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 창비시선 2
조태일 지음 / 창비 / 1975년 5월
평점 :
품절


 


  1941년생 조태일. 스무 살 때 4월 혁명의 한복판에 섰고, 스물한 살 때 5월 쿠데타로 자유와 민주주의의 종막(이라기보다 오랜 단절)을 목도한다. 스물네 살,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아침 船舶선박>이 당선되어 중앙 문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등단 2년 전에 <다시 鋪道포도에서>를 전남일보에 실은 적이 있다. 거구와 튼튼한 골격을 지닌 이 사내의 스무 살 시대에는 이후에 꾸준하게 내보일 강건한 반골反骨의 기색을 발견할 수 없었다. 반면에 1975년에 간행한 《國土국토》는 출간하고 불과 몇 년 후 내가 읽어보려 책을 구하던 시기엔 이미 금서의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이이의 초기 시들이 당시 모더니즘을 구가하던 상투성과 모호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었다는 것을 알고, 나의 20대 시절에 약간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國土국토》는 내 손을 떠났고, 이제 다시 책을 주문해 읽었을 때에야 그랬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다행이다. 알라딘에서 내가 책을 구입하고 곧바로 품절 표시가 떴으니. 그리고 아쉽다. 글씨체는 예전 금속활자 특유의 모습이로되 실제 활자로 찍은 질감이 나지 않아서.
  조태일. 말이 필요 없는 반골기가 가득한 강건한 반항시인. 1964년에 등단하여 굴욕적인 한일 협상과 베트남 파병이 결정되는 것을 본 그는 다음해인 1965년에 《나의 處女膜처녀막》 연작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반항시인의 대열에 서게 된다. 시인이 말하는 ‘처녀막’은 자유이고, 민주주의이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시민들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한 순간 5월의 쿠데타에 의해 열상裂傷을 입고 말아서 시인을 통탄하게 만든다.


  오월 내가 누워 있던 잔인한 새벽은 / 침실은 저 가까운 기억의 바다로 가 / 크게 생각하라. 크게 생각하라. // (중략) // 나의, 당신의, 상한 처녀막은 / 혁명으로(65년에 박정희 쿠데타라고 말하는 자체가 자살행위라 ‘혁명’이라 불렀던 것으로 짐작함) 파열돼서 부끄러워라. / 부끄러워라. 당신의 병사의, 시인의 처녀막도 / 혁명으로 파열돼서 정말 원통해라. / 아아, 내 작은 한줌의 자유여. 민주여. / 나의 상한 처녀막 근처에 웅성이는 / 고달픈 아우성을, 쫓기던 음성을 듣는가. (후략)  <나의 處女膜 ①> 부분.


  평론가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나는 위의 연작시를 읽으면서 ‘울분의 시’라는 의미가 주는 명확한 한계, 즉 현재 처한 상태에 관한 슬픔과 분노와 그것들의 토로 이상을 발견하지 못한다. 이런 ‘울분의 시’는 일찍이 김수영이 말했던 바,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방만 바꾸어버린 것과 유사하다. 그리하여 조태일 역시 반항시인에서 진정한 반항이란 뜻의 ‘저항시인’으로 한 발 더 나갈 것을, 독자들은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시인 스스로도 시대가 점점 더 혹독한 정치적 겨울로 진입함에 따라 저항의 방편으로 시작詩作의 방향타를 조정했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참외>를 읽어보면, 먼저 참외의 생김을 “누우런 주먹들”이라고 칭함으로써 그 달큰하고 부드러운 과육을 미각의 유혹으로 느끼지 않고 “불끈 쥐고 불끈 쥐고 사랑을 불끈 쥐고” 세상 곳곳에, “어느 놈들은 벌판에 홀로 홀로 남아 / 어느 놈들은 청과물시장 멍석 위에서 / 불붙는 살빛 불붙는 서러운 마음씨 부비며 / 누우렇게 허옇게” 우는 강건한 주먹들, 미음의 대상을 타도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무기로 인식하기에 이른다. 반면에 현실을 압도하는 파시스트 정권에 대하여 “저것들은 하느님이다. 얼굴 고운 악마님이다. / 때 찌든 삼베치마 앞에서 털 앞에서 / 땀나는 가슴 앞에서 콩크리트 앞에서 / 저것들은 하느님이다. 얼굴 고운 악마님이다.”라고 선언을 하니 이제 남은 건 때가 찌든 삼베치마를 입은 아낙들, 땀나는 알 가슴을 내놓은 남정들이 하느님, 얼굴 고운 악마님을 물리치는 것. 그리하여 “자유가 있느냐, 숨죽여 눈으로 물으면 / 민주가 있냐, 숨죽여 뼉다귀로 물으면 / 없다, 안 돼 있다, 뚜렷하게 대답하고 / (중략) / 침들도 그 말 좀 들어 보자고 /불끈 쥐고 불끈 쥐고 주먹을 불끈 쥐고 / 왼쪽 오른쪽 귀 앞세우고 솟아”나야 한단다.
  그러나 세월은 오리무중, 후배 시인 최승자 말대로 “아무리 기총소사를 가해도 현실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터져 나온 것이 1972년 소위 ‘10월 유신’이라는 괴물. 대통령은 장충체육관에서 미리 선발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하여 투표로 결정을 하고(첫 번째 투표에서 99%의 찬성을 기록했다.), 국회의원의 삼분의 일을 대통령이 임명하며, 대통령은 헌법의 효력을 일시 중지시킬 수 있는 초헌법적인 기구로 상승시키며, 임기 6년에 무제한 연임이 가능한, 본격적인 독재 체제로 접어든다. 유신을 기점으로 박정희는 국민의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 위에서 군림하는 황제로 등극한다.
  암울한 시기. 암살이 아니라면 결코 종식되지 않을 것 같은 독재의 시절. 이때 조태일은 마흔일곱 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는 연작시 《國土국토》를 1971년부터 5년간에 걸쳐 마무리하고, 75년에 <國土序詩국토서시>를 덧붙여 이 시집을 간행한다. 그리고 순식간에 판매금지 조치를 당한다. 국토 연작은 애초에 국토-1, 국토-2... 이런 식으로 썼으나 시집 간행 즈음해서 각각의 시에 따로 제목을 붙였다고 시인의 말에 나와 있다. 당시 잡지에서 조태일의 시를 찾아 읽기에는 나도 너무 어렸을 적이다. <국토> 연작에서도 고르게 현 시대에 대한 슬픔과 울분과 통음이 등장한다. 동시에 저항의 노래도 포함을 하고 있으나, 때는 엄혹한 공포의 시대, 판을 뒤집자는 직설은 간혹 일신의 생명을 담보로 해야 했으니 깊숙한 은유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이렇게.


  번개가 친다, 아내야 바싹 다가오렴
  흐린 눈빛이지만 부딪쳐 보자.
  천둥이 운다, 아내야 바싹 다가오렴
  쉰 목소리지만 합쳐서 목청을 뽑자.
  벼락이 친다, 아내야 바싹 다가오렴
  四足(사족)을 동원해서 맨바닥이라도 치자
  우박이 쏟아진다, 아내야 바싹 다가오렴
  메마른 눈물이라도 곧게 떨쿠어 보자.


  아내야 흐린 날은 서러운 살결이나
  축축하게 부비다가
  전류가 잘 통하는 피뢰침을
  당나귀 귀처럼 머리 위에 꽂고
  의좋은 꼭둑각시처럼 춤을 추자
  높은 데 아니면 벌판이라도 좋다.
  피뢰침을 꽂고 춤을 추자.  <흐린 날은 - 國土·20> 부분


  이외에도 명편들이 즐비한 시집이다. 어떻게 지난 시절을 견디고 왔는지 뒤돌아보면 참 대견하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안타깝기도 하다. 오래 기억해야 마땅할 시인을 나는 너무 오랜만에 다시 생각해낸 것이 아닐까 싶어 조금은 송구한 마음과 함께 시집을 읽었다. 뭐 세상이 다 그런 것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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