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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의 발달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5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7월
평점 :
70년 개띠 시인.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70년생 작가들이 좀 있는 거 같아서 위키피디아로 1970년을 검색해봤더니, 세상에나, 1970년생 유명인 가운데 5월 7일, 대한민국 희극인 ‘황봉알’이란 자의 이름은 올라와 있어도 1970년생 시인과 작가 가운데서는 부커-인터내셔널 상을 받은 한강 딱 한 명만 올라와 있다. 세상에 이런 일이. 하여튼. 난 문태준을 한 일흔 살 넘은 시인인줄 알았다. 왜 그랬을까? 월북했다가 숙청당한 소설가 이태준을 염두에 두었나, 포항제철의 신화를 만든 박태준을 떠올렸던 건가. 어쨌거나 예상외로 젊은 시인이었다.
왜 늙었네, 젊었네 말이 많으냐고? 글쎄 이이의 시를 한 번 읽어 보시라. 나보다도 한 세대 앞선 예전 시인이나 쓸 법한 단어나 의태어나 어미활용을 능수능란하게 하니 어찌 이이의 젊음에 놀라지 않았으리오. 예를 들어 첫번째로 실린 <새> 속에서, “새는 날아오네 / 산수유 열매 붉은 둘레에 // 새는 오늘도 날아와 앉네 / 덩그러니 / 붉은 밥 한 그릇만 있는 추운 식탁에 // 고두밥을 먹느냐 // 목을 자주 뒤쪽으로 젖히는 새는” (전문)을 봐도 “~오네”, “앉네”라는 표현. 또 “고두밥을 먹느냐”는 의문문 형의 어미 같은 것도 요즘 시인들은 별로 쓰지 않는 어미활용이다. 아마 거의, 거의 쓰지 않을 걸? 해설을 쓴 평론가 김주연도 제일 앞쪽에서 “어룽어룽” “조촘조촘” “물렁물렁” “슬금슬금” “들썽들썽” “생글생글” “간질간질” “까닥까닥” “미끌미끌” “얼금얼금” “들썩들썩” “끔벅끔벅” “조마조마” “조금조금” 등의 의태어/의성어 사용을 언급하고 있어, 그걸 유심히 읽었던 아마추어 독자의 어깨를 으쓱으쓱하게 해준다.
시 낭독으로 이야기하자면 두번째 시로 실린 <한 송이 꽃 곁에 온>의 초두에 “눈이 멀어 사방이 멀어지면 / 귀가 대신 가 / 세상의 물건을 받아 오리”라 하며 마지막을 “나 먼저, 오래 쓴 눈을 감네”로 끝내고 있어서 적어도 시인이 잠깐 눈에 문제가 있었나 보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눈 대신 귀라고 한 바, 아무래도 제일 먼저 인상 깊었던 시는, 이것,
귀 1
초여름 밤에
미끄러운
산개구리 내려와
연못은
울퉁불퉁하고
산개구리는
청포도알을 낳고
청포도알을 낳고
나의 연못은
청포도잎처럼 커져 (전문)
인데, 앞의 시에서 눈이 멀어져 귀가 대신 갔다는 얘기도 했고, 시의 제목이 또 <귀 1>임을 감안하면, 이 시는 초여름 밤에 산개구리가 연못에 내려와 청포도알 같은 알뭉치를 낳는 걸 보고 쓴 시가 아니라 밤에 방이나 마루에 걸터앉아, 아니면 마당에서 산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들은 귀가 눈 대신 미물의 수정, 산란하는 정경을 상상해서 쓴 시라고 읽어야 마땅하겠다. 연못에 산개구리들이 잔뜩 몰려 들어와서 수면이 개구리들의 대가리와 등짝 때문에 울퉁불퉁하고, 서로 엉겨 산란과 방정을 하는데, 연못 밑에 낳은 알이 꼭 청포도알 같았을 거라는, 바로 여기가 내가 읽은 포인트로, “같았을 거”란 감상이었다. 이런 시를 70년 개띠가 썼으면 분명 시골 출신일 터, 앞날개를 보니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단다. 음. 이런. 암만해도 문태준, 심상치가 않다. 그래 있는 건 시간하고 돈밖에 없어서 문태준을 검색해보니, 아아, 이이의 시집 ≪맨발≫을 읽었고, “시인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닌가비여”라는 제목으로 독후감도 썼다. 아놔, 그때도 1970년이 아니고 1950년생인줄 알았다고 적었었다. 어쩐지 씨, 눈에 익더라니까.
시인에게는 피할 수 없는 화두가 하나 있다. 바로 ‘시’ 자체가 그렇다. 아니다. 시 자체가 “그런 거 같다.” 예컨대 내가 잘 인용하는 황지우의 <귀소歸巢의 새 2>도,
“숲새는 지 울음이 들릴락말락한 까마득한 달팽이관 속으로 날러가부럿다 지 울음으로 숲 둘레를 막아놓고 그 숲에 집 지은 숲새는 가청권 몇 옥타브 우에서 끝없이 목이 쉬었다……사이사이에……지가 깃든 수풀 밖으로 또 다른 숲이 있능가없능가 의심하면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 1983. 한자는 전부 한글로 변환했음)
가청권 몇 옥타브 위에서 목이 쉬도록 노래하는 숲새가 시인이고, 숲새의 울음이 시, 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라 해석할 수도 있다. 가청권의 밖에 있다는 거, 그것도 몇 옥타브나 위에 있다는 건, 보통의 청각 가지고는 감각할 수 없다, 훈련받은 지성이 뒷받침한 자들만 쾌락을 얻을 것이란 황지우 특유의 (밉지 않은)오만일 수도 있다는 거. 황지우가 이렇게 노래하고 25년이 지난 2008년에 문태준은 시를 자신의 목숨이라 선언한다.
두꺼비에 빗댐
ᅳ 詩
내 걸음 가다 멎는 곳 당신 얼굴 들썽들썽해
천천히 오직 천천히
당신의 집과 마당을 다 둘러 나왔소
습한 곳에 바쳐질 조촐한 나의 목숨
나의 서정(抒情) (전문)
문태준은 어느 날 집 마당을 어슬렁어슬렁 걷는 두꺼비를 본 모양이다. 나는 작대기 세 개를 달고도 쫄병생활을 할 때, 작대기 네 개짜리 고참이 작업하다가 기어 나온 두꺼비를 삽 뒤판으로 두드려 잡아 껍데기 벗겨 구워 먹는 걸 눈으로 직접 봤지만 시인은 구워 먹는 대신, 두꺼비의 여유작작하고 달관한 듯한 여유, 그리고 습한 구석을 찾아 들썽들썽 가는 것을 보고, 허벅지를 탁, 친다. 아, 이게 시로구나. 하고. 따뜻하고 밝은 양지가 아니라 겨우 습하고 찬 곳에 바쳐질 문태준의 서정, 감정이 시며 자신의 목숨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래, 시가 별 거냐, 사는 게 시고, 시가 사는 모습이지.
시집의 4부에 재미있는 시가 나온다. 시집을 다 읽자마자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꼭 소개를 해야겠다 마음먹은 시다.
이별이 오면
이별이 오면 누구든 나에게 바지락 씻는 소리를 후련하게 들려주었으면
바짓단을 걷어 올리고 엉덩이를 들썩들썩하면서
바지락과 바지락을 맞비벼 치대듯이 우악스럽게 바지락 씻는 소리를 들려주었으면
그러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틀어막고 구석구석 안 아픈 데가 없겠지
가장 아픈 데가 깔깔하고 깔깔한 그 바지락 씻는 소리를 마지막까지 듣겠지
오늘은 누가 나에게 이별이 되고 나는 또 개흙눈이 되어서 (전문)
세상 살면서 이별 한 번 못해본 사람은 정말 행복한 인간이다. 인간도 아닌 인간이다. 양희은의 노래 가사처럼 “누구나 사는 동안 한 번은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는 게 사람 사는 일이다. 그럼 여러분도 그 우라질 이별이 얼마나 아픈 건지 잘 아시지?
문태준은 이별이 오면 바짓단을 씀벅 걷어올리고 엉덩이를 아래위로 들썩거리며 쓱삭쓱삭 바지락 껍데기가 깨져라 치대며 씻는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단다. 시를 읽으면서 즉각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진다. 이별의 순간 차라리 이런 모습과 소리를 들어서, 그래서 오늘 겪는 가장 아픈 곳이 깔깔하고 깔깔한, 깔깔하고 웃을 만큼 깔깔하거나, 상처가 여기저기를 후벼 파 깔깔하고도 깔깔한 것이 서로 개흙처럼 엉겨버렸으면 좋았을까? 세상에 이런 역설을 터뜨릴 시인이 몇 명이나 될까. 어떤 시인은 이별을 말장난을 하느라고, 이 별에서 벌어지는 사건, 뭐 이런 식으로 쓰는 것도 봤는데, 거기다 대면 문태준의 이별, 이 생각 속 놀라운 시청각 효과야말로 이이의 시를 절창으로 과장해도 별로 어색하지 않잖아? 그렇지 않아? 않으면 말고.