챔피언들의 아침식사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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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트 보니것의 1973년 작품. 벌써 출간하고 52년이나 지났다. 2001년에 이형식 건대 명예교수가 ‘커트 보네거트’라는 작가 이름으로 처음 우리말 번역한 책을 냈고, 24년만에 시인 황유원이 젊은 감각으로 다시 번역해 문학동네에서 책을 냈다.

  작가로는 물론이고 일반 자유인 커트 보니것은 2차세계대전 말에 총도 보급받지 못하고 더벅머리도 깎지 않은 채 벌지 전투에 투입되어 늙은이와 소년으로 구성된 독일방위군의 포로로 잡힌 일, 포로수용소로 가던 중 하필이면 재수없게 드레스덴의 도살장 근방 지하 방공호 근처에서 밤을 나다가 밤새도록 영국공군과 미국공군의 세계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공습을 당한 불바다 지옥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일, 완전 폐허가 된 도시에서 폭격 수습 작전에 전쟁 포로, 쉽게 말해 노예신분으로 투입되어 다양하게 절단된 인체와 죽기 전 인간이 흡수한 인체 내 다른 생명체, 즉 음식물의 잔해를 수거한 일, 이런 것들이 결정적으로 보니것 뇌 안의 화학작용에 영향을 끼쳐, 뉴욕의 펜트하우스 계단에서 발을 헛딛는 바람에 굴러떨어져, 목뼈가 댕강 부러져 숟가락 놓을 때까지, 크게는 사람 자체를, 조금 작게는 끊임없이 전쟁을 시도하는 체계를 좀 우습게 보는 시니컬리스트로 살게 된 것 같다. 그래서 보니것 특유의, 흉내낼 수 없는 독보적 경지를 만들 수 있었겠지만, 사실 소설로 스타가 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살면서 이런 험한 경험을 하지 않고 그냥 평범하게 돈 벌고, 결혼하고, 아이들 낳고, 지지고 볶다가 넓지 않은 집에서 자연사하는 것이 훨씬 좋은 삶일지도 모른다.

  내가 보니것의 소설을 무척 좋아하지만, 그러면서도 보니것을 읽을 때마다 특유의 니힐한 시각과 삐딱하게 프로그래밍 된 뇌활동이 재미있는 동시에, 딱 재미있는 만큼 짠하다.


  “챔피언들의 아침식사.” 내가 미국인이 아니라서 정말인지 모르지만 제너럴 밀스 사에서 만든 아침식사용 시리얼 상품의 등록상표란다. 그러니까 여기서 챔피언들이라고 함은 마이크 타이슨이나 슈거레이 레너드 같은 미국 권투선수나 농구선수 카림 압둘 자바나 마리클 조던 같은 챔피언 급 스포츠 스타를 말하는 게 아니고 그냥 평범한 미국인, 그러나 대통령이 열을 받았다 하면 아무때나 총을 들고 남의 나라에 파병되어 드르륵 드르륵 또는 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총을 갈겨댈 수 있는 모든 미국의 젊은 여성과 남성을 통틀어 이야기하고 있는 거다. 뭐 총 들고 전쟁 나가서 이길 수 있으면 그게 챔피언이지. 총 들고 전쟁터 나가라고 챔피언이라 허파에 바람을 넣을 수도 있는 일이고. 2차세계대전 중 포로생활과 세계사적 공습, 시체처리, 포로수용 등으로 영구적 PTSD를 겪은 사람은 주로 어린이들이 아침에 먹는 대용식을 보고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소설 속에서는 문화 페스티벌이 열리는 세퍼즈타운의 홀리데이 인 호텔의 칵테일 라운지에서 일하는 바텐더 버니, 남편이 세퍼즈타운 성인 교도소에서 교도관으로 일하다가 몸이 아픈 바람에 돈을 벌어야 해 이 방면으로 진출한 버니가 다른 칵테일을 서빙할 때는 안 그렇지만 유독 마티니와 마티니에 유사한 칵테일을 주문한 손님에게 술을 건네며 하는 말이 “챔피언들의 아침식사입니다.”하고 말한다. 손님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질문할 때만 제너럴 밀스 사 운운하며 설명을 해주고. 이렇게 말한다 해서 바텐더 버니가 주인공은 아니다. 그저 몇 장면에 등장하는 조연과 엑스트라 중간의 존재감밖에 띄지 않는 출연진이다.


  누가 주인공이냐 하면 단연 작가 커트 보니것. 50살이 넘어서도 아직 마사라는 이름의 훌륭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간호사가 근무하는 정신병원 또는 신경치료기관에 다니고 있는 보니것은, 책을 위하여 두 명의 늙은 남자를 만들어 주인공으로 삼았다.

  먼저 킬고어 트라우트. ‘빌’이라는 이름의 작은 앵무새를 키우며 혼자 사는데, 탄광 속에 카나리아 새장을 들고 들어가는 광부와 같은 마음으로, 대기에 독성이 가득 차기 시작하면 빌이 자신보다 몇 분 먼저 뻗을 테니 자기는 몇 분 동안 세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72년까지 킬고어 트라우트는 117편의 장편소설과 5천편의 단편소설을 썼지만 버릇이 원고를 딱 한 부만 작성해 잡지사나 출판사에 보내는 바람에 한 편의 원고지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며칠 후에 있을 문화 페스티벌을 기점으로 다 늙어 화려한 스타의 반열에 오를 예정이지만 페스티벌 바로 직전까지는 그냥 거지 비슷하다. 그가 쓴 소설들은 주로 “활짝 벌어진 비버” 즉 아무것으로도 가리지 않고 가랑이를 마음껏 벌린 여성들의 사진이 즐비한 포르노 잡지에, 오직 페이지를 메꿀 요량으로 드문드문 실린 것이 거의 대부분이고, 그것도 어쨌거나 활자로 출판된 작품에 한해 ‘거의 대부분’이란 말이고, 출판사나 잡지사에 보낸 모든 작품에 비하면 이 ‘거의 대부분’은 무지하게 극소수일 뿐이었다. 정말 정말 극소수 작품은 어쨌거나 단행본으로 나와 있기는 한데 주로 포르노 서적을 판매하는 매대에 진열되고 있어서, (전체 인구가 아니라)책 읽는 인구의 0.031퍼센트만이 그의 작품을 읽어보았고,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무려 서너명은 될 듯하다. 이 서너명 가운데 한 명이 열세 살 정도의 글씨체를 가지고 있는 백만장자. 그가 친필로 트라우트에게 써서 보낸 팬레터 속에 인디애나폴리스 세퍼즈타운에서 열리는 문화 페스티벌 초대장과 숙박권, 그리고 몇 달을 써도 다 쓰지 못할 정도의 왕복 거마비까지 보낸 거였다. 평생 이름을 내지 못한 소설가로 얼마나 맺힌 게 많았을까? 그리하여 반쯤 정신이 나간 늙은 킬고어는 자신의 연설에서 오만 꺵판을 다 쳐 볼 심사로 거지꼴로, 이젠 불법이 된 히치하이킹으로만 세퍼즈타운의 홀리데이 인에 도착한다.


  보니것은 작품이 이곳에서 킬고어 트라우트가 드웨인 후버를 만나는 이야기라고 구라를 친다. 거짓말은 아니다. 분명히 킬고어 트라우트는, 맨주먹으로 세퍼즈타운에서 폰티액 딜러로 성공하고 시의 잡다하거나 중요한 사업 거의 전부에 문어발처럼 손을 대 큰 경제적 세력을 키운 드웨인 후버를 만난다. 만나서 무슨 일을 하거나, 어떤 대화를 한다기보다, 일단 홀리데이 인의 칵테일라운지 옆자리에, 가운데 커트 보니것을 앉힌 상태에서 만나기는 한다. 명색이 보니것인데 그럼 설마 거짓말을 하겠어? 만난다면 만난다는 것이지. 킬고어 트라우트는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보니것 건너에 앉은 늙은이가 동네에서 손에 꼽히는 부자 영감 드웨인 후버인 줄 모르고, 드웨인 후버는 하나 건너 인생 종친 것 같은 모습으로 쭈그려 앉은 지저분한 늙은이가 훗날 노벨 문학상이 아니라 “정신 생각이 질병의 원인이자 치유법이 된다.”는 구닥다리 주장이 인정받아 노벨 의학상을 받으며, 1981년에 죽어 공동묘지에 묻힐 때 미국 예술원, 학술원이 세운 기념물에 “우리는 오직 인간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한에서만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다.” 라고 묘비명을 팔 인물, 킬고어 트라우트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1972년에 인디애나폴리스 세퍼즈타운의 홀리데이인 호텔 로비의 칵테일라운지에서 만날 당시에, 킬고어 트라우트는 자기 인생이 이제 완전히 종쳤다고 확신하면서 자기가 역사상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는 사람 중의 한 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고, 드웨인 후버는 시작은 미미했으나 이렇게 창대한 노년을 맞게 되어 드디어 꿈이 이루어진 것 같았지만 딱 하나 있는 외동아들은 동성애자 그것도 바텀 역을 맡은 게이로 열네 살에 가출해 지금 칵테일라운지 앞의 소형 그랜드피아노에서 유행가를 연주해 먹고 살고, 본인도,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신경정신과적으로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에 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앗참. 드웨인 후버는 사업을 하면서 가뜩이나 총명한 두뇌를 더욱 향상시켰으며, 진일보 하기 위하여 속독법까지 익혀 웬만한 얇은 책은 앉은 자리에서 후루룩 비빔국수 먹는 속도로 읽어 치울 수 있었는데, 세퍼즈타운까지 오면서 읽을 요량으로 트라우트가 트럭터미널 휴게소의 포르노잡지 가판대에서 산 자기 소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이름도 모르는 드웨인에게 주어, 불과 몇 십 분만에 다 읽어버린 드웨인이, 책을 읽자마자 곧바로 뇌의 볼트와 너트가 풀리면서 잔뜩 압축된 상태로 고정된 판스프링이 팍 튀어오르는 바람에 갑자기 미치광이가 되어, 제일 먼저 소형 그랜드피아노를 연주하는 아들 리오의 머리통을 피아노 건반에 대고 문질러 눈물, 콧물, 혈액, 장액, 기타 이상한 점도를 가지고 있는 액체를 얼굴에서 방출하게 만들었으며, 만일 신사라면 손도 대지 않았을 여성 바텐더와 여성 작가의 얼굴 피부 세포 사이의 거리를 멀리 떨어지게(즉, 피부가 찢어지게) 만드는 동시에 골격이 정상적인 위치에 있지 못하게 만든 다음, 여성한테도 이 지랄이었으니 남자들한테는 무슨 일을 하지 못할까? 쉬운 말로 1492년에 수백만 명의 충만하고 창의적인 삶을 살고 있던 대륙에 쳐들어온 얼굴 색깔 허연 해적처럼 지독한 오폐수가 넘치는 1972년 여름의 세퍼즈타운에서 온갖 난리법석인 아수라장을 만들어버렸던 거다.

  이건 훗날 노벨 의학상을 받을 트라우트가 쓴 소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안에 나오는 나쁜 생각이 드웨인의 정신에 독으로 작용해 이런 사건이 벌어졌다기 보다, 두 명의 주인공이 만날 당시 합석했던 커트 보니것이 애초에 그렇게 작품을 디자인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커트 보니것에게 이렇게 무례한 작품을 쓸 수 있게 성격을 고착시켜준 은인으로 보니것은 전쟁 당시의 트라우마나 PTSD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열네 살이었을 때 마흔 살쯤 된 엄마의 친구이자 자기 친구의 엄마이며 기꺼이 이 책 <챔피언들의 아침식사>를 헌정한 피버 허티 여사를 들었다. 그녀에게 배운 우아한 무례함을 직접 써먹는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할 거라는 약속과 함께.

  이 책이 그렇게 마음에 든 건 아니지만 커트 보니것의 우아한 무례함을 나도 계속 따라가 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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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9-25 0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원서로 있어요 ㅎㅎ
안 읽었고, 언제 읽을지 모르겠지만,,, ㅋㅋ

Falstaff 2025-09-25 15:02   좋아요 1 | URL
이 책이 큰 재미는 없더라고요. 쇤네 셀폰 북적북적 앱에 별 셋 주었네요. 그래도 원서로 가지고 계시면 읽어보셔야지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