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 워치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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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라 워터스, 하면 <핑거스미스>가 떠오른다. 아무래도 박찬욱의 강렬한 영화 <아가씨>의 원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핑거스미스>, <나이트 워치>, <리틀 스트레인저>는 작가의 3, 4, 5번 작품으로 각각 2002년, 2006년, 2009년 맨 부커 상의 최종 리스트에 올라간 것들로 워터스의 전성기에 쓰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도 세라 워터스는 <핑거스미스> 한 권을 읽었을 뿐이지만 재미있고 독특한 구성과 소재를 사용한다고 생각해 망설임 없이 <나이트 워치>를 구입했다. 나이트 워치. 야경꾼이라.
  세라 워터스는 켄트 대학에서 학사, 랭카스터 대학에서 석사를 하고, 런던의 퀸 메리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얻는데, 1870년대부터 현대까지 레즈비언과 게이 문학을 공부했다. 학위 공부를 마친 그간의 연구 결과가 바로 워터스 표 빅토리아 시대의 동성애 소설로 나오게 됐고, 빅토리아 삼부작을 마친 다음 무대를 2차 세계대전 중과 종전 후의 런던으로 옮겨 여전히 여성 동성애를 담았으니 바로 <나이트 워치>가 된다.
  <나이트 워치>는 모두 세 개의 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1부가 1947년, 2부는 1944년, 3부는 1941년으로 구분해, 각 시점에서 약 1924년생 정도로 보이는 청년 한 명과 여성 세 명의 “실망과 상실과 배반,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진실한 관계 사이에 대한 진지한 접근”(wikipedia, ‘sarah waters’ 참조)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독자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그저 즐기기만 하면 장땡이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케이 카마이클. 주인집 레너드 선생이 1층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케이는 2층 세 들어 산다. 서른여섯 살. 훈훈한 9월 중순에 외출을 하기로 결심을 해, 몸에 딱 맞는 슬랙스와 부드러운 흰색 칼라가 달린 셔츠에 소매에 은제 커프스를 하고 짧은 갈색머리카락을 기름 발라 깔끔하게 넘긴 헤어스타일을 했다. 무심코 케이를 본 사람들은 첫 눈에 잘 생긴 청년으로 착각을 하지만 얼굴엔 세월의 흔적이 담긴 주름이 자잘하고 머리칼 사이로 잿빛 가닥이 담겨 있는, 신사화를 신고 있으나 이미 중년에 근접한 여성이다. 케이는 할 일도 갈 곳도, 볼 사람도 없음에도 서쪽을 택해 폭격을 맞아 초토화된 거리를 지나 원즈워스로 발길을 옮긴다.
  조금 후 덩컨 피어스는 ‘호러스 삼촌’이라 부르는 먼디 씨를 부축하며 레너드 선생 집에 당도하면서 다락방 창가에 서서 몇 시간이고 거리를 내다보던 짧은 머리의 케이가 없는 것을 알고 ‘오늘은 바커 대령이 안 보이네요,’라고 말한다. 케이가 여성 파일럿이나 영성공군지원부대 하사관 출신 정도로 생각해왔으나 사실은 전시 야간구급대원 출신으로 자기 누나 비비앤 피어스 양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준 적이 있다는 건 꿈에도 몰랐고 앞으로도 모르면서 살 것이다. 덩컨은 전쟁 초기에 양심적 병역거부자임을 밝혀 몇 년 간의 징역을 마치고 출소해, 소위 ‘애국심’의 감옥에 갇힌 시민들과 어울려 살기 힘들어 집에서 나와 자신의 전력을 모르는 양초가공공장 생산지원으로 근무 중이다. 오늘 함께 온 먼디 씨는 은퇴한 교도관으로 감옥에서 덩컨을 만나 함께 살기에 이른 후덕한 인물이지만, 보는 사람마다 이이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덩컨의 누나 비비앤, 약칭 비브는 스물여섯 또는 일곱 살의 예쁘장하게 생긴 아가씨로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지금은 아버지와 함께 런던 남부에 살며, 여태까지 약혼도, 결혼도 한 번 안 해본 여성인데 1940년대에 미모를 가지고도 스물여섯 일곱이 될 때까지 결혼하지 않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한때는 ‘결혼상담소’라고 불리웠던 결혼 정보업체의 대기실 책상에 앉아 고객들을 안내하고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안쪽 방에서 고객들과 개별적으로 면담을 하는, 보다 중요한 업무는 서른두 살의 헬렌 지니버 양이 하고 있으며, 비브의 어릴 때 희망직업은 전문변호사의 비서였단다. 헬렌의 희망직업이 마굿간에서 일하는 것이었는데 반해서. 헬렌이 보는 비브에게는 얇게 덮인 한 겹의 재 같은 우울함이 표면 바로 밑에 드리워져 있다. 매주 화요일에 비브가 싫어하는 런던의 지하철을 타고 화이트시티에 가서 동생, 먼디 씨와 함께 저녁을 (얼른)먹고, 빈곤의 시대임에도 고기 통조림을 건네준 다음, 9시 15분에 집을 나와 10시 28분에 지하철 출입구에 정차해 있는 자동차에 타자마자 운전석에 앉아 있던 이탈리아 이민 출신의 애인 레지 니그리와 깊은 키스를 나눈다. 레지 니그리는 적어도 아이 둘 이상을 둔 유부남이며 이 빈곤의 시절에 비브와 한 번씩 재미를 보고난 후에 거의 어김없이 고기 통조림(기껏해야 햄이나 스팸일 뿐이지만)을 선물한다.
  남들이 자기를 숭배해줄 것을 바라고, 누가 자기보다 더 사랑을 받는 걸 참지 못하는 줄리아 스탠딩이란 이름의 작가를 애인으로 두고 있는 헬렌 지니버 양은, 전장에 나가 전사한 남자들 때문에 여자의 수가 많아진데다가, 해외복무를 끝내고 귀국한 병사들이 전쟁 동안 변한 아내나 애인의 모습에 질겁하는 경우가 많아 날로 번창하는 결혼정보업체에서 동료 비브와 점심시간을 이용해 창문 밖 베란다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담배를 피우며 나날을 지우고 있으나 전시엔 시청에서 전쟁피해복구에 관한 업무를 보던 재원이었다. 애인 줄리아에 관한 집착이 대단해 책 출판을 위해 어슐러 웨어링이라는 여자와 만났던 일을 가지고 줄리아에게 심한 강짜를 부릴 정도다. 전쟁 말기까지 잘 생긴 한 야간구조대원으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줄리아를 알게 된 이후 이별을 고했던 전력이 있다.
  이렇게 세 여인, 케이 카마이클, 비브 피어스, 헬렌 지니버와 한 남자이자 비브의 동생인 덩컨이 ‘진실하게 친밀한 관계genuine intimacy’였다고 믿는 타자와의 우정 혹은 사랑이 무너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아름다운 이별? 웃기는 말 말라. 세상에 아름다운 이별이란 없다. 모든 이별은 적어도 한 명에게는 실망과 상실과 배신당한 끔찍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런 기분을 모른다면, 당신은 행운아다.
  그런데, 내 생각을 말하자면, 이렇게 시대를 거꾸로 배열하는 것이 과연 좋은 구성인지 모르겠다. 이 책은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고 어떻게 해서 지금의 결말이 나타나는지 설명을 하는데, 1947년, 44년, 41년, 이렇게, 책을 다 읽고 나면 처음 읽었던 1947년은 괜찮다는 평을 받는 현대소설의 경우엔 구태여 쓸 필요가 없는 부분이고, 근대 소설의 경우에도 에필로그 형식으로 짧게 언급하고 말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배열을 하니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해서라도 ‘사실은 쓸데없는 부분’에서라도 충격을 주어야 했을 터이다. 상대적으로 이런 형식은 작품의 클라이맥스를 달려야 할 마지막 챕터chapter의 결정적 한 방이 별로 효과가 없게 만들지 않는가, 의문이 들었다.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데 결말보다 충격적인 발단?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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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7-21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이 책 있는데...... 미리 읽어둘걸. 그렇다면 이 책에 있어서만큼은 폴스타프 님보다 먼저 읽는게 되었을텐데요... 아쉽네요.....(리뷰 내용과 무맥락 댓글입니다)

그건 그렇고,
리뷰 중에 ‘세상에 아름다운 이별이란 없다, 적어도 한 명에게는 실망과 상실과 배신당한 끔찍한 기분이 들게 한다‘에 밑줄 긋고 갑니다. 맞아요. 아름다운 이별이 어딨어요. 적어도 한쪽은 무너진단 말예요.

Falstaff 2020-07-21 17:20   좋아요 0 | URL
아이고, 전 다락방 님의 라이브러리가 부러운 걸요!
그죠, 아름다운 이별이 어디 있답니까. 근데 또 살면서 염병할 이별 때문에 심장에 먹줄 한 줄 안 긋고 사는 사람도 불쌍하긴 할 거 같네요. ㅋㅋㅋㅋ

다락방 2020-07-21 17:25   좋아요 1 | URL
그런 오래된 격언이 있다잖습니까.
한번도 사랑해보지 않은 것보다 사랑을 잃고 아파해본 게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