오비오마와 마찬가지로 이보족이다. 아쿠레에서는 수도 욜라와 달리 부족간 갈등이 별로 없거나 아예 없다. 은행원 가족이라서 상대적으로 부유한 집안 살림 때문에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동네의 가난한 아이들한테 따돌림을 받는 것뿐. 형제들은 그래도 자신들을 굳이 멀리하지 않는 또래들인 유독 가난한 카요테, 반귀머거리 토비, 맏이의 친구 솔로몬 등과 어울려 뒷마당에서 축구를 하며 놀았다. 비록 이웃 의사네 집으로 공이 날아가 창문이 와장창 깨지는 바람에 축구도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이제 별로 놀 것이 없다. 스트리트 파이터 게임기는 아이들 학교 성적이 떨어지자마자 아버지가 벌써 압수해 어디로 숨겨놓아 도무지 찾을 수 없다.

  아버지가 숨겨놓은 게임기를 찾는다고? 감히?

  오랜 세월 다양한 부족간의 다툼과 전쟁이 있었던 아프리카에는 한 가족 집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가장 강력한 힘을 보유한 수컷 가장을 중심으로 하는 연대를 필요로 해서, 아구 가족 역시 수컷 가장인 아버지는 거의 무한정한 권한을 갖고 있었고, 만약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자식들을 “구에르돈”이라 칭하는 가죽 몽둥이 혹은 채찍을 사용해 체벌하는 것이 당연했다. 다른 대륙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아프리카만큼 씨족, 부족, 종족 간 다툼이 치열하고 오래 지속한 지역이 (라틴 아메리카를 제외하고) 거의 없어서 좀 덜 그랬을 뿐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따로 보관하기로 결정한 게임기를 자식들이 감히 집안을 뒤져서 찾으려 한다고?

  작품을 시작하는 시간적 배경은 1996년 1월. 두 달 전에 아버지가 아쿠레에서 1천킬로미터 떨어진 욜라 지점으로 발령을 받아 아버지 혼자 떠났기 때문이다. 저 앞에서 말한 것처럼 96년 3월에 욜라에서 발생한 유혈 분파주의 폭동 때 수백명의 이보족 사람들이 학살을 당했는데, 이때 아버지는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1천킬로미터면 평양에서 부산까지 거리 정도? 당시 나이지리아의 교통, 이라기보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먼 길을 운전해 다닐 수 없어서 두 주일에 한번 꼴로 아버지는 토요일에 와서 일요일에 다시 떠났다.


  아버지가 주말 부부를 선택하자마자, 1월 18일에 둘째 아들 보자가 생일을 맞아 약 한 달간 맏형 이켄나와 같은 나이가 됐다. 엄마는 분명히 자식들 모아놓고 너희 모두 같은 젖을 먹고 자랐다고 했음에도 이켄나에게 젖을 물리지 않았는지 출산 후 딱 한 달 만에 둘째 보자를 임신했다. 거참. 아니면 틀림없이 삼신 할매의 축복이다. 그러니까 첫째 이켄나와 둘째 보자가 한 살 터울. 셋째 오벰베와 작중 화자 벤저민이 한 살 차이. 아래로 터울을 두고 다섯째 아들 데이비드가 있고, 막내가 한 살짜리 누이 은켐이다. 당연히 이켄나의 친구이면 어영부영 보자의 친구이기도 한데, 이 가운데 한 명이 솔로몬. 소년들이 심리적, 도덕적으로 성장해가는 작품, 그러나 지극한 비극이 생기는 “썩어가는 밀알”을 제공하는 등장인물이다. 솔로몬이 제안한다. 이제 더 놀 것이 없으니 오미알라 강에 가서 낚시를 하자고.

  책의 제일 마지막 페이지에 아쿠레 마을의 약도가 그려져 있는데, 약간 남쪽에서 동서로 흐르는 강이다. 그리 크지 않은 강처럼 보인다. 아쿠레에 처음 정착한 최초의 정주민에게는 물고기와 식수를 공급하던 오염되지 않은 강이었지만, 아쿠레 마을 주민들에게 이미 오래 전에 버려진 강이었다. 약도에는 폐수를 방출하는 공업단지나 공장이 없어서 혹시 강의 상류에 오염원을 흘려보내는 곳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하여간 책에는 애초에 사람들이 강을 숭배했으나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성경을 소개한 이후에 강을 사악한 곳으로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마도 작품 속에 자주 소개되는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에 자주 나오듯, 기독교의 시선으로, 강을 대상으로 하는 토속 신앙을 우상숭배로 몰았던 것 같다. 더구나 1995년에 한 여자의 훼손된 시신이 발견된 이후 거의 완벽하게 버려진 상태였다.

  아직 너무 어린 데이비드를 제외한 형제 네 명과 솔로몬, 카요데, 토비 등은 당연히 이런 금기를 무시하고 강에 가 스스로 어부가 되었다. 아이들이 그럴 수 있지. 나 어렸을 때도 부모 허락 받지 않고 한강에 가서 놀다가 고종사촌 명희누나가 고자질하는 바람에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두드려 맞은 적 있는 걸 뭐. 다 그러면서 크는 것이지.

  그런데 다 저녁때가 되어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하루는 동네의 이름난 미친 남자 아불루와 만나는 일이 벌어진다. 아불루는 가끔 사람들에 대해 거의 저주 수준으로 가장 불운한 예언을 퍼붓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 그가 맏이 이켄나에게 말한다. 말이 짧아 ‘이켄나’를 ‘이케나’로 부르면서.


  이케나, 너는 네가 죽을 날에 새처럼 매일 것이다. 네 혀는 굶주린 짐승처럼 네 입에서 비어져 나올 것이며 다시는 네 입속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너는 두 손을 들어 공기를 쥐려 하겠지만 그러지 못할 것이다. 너는 그날 말을 하려고 입을 열겠지만 말이 네 입안에서 얼어붙을 것이다.

  이케나, 너는 붉은 강에서 헤엄칠 것이나 다시는 그 강물에서 떠오르지 못할 것이다. 네 생명은…


  이때 하필이면 비행기가 날아 그가 말한 뒷말을 보자만 들을 수 있었다. 그건 이랬다.

  “너는 어부의 손에 죽을 것이다.”


  형제가 강에서 돌아오다 이웃집 과부 아주머니 이야보에게 낚시대를 어깨에 짊어진 것을 들켰고, 아주머니는 이 사실을 친한 엄마한테 고자질했으며, 이야기를 듣고 기겁을 한 엄마는 아버지한테 보고해, 형제는 가죽 채찍 구에르돈으로 엉덩이에 자국을 내게 만든다. 체벌을 다 끝낸 후 엄하지만 기본적으로 천성이 따듯하고 아이들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는 엉덩이에 검붉은 멍이 든 아들들을 모아놓고 진심으로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바라는 모습은 좋은 꿈을 낚는 어부, 가장 큰 고기를 잡기 전까지는 쉬지 않는 어부들의 집단이 되는 것이다. 나는 너희가 거대 조직이 되기를, 위협적이고 막을 수 없는 어부들이 되기를 바란다.”

  이후 전형적인 가부장적 가족의 맏아들 답게 더없이 동생들을 아끼고, 보호하려 모든 힘을 다하던 이켄나는 한 순간에 바뀌어 버렸다. 남동생 모두가 어부이며, 자신은 어부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다는 저주를 믿게 된 후. 그리하여 아이들이 많아 바람 잘 날 없는 이 행복한 가정에 불화와 싸움과 불행이 깃들게 되니,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는지는 직접 확인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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