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마지막 밤 민음사 모던 클래식 33
로랑 고데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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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오래 전, 희랍에 정말 잘 생기고 힘도 좋은 홀아비가 살았다. 이 홀아비는 죽은 아내를 너무도 사랑해서 식음을 전폐하고 만날 리라를 타며 마누라 타령만 하고 있으니 이를 어쩔꼬. 어떻게 청승을 떠는가 하면, 아래 영상을 보시라. “에우리디케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네.” 프랑스의 카스트라토, 아니, 카운터테너 필리프 자루스키가 노래한다.

Che far​o senza Euridice


  이하 내용은 아실 것. 아내를 너무 사랑해 횃불 대신 황금가지를 들고, 아니다, 황금가지를 손에 들었던 인물은 아이네이스구나, 하여간 지하에 내려가 하데스와 담판을 지어 에우리디케를 다시 세상으로 끌어올리려는데, 여봐 오르페우스, 당신을 위해서 하는 얘긴데, 이왕 죽은 마누라를 다시 살린다고? 다시 생각해봐, 지하의 왕이자 유피테르와 동등한 힘을 가진 형제인 하데스가 진지하게 조언을 하다가, 도무지 오르페우스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할 수 없이 허락을 하니, 단 조건 하나를 건다. 지상에 도착할 때까지 뒤를 돌아 에우리디케의 얼굴을 보면 오르페우스의 아내는 다시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 그리하여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뒤에다 달고 지상을 향하는 끝없는 계단을 오르는데, 뒤에서 에우리디케는 연신 여보, 낭군, 나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얼굴 한 번 안 보는 거야? 속도 모르고 쫑알대다가, 나중에는 아예 강짜를 부린다. 오르페우스가 처음엔 다시 아내를 찾았다는 기쁨 때문에, 그러다가 좀 귀여워서 참고 올라가긴 하지만 점점 신경질이 돋기 시작한다. 신경질도 삼세번이라 자꾸 여보 영감, 나 죽자마자 좋아서 변소 가서 웃었지? 아니면 어째 잘 지냈냐고 말 한 마디가 없어? 바가지 박박 긁는지라, 늦게나마 지옥의 황제 하데스의 충고가 머리에 떠올라, 그래, 그래도 명색이 신이 한 조언이잖아, 에잇 좋다, 이제는 끝내자, 이만큼이면 됐다, 하고 고개를 휙, 돌려 에우리디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고, 그 순간 에우리디케는 까마득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이제 여자라면 신물이 난 오르페우스는 본격적으로 예쁘게 생긴 남자애를 사냥하기에 이르렀다가, 디오니소스 축제 때 성난 여인들에 의하여 몸이 갈기갈기 찢겨 죽는 끔찍한 최후를 맞는 이야기.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고? 그냥 심심해서. 안 알려준다.


  1980년 6월, 나폴리. 마테오와 줄리아나 데 니티스 부부, 남편 마테오는 택시 운전수, 아내 줄리아나는 산타루치아 그랜드 호텔의 청소부를 하면서 여섯 살 먹은 외아들 필리포를 키우며 가난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하루는 줄리아나의 직장에 단체손님이 들어 조금 일찍 출근을 해야 해서 아빠 마테오가 꼬마 피포를 학교에 데려다 주기로 했단다. 근데 아빠도 아침 일찍 공항까지 가는 손님과 예약이 된 상태라 피포를 깨워 함께 택시에 태워 손님을 공항까지 모셔드리기는 했으나 도시로 오는 길에 그만 지옥 같은 교통체증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거의 다, 나폴리 시내까지 와서. 이미 지각을 한 상태라 조급해진 아빠는 차를 길가 한 구석에 세워두고 꼬마 피포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차라리 뛰어가는 게 빠를 거 같아서. 피포가 어른인 아빠를 따라가기가 쉬웠겠어? 그래 자꾸 좀 쉬었다 가자고 하는데도, 지각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빠진 아빠는 억지로 피포를 끌고 가다가 파체(Pace, 평화)골목과 포르첼라 거리가 만나는 모퉁이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모여선 가운데를 기어이 뚫고 들어간다. 부자가 군중들의 가운데쯤에 들어선 순간 갑자기 총소리가 귓전을 때려 본능적으로 아빠는 꼬마 피포를 품에 꽉 안고 인도에 팍 엎드렸지만, 조금 후, 총알 하나가 꼬마 피포의 복부를 관통해버렸고, 피포는 그 길로 세상을 등진다.
  1980년 9월, 장례식이 끝나도 부부에게 일상적 생활이라고는 없다. 마테오는 택시를 끌고 밤새 나폴리 시내와 시외를 손님도 태우지 않고 돌아다니고, 줄리아나는 기묘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남편 마테오를 볶아댄다. 장소가 이탈리아 남부도시 나폴리임을 유념할 것. 치욕을 당하고도 복수를 하지 못하면 가문의 수치이자 불명예가 되는 곳.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에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 궁금하면 읽어보시라. 재미있으나 좋은 책은 아닌 거 같지만. 그리하여 줄리아나는 어느 날, 마테오에게 치명적인 주문을 한다. “내 아들을 돌려줘, 마테오. 내놓으라고.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적어도 내 아들을 죽인 놈의 대가리라도 가져와!” 그리하여 마테오는 결심한다. 그렇게 하기로. 이런 종류의 사건, 나폴리 조직폭력배 집단의 대빵을 가리는 전쟁은 결코 진상이 밝혀지지 않는다는 담당형사의 말에도 불구하고, 마테오는 살인자 토토 쿨라초를 찾아간다.
  2002년 8월. 필리포 스칼파로. 커피 전문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커피 귀신. 아버지 가리발도 스칼파로로부터 커피의 비법을 전수받은 명인이면서 청출어람. 그는 베르살리에라 레스토랑에서 오직 커피만 담당하는 직원에 불과함에도 워낙 실력이 좋아 레스토랑의 주인은 ‘베르살리에라의 마법 커피’라는 카피가 든 새 메뉴판을 주문해 인쇄중이다. 사실 필리포 스칼파로는 세상의 모든 욕망과 기분에 따라 다른 커피를 만드는 귀신같은 실력을 지닌 것으로 이미 나폴리의 명사가 된 인물이다. 나이 스물일곱 살에. 종업원을 부르는 목소리가 아니라 개를 부르는 주인의 모습으로 커피를 주문한 토토 쿨라초에게 커피를 담은 쟁반을 가져간 필리포는 그의 앞에 서서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외친 다음, "토토 쿨라초! 토토 쿨라초!" 예리한 칼로 쿨라초의 배를 찌른다. 딱 죽지 않을 만큼의 깊이로. 최대의 고통을 느끼지만 결코 숨이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그의 죽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고통, 괴로움과 눈물만을 원하기 때문. 필리포는 쿨라초의 목에 칼날을 대고 파르테노페 거리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고,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충격에 의해 쿨라초의 고통은 새록새록 심해지면서 계단을 오르고도 조금 더 걸어 세워놓은 차의 조수석에 늙은 조직폭력배를 던져 넣고 자기는 운전을 한다. 쿨라초는 고통이 너무도 심해 도망할 생각조차 못하고.
  필리포가 쿨라초를 데리고 간 곳은 1980년 6월에 짧은 생을 마감한 꼬마 피포의 무덤. 필리포는 그의 왼손을 피포의 비석 위에 올려놓고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네 개의 손가락을 잘라 그냥 땅 위에 떨어지게 만든다. 지하의 피포가 알 수 있도록. 이어서 오른손을 올린 다음, 바로 그날, 1980년 6월의 아침에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검지와 중지를 절단해 그건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 자리를 뜬다. 그가 원했던 것은 쿨라초가 살아남는 것. 아무 것도 손에 쥘 수 없고, 가장 기초적인 일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로, 일어나기 위해, 머리를 빗기 위해, 코를 풀기 위해서 매번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자연사하는 것.
  이 두 장면이 총 24부 중에서 책을 열자마자 나오는 처음 세 부의 내용이다. 그러면 1980년 6월에서 2002년 8월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도대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려고 초장에 오르페우스 이야기를 했을까? 미안하다. 안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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