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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의식 민족주의 - 고통을 경쟁하는 지구적 기억 전쟁
임지현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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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학자 임지현은 1959년생으로, 당시 역사학의 한 학파로 당당하게 군림했던 서강대학 사학과에서 학사부터 박사까지의 교육과정을 마쳤다. 이이가 대학 다닐 시절의 서강대 사학과는, 당대 최고의 사학자라고 칭송받던 만주 일제 관동군 출신의 이기백(친일 인물 아님) 교수를 수장으로 하는 서강학파의 전성기였으나, 서강학파라는 존경의 호칭은 임지현이 전공한 서양사학보다는 국사학을 위한 것이었다고 기억한다. 오직 내 기억이니까 정확하지 않다. 서양사학을 포함했을 수도 있다. 지금은 임지현 교수가 이끄는 서강대 사학과는 그가 열렬히 주장하는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 주의 사학이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믿지는 마시라. 이 분야에 나는 아마추어 수준이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라면 민족주의라는 커다란 장르 안에 희생자의식을 배경으로 하는 민족주의라는 뜻일 터이다.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필요한 시기가 있고, 그 시기가 지나가면 더 이상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반도가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분단이 된 후 내전을 거쳐 남과 북 공히 지극한 가난 속에서 지독한 독재를 겪었다. 이럴 때 국민들이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하지 않을까 한다. 소위 개발도상에 있을 때까지는 한 민족이라는 기치 아래 뭉쳐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경제발전을 이루는 것이 가장 큰 가치일 터이니. 이후 일정 수준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 그리고 군사력을 확보한 다음에도 여전히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일은 국가대항 운동시합이나 곧 다가올 월드컵을 더욱 흥미진진하게 즐기기 위한 수준 이상이 되면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단재 신채호의 사관인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을 존경할지언정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아와 비아의 투쟁을 주장할 수도 없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런 말을 하면 서재 친구들의 ‘친구 취소’ 클릭하는 소리 들리고 심지어 돌도 날아올 지 모르지만 고백하노니, 나는 꽤 오래 전부터 애국가를 부르지 않았고, 눈치가 보여 전혀 안 할 수는 없지만 국기에 대한 경례를 될 수 있는 대로 하지 않으며, 국기에 대한 맹세는 죽어도 하지 않고, 개정된 국기에 대한 맹세는 외우지도 못한다. 오해하지 마시라. 여호와의 증인 신자 아니다. 그리고, ‘임을 위한 행진곡’도 같은 맥락에서 부르지 않는다.
그리하여 친애하는 서재친구 단발머리 님께서 소개한 이 책의 한 페이지를 읽자마자 일초도 망설이지 않고 도서관에 상호대차 신청을 했다. “식민지 조선의 개별 가해자와 제국 일본의 개별 피해자” 그리고 “‘집합적 유죄’와 ‘집합적 무죄’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비판”이 평소에(‘자주’라고 쓰기엔 면목이 없는 빈도로) 흥미롭게 궁리하고 있던 현상이었다. 이 고민은 이과를 졸업해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은 큰 아이가 대학에 다닐 때, 왜 일본이 조선에 대한 식민지 경영을 사과해야 하느냐, 당시엔 제국주의가 세계사조라서 힘 있는 나라가 약한 나라를 강점하는 건 일종의 유행/대세 아니었느냐, 라는 물음에서 시작해 꼬리에 꼬리를 이어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아이는 그새 애 아범이 됐고, 지금 서른세 살이니까 벌써 10년 전이다.
책은 일본계 미국인 요코 가와시마 왓킨스의 소설, 원제목은 <대나무 숲에서 저 멀리>인데 <요코 이야기>로 널리 알려진 작품에서 시작한다. 내용은 강점기에 함북 나남에서 살던 열한 살짜리 요코네 가족이 전쟁이 끝나고나서 어머니, 언니와 함께 서울을 거쳐 부산으로 내려가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는 험로를 그렸다고 한다. 문제는 요코 왓킨스가 자신들이 어떻게 해서 일본땅이 아닌 조선의 함경북도에서 살게 됐는지, 조선과 함북 나남에서 일본인들에 의하여 저질러진 대 조선인 박해가 어떠했는지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일본으로 가며 조선인들에게 당한 구타와 강간 등의 잔인한 범죄에 관해 상세하게 서술해 조선인을 사악한 가해자로, 일본인을 무고한 희생자로 그렸다는 데 있고, 이것이 미국 소년들에게 권장도서로 지정이 되는 바람에 당시 미국인 다수가 조선인-가해자, 일본인-선량한 피해자라는 등식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에서 가해자는 악당이고, 피해자는 선량하게 여기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리하여 조선에서 물러가는 일본인들에게 패악질을 한 조선인들은, 일본인이 35년간 지배하며 가한 피해를 고스란히 받았던 것에 비하면 조선에 거주하던 소수의 일본인에게 저지른 작은 악행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의, 피해 경쟁을 벌이는 양식을 보여주었다는 것이 저자 임지현의 시각이다. 그리고 내 생각이기도 하다.
희생자의식과 트랜스내셔널을 연구하는 임지현의 사고는 <요코 이야기>에서 시작해 단박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피폭으로 이어진다. 즉,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야기시킨 장본인이며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학살을 저지른 가해자라기 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자폭탄의 피해를 입은 피해자 의식으로 2차 세계대전을 공유한다는 말이다. 일본을 방문한 많은 미국 대통령은 방문중 히로시마 평화공원을 들러 헌화하고 예를 표하는 일정을 잡으며, 이때마다 일본은 침략국의 위상이 아니라 피해자, 그것도 이젠 피해자를 넘어 희생자의 위상에 올라, 아우슈비츠 등에서 있었던 홀로코스트와 동일시하는 버릇까지 생겼단다. 리틀보이와 팻맨에 얻어터진 일본은 이로 인해 중국 난징에서 있었던 학살과 조선 독립군에 대한 잔인한 토벌과 간도의 조선 주민 몰살, 위안부 등에 관해 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자기들이 더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세계 도처에서 벌어져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점령할 수 있었고, 독일에 의하여 인구의 20퍼센트를 희생당한 폴란드는 자기 국경 내에서 자국민에 의하여 벌어진 유대인 학살을 별 죄의식 없이 여기면서 역사에 선택적으로 기록 또는 은폐할 수 있었다. 헝가리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에서도 마찬가지고. <요코 이야기>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에 관해 발제를 한 저자는 이후 세계 각지에서 보여준 실례를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는데, 임지현의 글솜씨가 대단해서 정말 흥미롭게 사건의 발발과 전개를 읽을 수 있다. 역시 판검사, 변호사 뿐만 아니라 역사, 경제학자한테도 재미있게 글을 쓰는 건 돋보이는 장점이다. 이렇게 책은 결론을 향해 달려간다.
희생자의식은 당연히 같은, 아니면 적어도 비슷한 기억을 연대하는 집단 사이에서 생기는 것으로, 이의 해소를 위해서는 각 연대의 “희생의 기억을 탈영토화하여 ‘제로섬 게임’ 적的 경쟁체제에서 벗어날 때, 자기 민족의 희생을 절대화하고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 뒤에 줄 세우는 기억의 재영토화에서 벗어날 때, 그래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희생할 때, 기억의 연대를 막고 있는 장벽이 터지면서” 해소될 수 있다고 결론을 낸다.
임지현은 이 책에서 피해와 희생을 섞어 사용하고 있다. 물론 책 중에 피해와 희생 victim과 sacrifice으로 정의하여 성경까지 가져와 상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지만 책이 끝날 때까지 나는 이 두 경우를 구별하기 힘들었다. 예를 들어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의 우라카미 천주당 상공에서 원자폭탄이 터져 사제, 부사제, 신도 전부가 한 순간에 화르륵, 불타 사라져버렸는데, 이들은 원폭의 피해자인가, 자발적으로 종전을 위해 희생당하기를 바랐던 순교자인가. 내 시각으로는 그저 피해자이다. 굳이 이들은 희생자로 승격을 당해야 했으며, 그럼으로 해서 일본인과 천주교는 더욱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와 종교를 강화할 수 있었다. 저자는 국가 사이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말고도 계급간 희생자의식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도 보여주겠다고 책의 앞 부분에서 말했는데, 부도난 공수표였다.
서해상 떠있는 배에서 실족해 바다에 빠진 공무원이 북한으로 표류하다가 북한 병사의 총을 맞고 죽었다. 이 불행한 사건의 주인공인 공무원은 피해자인가, 희생자인가? 명복을 빌어 마땅한 해당 공무원이 희생자가 되는 순간 누군가가 이득을 보고, 누군가는 (어쩌면) 치명적 손해를 볼 수도 있다. 같은 논리로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다가 배가 침몰해 많은 학생들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 학생들은 피해자인가, 희생자인가? 당연히 명복을 빌어야 하는 어린 학생들이 희생자가 되면서 누군가는 정치적 이득을 얻으며 ‘미안하다. 고맙다’ 라고 결코 지워지지 않을 자국을 낼 수 있었다. 이 두 건은 ‘계급간 희생자의식’이라기 보다는 ‘진영간 희생자의식’이라 할 수 있겠지만, 만고의 진리인 유일한 결론은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는 거다. 원폭에 맞아 한 순간에 형체도 없이 사라졌건, 가스를 마시고 죽은 육신마저 태워져 한 줄기 연기로 변해야만 굴뚝을 통해 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었건, 물에 빠져 죽었건, 물에 빠진 다음에 총 맞아 죽었건 간에.
아무리 책이 희생자의식을 제목으로 내세우고 있어도, 이 반대편에 있는 “가해자의식”에 관해서도 한 챕터 정도는 할애할 줄 알았다. 35년간 수탈과 학대와 학살까지 서슴지 않았던 일본인들이 과거의 피해자인 한국인들을 바라보는 시각. 마찬가지로 길고 긴 세월 동안 식민지 경영을 했던 영국인들이 인도인을 대하는 시각. 아메리카 원주민을 보는 미국인, 역시 원주민을 보는 오스트레일리아인의 시각 등. 일본인은 과연 예전에는 조선인이라 불렀던 한국인들을 자신들과 모든 면에서 동등한 인류의 구성원이라고 생각할까?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35년 이상을 가해할 수 있었던 민족. 자신들보다 못났기 때문에 (사실과 관계없이) 스스로 나라를 합치자고 병합 조약에 서명한 나라의 국민들이라고 여기고 있지 않을까. 나는 그것도 궁금하다. 민족주의의 유령은 끈질기고 또 끈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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