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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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 2월에 태어난 폴 오스터는 2024년 4월, 77세 때 폐암 합병증으로 죽는다. 반면 작품의 주인공 시모어 티컴세 바움가트너는 1947년 11월 출생이다. 독자는 S.T. 바움가트너가 폴 오스터의 페르소나라고 단정하면서 읽게 되고, 상당 부분 그렇게 읽는 것이 합당하기도 하지만, 바움가트너와 오스터 사이에 적지 않은 다름이 있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바움가트너는 역사의 격변에 따라 폴란드/오스트리아-헝가리/소비에트/우크라이나 지역이었으며 지배국의 발음대로 각각 스타니스와부프, 슈타니슬라우, 스타니슬라비우, 스타니슬라프, 최종적으로는 이바노프란키우스크라고 불리는 고장 출신이다. 반면에 오스터는 유대 폴란드 출신이라기도 하고 유대 오스트리아 출신이라 하기도 한다. 당시 동유럽의 국경이 하도 어지러운 시절이라서. 중동부 유럽에 살던 유대인 출신이니 무수하게 많은 친척들이 나치 절멸 수용소에서 학살당한 것은 맞겠지만 원래 태생부터 픽셔니스트의 별을 타고난 폴 오스터가 죽어가면서 갑자기 환골탈태, 자기 이야기를 썼다고 믿지는 마시라. 이 작품 역시 전적으로 픽션이다. 픽션인 순간 이런 사소한 차이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작중 바움가트너 교수는 첫사랑이자 첫 아내이자 유일한 아내인 애나가 10년 전에 죽은 이후 비록 숱한 과부와 노처녀들을 섭렵했지만 어쨌든 계속 독신을 유지하면서 애나를 그린 순정의 사나이지만, 폴 오스터는 첫 아내와 결혼해 7년 만에 이혼하고, 이혼하자마자 둘째 아내 시리와 결혼해서 죽을 때까지 시리의 보살핌을 받았다. 바움가트너 선생은 평생 무자식 상팔자의 은혜를 입은 반면, 오스터는 첫 결혼에서 아들 하나, 두번째 결혼에서 딸 하나를 낳은 다복한, 다복했는지 시끄럽기만 했는지는 몰라도, 하여튼 그랬다.


  노 작가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타이틀과, 역시 같은 시기를 살다 인생의 끝자락에 닿은 노 학자 바움가트너를 등장시켜 자신을 둘러싼 가족과 10년 전에 죽은 사랑하는 아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두번째 결혼으로 시작할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을 담담하게 그려 놓은 것이, <바움가트너>를 읽으면서 독자를 조금 더 센티멘탈하게 만들어 놓았을 수도 있다.

  폴 오스터는 평생, 결과는 비극으로 끝나지만 선택할 당시엔 언제나 최선의 것을 선택한 생을 이제 다 지난 시점에서, 새삼 뒤로 돌아가 자신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고, 삶을 접는 단계에 이르러 지난 세월을 파노라마처럼 한 번 펼쳐놓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른바 글 좋은 작가가 자신의 지난 시절을 풀어놓은 작품들을 보면, <바움가트너> 역시 마찬가지지만, 살면서 명성을 제법 누려 콧대가 높아질 대로 높아진 인물이나, 이미 악마처럼 거만한 권위가 목까지 가득 찬 인간들은, 자신들이 때에 따라 아주 작은 실수는 했을지언정, 언제나 정의롭겠다고, 옳은 방향으로만 행위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저 가슴 깊이 숨겨놓은 말로 드러내면 쪽팔려 죽을 것 같이 수치스러웠고, 지금도 그걸 생각할 때마다 수치스러운 일을 솔직하게 톡 까놓는 노 작가의 마지막 작품을 나는 읽어본 적 없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서 내 가슴 속의 그런 수치는 얇은 나무 상자 속에 든 나와 함께 화장로에 들어가 활활 타 없어질 것이다. 작가라도 마찬가지지, 폴 오스터, 필립 로스처럼 마지막 작품 또는 유작 비슷한 책에서까지 나 자신을 분식할 것 같지는 않다. 차라리 최후의 순간까지 생까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족속이라.


  까딱하면 폴 오스터의 페르소나로 읽을 수 있는 시모어 티컴세 바움가트너 선생이 얼마나 늙었냐고?

  먼저 색다른 이름을 알아보자. 바움가트너. Baumgartner. Baum은 ‘나무’, Gartner는 ‘정원사’. 즉 나무 정원사라는 이름이다. 이렇게 명사 두 개를 합해서 자신의 가족 성을 만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거의, 글쎄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낫겠는데, 많은 가족이 유대인이다. S.T. 바움가트너가 1947년생. 아무리 유대인이라도 ‘시모어’라는 이름은 너무 올드해서 촌스러운 이름이다. 그리하여 바움가트너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시모어 대신 ‘사이’라 불러달라고 해서, 일흔 살이 넘은 나이가 되어도, 새로 전력회사 계량기 검침원으로 입사한 그리스계 청년 에드 파파도풀로스조차 바움가트너 선생에게 ‘사이’라고 부른다. 당연히 선생이 그렇게 부르라 청했지만. 두번째 이름 ‘티컴세’는 미국 정부를 상태로 부족의 운명을 걸고 죽을 때까지 전투를 치룬 아메리카 선주민 추장의 이름이다. 아버지는 사이가 티컴세와 같이 최후의 순간까지 용감한 남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티컴세를 아들의 이름 가운데에 넣었는데, 바움가트너는 이게 폼이 났던 모양이다. 이렇게 S.T. 바움가트너가 된다.

  양장점 3세대인 유대인 아버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젊은 유대 처녀를 얻어 아들 시모어와 누이동생 나오미를 만들고 살다가 시모어가 오하이오에서 전액 장학금으로 대학에 다닐 당시 죽었다. 역시 제대로 양장 기술을 배운 어머니가 계속 양장점을 운영해 살았는데, 오스터의 아버지가 오스터가 16세든가 그때 사라진 건 비슷하지만 바움가트너 씨는 폐에 혈전이 뭉쳐 딱 1분 만에 세상 하직한 것과 다르게, 함께 잘 살고 있지는 못했던 아내와 이혼해 엄마-아들-딸의 연대에서 찢어져 나갔다.

  바움가트너의 생애를 통틀어 유일한 아내였으며 평생을 걸쳐 사랑했던 아내 애나는 단단한 몸에 거의 모든 스포츠에 능해서, 작품을 시작할 당시엔 9년 반 전에 휴가 차 간 케이프코드 해변에서 파도를 맞으러 늦은 오후에 바다에 달려 들어갔다가, 하필이면 괴물 같은 파도와 마주치는 바람에 등이 부러져 죽었다. 늦은 시간이고 파도가 높아지는 시간이라서, 바움가트너는 애나에게 그만 하고 숙소로 돌아가자고 했으나, 애나는 그저 바라보며 웃더니 바움가트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파도를 향해 뜀박질을 시작해버렸고, 그는 그저 읽던 책으로 눈길을 던질 뿐이었다. 수영을 워낙 잘하는 애나였으니까. 여태 불행은 모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였으니까.

  이 사건이 있고 10년 이상이 훌쩍 지난 다음, 한 사람이 추운 겨울에 1천킬로미터를 운전해서 바움가트너를 보러 오겠다고 하는 일이 벌어진다. 애나 때는 바다에 들어가지 말라고 자기가 만류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고를 당하기 위하여 애나가 바다로 뛰어 들어갔지만, 십몇 년 후에는 상대가 뉴저지 바움가트너의 집으로 출발하려면 일주일 이상이 남아, 그러지 말고 차라리 기차를 타고 오라고 설득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으나, 애나의 유작을 검토할 목적으로 오고자 하는 대학원생은 더 이상 바움가트너 선생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는 것을 완강하게 사양한다. 대학원생의 안전을 위하여 더 이상 철도여행을 권유한다면, 애나의 유작 검토 계획마저 없던 일이 될 수도 있을까? 아마 그럴 것 같다. 학생을 위하여 이미 차고와 지하실 공사를 마쳤고, 정원까지 직업을 정원사로 바꾼 저 그리스 출신의 옛 검침원 파파도폴로스에게 용역을 주어 깔끔하게 마친 상태. 학생으로서도 부담을 더 주는 것은 진심으로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기차를 타고 오면 교수가 렌터카를 빌려주겠다고 제의했을 정도이니 내가 학생이라도 차마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듯.


  이런, 다른 말만 했다. 바움가트너는 늙었다.

  서재에서 키르케로그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다가, 인용해야 하는 책을 아래층에 두고 온 기억이 났고, 동시에 오전 10시에 누이에게 전화하겠다고 약속한 것도 떠올랐다. 그래서 불편한 다리로 아래층에 내려오니까 뭔가 타고 있는 콕 쏘는 냄새가 난다. 아차, 아까 아침식사용으로 달걀 두 개를 삶았는데 세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삶고 있는 거다. 물은 당연히 다 졸았고, 계란도 이미 산소결합을 끝내 까맣게 타버렸으며, 언제라도 화재가 날 수 있는 상황이라 바움가트너는 냄비용 장갑이나 행주 말고 그냥 맨손으로 냄비를 들어올리다가, 아 뜨거, 손을 데 버리고, 냄비는 부엌 돌 바닥, 타일 위에 쨍그랑, 아주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찬물을 틀고 수도꼭지 아래 손을 대고 한 3~4분 있으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엌에서 뭘 하려고 했더라?

  이때 전화가 온다. 아차, 열시에 나오미한테 전화했어야 하는데. 그 새를 참지 못하고 전화를 했구먼.

  그러나 아니다. 미지의 남자 목소리. 앞에서 말한 전기회사 계량기 검침원. 오늘 아침 9시에 온다고 해놓고 아직 도착을 못해 사과를 하고 곧바로 오겠단다. 그러자마자 초인종. 미국 택배회사 UPS 직원 몰리다. 지난 5년간 1주에 두세번씩 방문해 바움가트너 선생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환하게 밝은 표정의 흑인 30대 여성. 몰리를 잠깐 만날 수 있는 기쁨을 위하여 바움가트너는 1주에 두세번 책을 구입해 포장도 뜯지 않고 지역 도서관에 책을 기증하는 걸, 몰리는 모른다.

  다시 전화가 울린다. 이번엔 나오미겠지. 또 아니다. 9년 반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집안 살림을 깨끗하게 유지시켜 준 라틴계 플로레스 여사의 딸 로지타이다. 플로레스 여사 일이 아니라 목수 아버지 플로레스 씨가 늘 하던 원형 톱을 작동하다가 손가락 두 개를 잘라버린 사고를 당해, 플로레스 여사와 함께 병원에 가느라고 오늘 집에 올 수 없단다. 아휴,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바움가트너는 로지타에게 지금 의술로 잘라진 손가락은 얼마든지 다시 붙일 수 있으니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하며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또다시 초인종. 계량기 검침원 에드 파파로풀로스. 친절한 거구이며 부상으로 은퇴한 마이너리그 야구선수 출신인 에드와 함께 계량기가 있는 지하실로 내려가다가 바움가트너는 계단에서 사정없이 미끄러져 넘어진다. 냄비에 덴 손이 아파 손잡이를 잡고 내려가기가 불편해서 생긴 사고다. 어깨와 팔꿈치, 그리고 다른 곳보다 무릎이 너무 아프다. 에드가 다친 부위 역시 무릎이라서 동물이건 식물이건 생명을 손으로 다루는데 천부적 자질이 있는 것 같은 에드는 (그래서 바움가트너의 주례로 결혼한 다음에 정원사가 됐겠지만) 교수를 부축해 소파에 누이고, 일단 돌아갔다가 자기 일을 마친 시간에 얼음 한 봉지를 사와 얼음찜질까지 해준다.

  그러니 쉽게 말해서 바움가트너, 인생 다 살았다. A와 B를 해야 한다면, A를 잊고 A를 해야 할 때 B를 하거나, 같은 과정을 거쳐 B를 해야 할 때 A를 하거나, 둘 가운데 하여간 어떤 것을 해야 할 때 둘 다 잊는 일이 잦아졌다. 글을 쓰기 위해 저절로 숱한 단어가 파바박 떠올랐던 건 이미 오래 전 이야기, 지금은 단어 하나를 생각하기 위해 5분, 10분, 30분, 한 시간, 세 시간, 하루 꼬박 궁리나 고민을 해도 떠오를까 말까 한다. 침대에서 일어날 때 뼈마디의 움직임이 마치 그리스grease를 치지 않은 조인트처럼 삐걱거린다. 정말 삐걱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는 말이다.

  이렇게 살다가 이제 자신의 힘으로 움직일 수 없는 단계가 오면 양로원으로 가리라, 마음먹은 시모어 티모세 바움가트너. 그는 평생의 사랑이자 아내 애나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리고 애나의 작업을 인정해온 프린스턴대 영화학과 교수 주디스 포이어를 아끼다가, 연모의 정을 품다가, 사랑으로 진전하여 일흔이 넘은 나이에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청혼하려 시도해보기도 한다. 현명하지만 불행한 결혼생활 경험이 있는 두 아들의 어머니 주디스가 다정하게 거절을 해서 실망하기는 해도.

  그렇게 세상의 말년을 지내는 시모어 티모세 바움가트너. 소설을 읽는 일은 어느 만큼은 관음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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