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법칙 민음사 모던 클래식 35
러셀 뱅크스 지음, 안명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연달아 같은 작가의 책을 읽었다. 러셀 뱅크스. 거 참. 괜찮은 미국 소설가다. 러셀 뱅크스가 이번엔 1993년에 시작해 1년 동안 미국 북동부 뉴욕 주 애디론댁 산맥 근처, 전작 <달콤한 내세>의 공간이었던 샘덴트 마을에서 멀지 않은 오세이블 지역에 사는 열네 살 사춘기 청소년 채피(채플린) 도싯의 방황과 성장을 활극적 요소를 담아 재미있게 써놓았다. 내가 말하는 ‘활극적 요소’ 때문에 미국의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북부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고도 했었던 모양인데, 솔직히 말해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주인공 허클베리, 그리고 이 아이와 어울려 온갖 장난을 해대는 톰 소여, 이 아이들, 정말 악당 아니던가? 어린이의 탈을 쓰고 조금이라도 측은지심이 있는 어른이라면 생각하지 못할 험한 일을 눈 하나 까닥하지 않고 해치우고나선 허리가 끊어져라 웃어젖히는 소년들. 허클베리와 톰에 비하면 <거리의 법칙>에 1인칭 화자이자 주인공인 채피는 진짜 착한 아이다. 불과 열네 살 나이에 비록 마리화나가 주는 몽롱함과 환각과 착란을 너무 사랑해서, 공부 못하고, 말도 안 듣고, 도둑질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지.
  말이 열네 살이지, 우리나라 나이로 하면 열다섯, 소위 중2다. 북한에서 이 아이들 무서워 쳐들어오지 못한다는 중2. 15년 전, 엄마는 그때까지는 돈 좀 있는 집안의 외아들이자, 키도 크고 생기기도 멋들어져 마치 JFK가 다시 환생했다는 소리까지 들은 바 있는 폴 도싯 청년과 눈이 맞아, 오빠를 믿고 피 끓는 청춘끼리 가슴만 맞대고 자자, 했다가 덜컥 채피가 들어서는 바람에 혼인을 했다고 주장을 한다. 이때도 외할머니는 돈 많고 잘 생기고 키 크면 뭐하느냐, 저 청년이 젊은 나이에 벌써 마약쟁이로 떨어져 조만간 가산 탕진하고 신세도 망칠 것이 뻔한 것을, 하며 극적으로 반대를 했지만, 그럼 어떻게 하나, 배 속에선 채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던 걸. 그래도 초장엔 사이좋게 잘 살았단다. 한 5년. 그러다가 아빠 폴이 코카인과 알코올을 과도하게 탐닉하여 돈도 다 떨어지고 이젠 제법 크고 안락한 집만 하나 남았을 때, 외할머니가 부득부득 강권을 해서 집과 매달 백 달러의 양육비는 엄마가 갖고, 아빠는 대신 언제든지 아이를 접견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는데, 코카인과 알코올로 젖은 세월에 어떻게 양육비를 줄 수 있겠는가 말이지. 외할머니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소송을 진행시킬 무렵, 아빠는 자메이카로 날라버리고 은행계좌에 남은 돈을 몽땅 자메이카로 옮긴 채 이제 작은 섬나라에서 아프리카의 피가 반이 섞인 아이들을 생산해가며 살고 있단다.
  근데 그건 몰랐지? 외할머니가 이제 나이 들어 여태 살던, 우리나라 식으로 설명하자면 다 쓰러져가는 원룸에서 좀 편하게 딸네 집에 붙어 살고 싶어서 딸을 그리 윽박질러 이혼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는 걸.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디 되면 그게 세상살이인가. 엄마는 옆 동네에 있는 공군기지에서 건설관련 기술자로 있는 켄이라는 남자한테 퐁당 빠져 곧바로 동거를 거쳐 결혼에 이르러 외할머니는, 괜히 딸만 이혼시켜버리고, 여전히 좁은 원룸에서 사는 팔자였다. 이 정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외손자가 하여튼 쫓겨나든지 가출을 하고, 부부가 오지게 싸움을 벌여 서로 사랑은 하지만 잠깐 별거상태로 들어가자 난데없이 딸이 베개 하나 들고 좁아터진 원룸으로 잘 곳을 찾아오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하여튼 새로 결혼해 이제 호적상 나, ‘채피’의 양아버지가 된 켄이 채피에겐 결정적인 쥐약이었다. 그래 켄에서 뿜어 나오는 겉으로 보면 보통의 아버지 이상의 덕성과 자애와 정을 가지고 있어 누구나 채피에게 잘 된 일이라고 하지만 정작 채피 입장에선 얼굴은커녕 눈도 마주치기 싫은 벌레같이 보이는지라,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일주일 이주일,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 년 삼 년이 지나 켄을 향한 반발심으로 학교 공부는 아예 작파를 하고 모호크 스타일의 머리모양에 코와 귀에 피어싱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저 위에서 얘기했듯이 채피의 일탈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해피스모크, 마리화나에 맛을 들여 늘 돈이 필요한 처지로 떨어져 그저 일상이 집에 있는 돈 좀 나가는 물건이면서 내다 팔아도 엄마와 양아버지가 눈치 채지 못할 것이 더 있나 온갖 구석을 뒤지는 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채피는 드디어 엄마와 켄의 방까지 진입하여 깜깜해 보이지 않는 옷장 바닥을 깊숙이 손을 넣어보니 뭔가가 잡히는 것이 있어 꺼내보니까, 낡은 검은 가죽 가방이 두 개가 나왔다. 하나를 열자 세 부분으로 분해되어 있는 22구경 소총과 소총에 탈착할 수 있는 망원경. 우와. 다른 하나를 열어보니 검은 비닐봉지가 삼사십 개 있는데 전부 옛날 동전, 즉 골동품 수준은 아니지만 희귀성으로 돈 좀 되는 동전 또는 은화 같은 것이 꽉 차 있던 거였다. 그래 이중에서 동전을 몇 개,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조금만 가지고 나가 전당포에 디밀어봤더니, 무려 80달러를 쳐주겠다는 거 아닌가. 아오! 채피의 짧은 생애 동안 무려 80달러어치의 마리화나를 사본 적이 없었단다. 그래 흐뭇한 마음으로 자신의 영혼의 친구(인 것으로 착각하는) 러스가 사는 비디오가게 위층의 아지트로 가서 함께 이것을 다 피우려고 했다가, 방을 함께 쓰는 거친 폭주족들도 가세하는 바람에 별로 피워보지도 못하고 다 없애버린다.
  그럼에도 이제 액면가가 몇 센트에 불과한 동전들이 높은 거래가를 형성하는 것을 알고 그것이 거의 다 없어질 때까지 마리화나로 바꾸어 연기로 만들어 날려버렸을 때, 드디어 엄마와 양아버지에게 발각이 나고, 몇 대 쥐어터지고 집에서 쫓겨나 러스의 아지트에 들어가게 된다.
  이미 천국의 희열을 맛보고 계신 정여사께서 젊어서 청소년 카운슬링을 겸했던 적이 있다. 그때 옆에서 어깨 너머로 갖가지 사례를 보기도 했고,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문제아 시절을 한 두 해 정도 지낸 아이’를 키웠던 입장에서 유심히 보기도 한 결과, 문제아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은 문제의 시발점은, 아 씨, 나도 양심의 가책이 좀 되는데, 거의 전부, 99퍼센트, 부모한테 있다. 채피가 왜 이리 골통 문제아가 됐을까? 이건 책의 중간부분에 나와서 여기다가 확 써놓아도 스포일러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중요한 이야기는 직접 읽으셔야 한다는 신념으로 소개를 하지 않겠으니, 독후감을 읽어주시는 제위께서는 양해해주시기 바라며, 다시 채피로 돌아와, 채피가 허클베리, 톰하고 다른 점을 하나만 이야기해보자.
  비록 쫓겨나 이제 크리스마스가 코앞에 당했어도 양아버지는 몰라도 엄마한테는 선물을 하나 해주고 싶은 거다. 이미 일탈 청소년이 된 채피 입장에서 선물을 손에 쥐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어떤 방식으로 얻느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 이 아이는 크리스마스를 한 열흘 앞에 두고 ‘빅토리아 시크릿’이란 고급 여성 속옷 파는 상점에 들어가 초록색 실크 나이트가운을 호주머니에 집어넣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아뿔싸, 가끔 자기가 조금씩 마리화나를 팔고 했던 흑인 청원 경찰 바트에게 현장에서 들키고 만다. 그래 사무실에 붙잡혀 기어이 엄마와 양아버지가 상점에 호출되어 손이 발이 되게 싹싹 빈 연후에나, 다시 학교에 들어가 8학년까지는 마치고, 집에서 생활하겠다는 전제 하에 경찰서에 넘기지 않고 돌아가게 된다. 물론 양아버지는 경찰서에 이어 소년원으로 보내 응분의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아이에게 오히려 더 좋은 교육이 될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지만. 상점 밖으로 나온 일가족 중에서 외아들 채피는 엄마한테 급하게 쓸 돈 20달러가 필요하다고 하며 곧바로 집에 돌아가겠다고 약속하고 그길로 다시 내빼 20달러어치 마리화나를 사서 다시 러스의 아지트로 향한다. 바야흐로 진정한 청소년 일탈의 길을 걷기 시작.
  이후? 범죄가 있고, 사고가 있고, 누군가가 자신의 안전여부를 확인하고 안전하지 않다면 구해줄 선의의 행동으로 오히려 자기 목숨을 잃고, 뜻밖에 선의와 지혜가 넘치는 자메이카 사람을 만나 우여곡절 끝에 채피 자신의 올바른 자존을 되찾는다는, 다분히 미국식 결말. 참 재미있는 소설이긴 한데, <달콤한 내세>에 쓴 것과 같은 얘기로 결말을 맺어야 하는 것이 아쉽다. 꼭 이런 결론을 내야 했을까, 하는 것. 요새 미국 소설을 제법 읽는다. 이들의 공통점, 아니면 적어도 어떤 스타일을 발견하는 것 같아서 찜찜하다. 소설의 판매부수를 늘리기 위하여 작가-(출판)편집자 라인이 ‘정형화된 틀을 만들어 마치 찍어내는 것 같은 작품’들. 미국 소설을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하여간 느낌이 좀 그렇다.
  위에 소개한 스토리는 전체의 1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그냥 맛보기니까 스포일러라 생각하실 필요 없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섞여 있는지 아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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